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벼랑 끝
“백색, 머리!”
주심이 승자를 선언함과 동시에 깃발을 들었다.
청백 두 가지 색깔 중, 하얀색 깃발을.
그건 이번 춘계 전국 대회 4강에서 용암고가 부여받은 색깔의 깃발이었다.
치열한 겨룸 끝에 득점을 성공시키고 첫 번째 판을 가져간 건 용암고의 선봉으로 나선 강찬울이었던 것이다.
““와아아아-!””
두 학생 선수가 보여준 수준 높은 대결에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느 한쪽도 부족함 없이 뛰어났고, 그것들이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킴으로써 시합 자체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것이다.
학생 선수 대회에서는 쉽게 보기 힘들 만큼.
최소한 지금까지는 춘계 전국 대회에서 있었던 시합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환호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는, 실로 흥미진진한 대결이었다는 뜻이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켜보는 이들이나 그랬을 뿐, 정작 시합에 임하는 두 명은 죽을 맛이었다.
“헉, 허억- 헉!”
“허억, 헉, 헉!”
이제 겨우 첫 번째 판이 끝난 상황.
그러나 수민과 강찬울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쉴 뿐만 아니라 호면 속의 얼굴은 흘러내린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니.
호구를 착용한 까닭에 제대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입고 있는 도복 또한 예외 없이 땀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상태였다.
하기야, 몇 킬로그램이나 되는 호구를 착용한 채 잠시의 휴식도 없이 거의 삼 분가량 격렬하게 공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다.
한 시합에 배정된 시간의 절반 이상을 단숨에 소모했다는 거다.
그것도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라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까지 쥐어짜 내면서.
지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죽도가 무거워···.’
‘젠장, 엄청 힘드네.’
그래서 더욱 이 첫 득점이 중요했다.
들인 노력과 공이 큰 만큼, 얻어가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득점을 올리면서 소모하는 것과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상대에게 유리한 위치를 내어주며 소모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므로.
더불어 버티기만 해도 이기는 것과 무조건 한 점 이상을 따내야 이기는 것,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지친 와중에도 강찬울의 안색이 비교적 밝은 건 그 때문이었다.
승기를 쥐었음을 깨달았으니까.
“두 판째!”
과연 이후의 시합은 시종일관 강찬울이 주도권을 가진 채로 진행되었다.
바로 직전, 첫 번째 판에서 쭉 수민이 흐름을 이어나갔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취점으로 인한 이점, 2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 등 강찬울은 고지에 먼저 올라서며 생긴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수민은 이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더해서 여기서 크게 두드러진 게 두 사람이 가진 경험의 차이였다.
시합 전에 성현이 걱정했던 대로, 강찬울이 여러 대회를 나가서 수많은 강적과 싸우며 얻은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거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안정성이었다.
어떻게든 빠르게 1점을 따내야 하는 수민에게는 지독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고, 그는 끝끝내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시합 끝!”
““와아아아-!””
남은 시간이 모두 소모되었을 때.
점수는 첫 번째 판이 끝났을 순간과 같았다.
강찬울이 1점 앞선 채 시합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선봉 순서의 시합에서 용암고가 광천고에게 승리하며 한발 앞서 나갔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
다시 돌아온 수민에게 성현은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문 얼굴만 봐도 수민이 지금 얼마나 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에.
지금 필요한 건 위로나 격려 따위가 아니다.
그저 스스로 추스를 시간일 뿐.
다른 주전들도 그걸 깨달았는지 말없이 가볍게 어깨만 두드려주었을 따름이었다.
그 후로도 용암고 쪽으로 우세해진 경기 흐름은 쉽게 뒤집히지 않았다.
용암고의 2위로 나선 허진웅이 은우를 상대로 노련하게 경기를 운영하며 저도 모르게 반칙을 범하도록 해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재능과 실력은 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은우의 허점을 제대로 찌르는 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상대 생각대로 놀아났음을 깨달은 은우는 굉장히 분한 얼굴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상대도 용암고에서 주전을 차지할 정도의 실력자니.’
중학교 최강 검도부 선봉이었고 서준과 함께 중학 최강 듀오로 불렸던 게 은우라면, 매 대회마다 우승권을 다투는 검도부의 주전을 차지한 게 허진웅이다.
그 정도라면 절대로 은우에 비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었으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이어서 3위로 나섰던 서준 또한 패배!
딱 일 년, 아니 반 년만 더 있었어도 결과가 달라졌으리라고 생각되는 경기였다.
승리한 배주원 또한 그것을 알았는지 시합이 끝나고 호면을 벗었을 때 식겁한 표정이었고.
그렇지만 어쨌건 패배는 패배.
선봉, 2위, 3위의 3연패로 인해 광천고는 사실상 벼랑 끝까지 몰린 꼴이 되어버렸다.
“이거 설마···.”
“3연패까지 몰렸으니 가능성은 있어!”
“단체전이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용암고가 드디어 광천고를 잡나?”
뜻밖의 결과에 관객들이 술렁거렸다.
용암고가 분전을 할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했으나, 설마하니 3연승으로 광천고를 몰아넣을지는 예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광천고의 잇는 순서가 불안하긴 해도 선봉인 수민이 이번 대회 내내 쭉 이겨온 탓에 설마 했는데, “어어-?”하는 차에 내리 3승을 거둬버렸으니···.
중견이었던 강찬울이 선봉으로 간 것이 신의 한 수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부터는 한 번도 지면 탈락이야.”
대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미 3패를 당한 광천고는 앞으로 3학년 트리오 중 한 명이라도 패배할 경우 그대로 탈락하게 된다.
설령 이후에 주장인 성현이 나와서 김규호를 완전히 박살 내놓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위기였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위기.
“안 지면 돼.”
짤막하게 대꾸한 건 영준이었다.
중견 순서로 나가야 하기에 호면을 뒤집어 쓰고, 끈을 꽉 동여맨 그가 눈을 사납게 빛냈다.
“이기고 올게.”
“그래.”
시합장으로 나서는 영준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탈락을 코앞에 둔 위기 상황임에도 아무런 불안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단순히 담담함을 위장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의 마음은 표정과 같이 평온했으니까.
왜냐하면, 이번 시합에서 그가 이기는 건 이미 결정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강찬울이 중견에서 선봉으로 순서를 바꾸었을 때, 이미 영준의 승리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순서를 바꿨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
용암고의 주장, 김규호는 올해로 3학년이다.
내년에는 졸업이고