137화: 명경기
““와아아아-!””
쏟아지는 환호성 사이에서 대치한 두 사람.
성현이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앞에 선 김규호를 바라보았다.
호면 너머로 드러나는, 담담한듯한 표정.
하지만 한 겹 벗겨 보면 그 안에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승부욕과 포기를 모르는 도전 정신으로 가득 차 있음을 성현은 알았다.
시합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차분하게 내리누르고 있을 뿐, 가진바 의지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성현에게는 썩 기껍게 느껴졌다.
‘훌륭해.’
얼마나 많은 검도인이 성현의 앞에서 절망하고 체념하여 검을 꺾었던가.
아예 완전히 죽도를 놓아버린 이만 수십이 넘고, 단순히 도전하기를 포기해버린 사람은 다시 거기서 수십 배가 넘었다.
비단 ‘전’에 있었던 일만 헤아려도 그랬다.
과거로 돌아온 지금까지 합하면 그 위에 수십 명은 더 쌓을 수 있으리라.
작년 말부터 검도 대회에 나가면 ‘절대 이길 수 없다.’라든가, ‘내 상대가 아니야.’ 같은 패배 의식에 젖은 시선을 자주 받고는 했으니.
여러 번 겨룬 것도 아니고 단 한 번의 시합에서도 그랬을 정도다.
“······.”
반면에 지금 김규호는 어떤가?
그는 성현과 몇 번을 맞부딪쳤고, 그때마다 들인 노력이 무색하게도 번번이 패배했다.
설령 꺾였다 해도 실망하지 않았을 정도로.
하나 김규호의 눈에서는 여전히 꺼지지 않는 투지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훌륭하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이는 한때 모든 검도인이 갖기를 바랐던 바로 그 의지였으니.
‘최선을 다해야겠네.’
만족스러운 의지를 보여준 김규호에게 성현이 돌려줄 수 있는 보답은 하나.
온 힘을 다해 상대해주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후배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마음가짐을 벗어나, 제대로 된 ‘적’을 상대하듯이.
중단세를 취한 성현의 두 눈에 사납고 흉포한 의지가 어렸다.
과거로 돌아와 처음으로 보여주는 모습.
‘적’을 만난 성현이 어떻게 대하는가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미쳤군.’
달라진 분위기를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역시나 바로 앞에 서 있던 김규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딘가 ‘만족스럽다’라는 티가 팍팍 나는 성현의 시선에 인상을 찌푸리려 했던 그가 오싹함을 느끼게 만든 변화였으니까.
가해오는 압박 자체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사람의 형상을 한 귀신 같아 보일 지경!
보이지 않는 기백이 날개처럼 피어오르며 주위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모든 변화를 지켜본 김규호는 이를 악물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죽도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꽉 들어갔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진정하자, 진정.’
애써 자신을 타이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해봐도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정신이, 육체가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선 괴물의 강함을─
자신이 앞으로 몇십 년이나 되는 아득한 시간을 들여야 겨우 따라잡을 듯 보이는 신의 그림자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한 생각에 무릎이 꺾일 뻔한 것도 잠시.
불쑥 치솟은 생각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였다.
상대의 분위기가 달라졌고, 그게 너무나 압도적인 나머지 절망스럽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이기지 못할 거란 건 이미 알고 나왔잖은가.
바라는 건 단 하나.
패배하더라도 굴하지 않는 것.
“하-”
김규호가 사납게 웃으며 이를 드러냈다.
마치 그에 맞추기라도 하듯 심판이 깃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시작!”하고 외쳤다.
후일 고교 검도 명경기 하면 무조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경기의 시작은, 처절하기까지한 김규호의 기부림이었다.
“으랴아앗─!”
시합의 시작과 이루어진 타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김규호가 죽도를 내질렀다.
바닥을 박차는 힘을 그대로 살려 노도처럼 몰아치는 격자.
죽도가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성현의 머리를 노리고 단두대의 칼날처럼 떨어졌다.
시작과 동시에 허를 찌르는 수도 이만큼 갈고닦으면 이미 기술의 경지다.
실력이 없는 자라면 곧바로 점수를 내주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타돌을 막아내느라 경기 흐름을 내주었으리라.
만약 성현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성현은 날카로운 빛을 품은 눈으로 김규호의 격자를 응시했다.
단지 깨닫는 것만으로도 그를 한국 제일의 위치에 올려놓은 그의 ‘눈’은 지독히도 빠른 죽도의 움직임을 영화의 슬로모션처럼 파헤쳤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도.
미래를 예측하는 것처럼.
그의 눈에는 모든 게 보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실낱같은 빈틈을 찌른 것처럼 느껴졌던 타돌은 쉽사리 막혔다.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김규호는 굴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완성도 있는 타돌이었으나, 이것으로 끝낼 수 있다는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은 까닭이다.
상대는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손이 닿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괴물이기에.
이번 타돌은 그저 한순간, 상대의 흐름을 잡아끌고, 자신이 주도권을 잡는 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족했다···.
‘계속 간다!’
“으랴아아앗-!”
의지를 다잡으며 김규호는 공세를 이어나갔다.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서, 상대가 공격할 수 없도록 파고들면서, 멈춰서면 죽는다는 각오로 죽도를 계속해서 휘두른다.
이쪽이 주도권을 쥐고 경기를 운영하는 한 상대도 무리하게는 나설 수 없다.
여차하면 반칙까지 범하는 것을 각오하고, 흐름을 계속 이어나가며 기회를 잡아낼 생각이었다.
“하아앗-!”
물론, 그걸 가만히 지켜볼 성현이 아니다.
격자와 격자 사이, 아주 작은 틈을 당연하다는 듯 꿰뚫는 반격.
죽도가 김규호의 목을 노리며 화살처럼 쏘아졌다.
이번 경기 처음으로 시도된 성현의 공격이었다.
“젠, 장!”
훅 찔러오는 일격에, 김규호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죽도가 어깨를 스친다.
분명 제자리에서 발 구름을 했을 뿐인데도, 죽도에 담긴 힘은 기겁할 정도로 묵직하여 김규호의 자세를 흔들었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기술적 완성도다.
‘미친···!’
김규호는 억지로 자세를 되잡으면서도 속으로 욕지거리를 재차 내뱉고야 말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놀란 마음을 다잡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숨 쉬는 것마저 잊고 흐름을 이어갔건만, 이토록 쉽게 반격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지 누가 알았으랴.
성현이 보여준 경지는 이제 그에게 어떠한 존경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그만큼 무시무시하고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포기하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어떻게든 이기고야 말겠다는, 간절하고도 처절한 의지만을 불태울 따름.
우습게도 상대가 강할수록 투지가 끓어오르는 것이 바로 김규호라는 소년이었기에.
“으랴아아-!”
기부림과 함께 자세를 고치고, 다시금 거친 공세를 몰아쳐간다.
절대 꺾이지 않을 기백으로 무장한 김규호의 연격은 그가 기존에 가졌던 한계를 한 발자국이나마 넘어선 것이었다.
이제껏 성현과 백성호만이 공유했던 천부(天賦)의 영역에, 기어코 그 또한 올라선 거다.
단 한 발일지라도.
더 가까이, ‘가장 위험한 거리’라 불리는 근간까지 다가선 김규호는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반격에 복수하듯 온 힘을 다한 찌르기를 시도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쏘아진 죽도가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성현을 노렸다.
그것을, 성현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타악-
죽도 특유의 대나무 소리가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겹쳐지듯, 두 개의 소리가.
단숨에 목을 꿰뚫을 것 같던 김규호의 찌르기가 바짝 세운 성현의 죽도에 흘려내진 까닭이다.
“······!”
어떤 공격도 막힐 각오는 했다.
···했었다고 생각했다.
이번 찌르기가 막히기 전까지만 해도.
검도 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본, 새로운 경지를 만끽하며 내지른 찌르기였다.
다시 해보라 해도 어려울 그것이 기어코 빗겨나갔으니 아무리 각오 완료한 김규호라 해도 잠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마저 막아냈다고?!’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에.
그리하여 드러난 빈틈을, 성현은 이제까지 이상으로 사납게 물어뜯었다.
“하아아앗-!”
섬뜩한 소리를 내며 휘둘러지는 죽도.
찌르기를 흘려내고, 반격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은 마치 한 동작인 것처럼 이어졌다.
근간이라는 것 따위는 아랑곳않는, 시원하기까지 한 머리 치기!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맹렬하고 흉흉한 격자에 김규호는 한순간 압도당했다.
강력한 위력을 만들어내기에는 거리를 비롯한 모든 요건이 부족했음에도, 경지에 이른 기술만으로 이토록 날카로운 격자를 시도한 것이다.
비슷한 영역에 한발 올라섰기에 보이는 게 있다.
성현이 시도한 격자에는 격조 높은 아름다움마저 느껴졌다.
지금, 패배를 인정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격이 다르다’라고 일컬어지는 괴물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싸워낸 거다.
차라리 박수를 받았으면 받았지, 야유나 비난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래, 분명 그럴진대.
‘이대로 질 수는 없어-!’
······그걸 알면서도 김규호는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볼썽사나운 몸부림이라고 해도 좋다.
물러설 때를 모르는 멍청이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하는 건 가당찮은 발악에 불과하였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고 만다!’
검도인에게는 때로는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빠드득!
이를 부서져라 갈며 비껴졌던 죽도를 끌어당겼다.
찌르기를 위해 쏠렸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따위는 무시했다.
동시에, 김규호는 크게 한 걸음 물러서며 그것을 위로 들어 올려 성현의 머리치기를 막아세웠다.
콰악-!
어찌나 완벽하게 힘이 실렸는지 들어 올린 죽도에 철 덩어리가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팔이 처지고 무릎이 꺾일듯한 묵직함.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막아냈다는 것.
그것에 만족하며 자신의 공격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김규호는 보았다.
교차된 죽도 너머, 호면의 그늘 속에서도 선명하게 불타고 있는 귀신의 불꽃을.
“하아아앗-!”
‘아차-’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김규호가 자세를 추스르기도 전에, 죽도를 거둔 성현은 곧장 다음 격자로 이어나갔다.
물 흐르듯 연결되는 연속 공격.
흐트러진 자세로는 막지 못할 격자가 김규호를 노렸다.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허리를 지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것도 잠시의 발악에 불과했다.
이어지는 추가타는 손목을 노렸다.
무릎이 반쯤 꺾이고, 자세까지 뒤틀린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격이었다.
타아악-!
“청색, 손목!”
청량하게 울려 퍼지는 죽도 소리와 푸른 깃발을 번쩍 들어 올린 심판의 구령.
숨 막힐 듯 이어지던 공방에 마침내 찍힌 마침표에,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와, 방금 뭐였냐. 진짜!”
“김규호 장난 아니잖아! 이길 수도 있겠는데!”
“미친, 이게 학생 선수라고? 말이 돼? 어지간한 실업 선수도 상대가 안 될 거 같은데?”
“백성호만 적이 아니었네···.”
열기에 찬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시합 진행 중에는 두 사람의 투쟁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으로 인해 말문이 막혔으니.
학생 검도에서 볼 것이라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명경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어찌 입밖으로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허어어···.”
황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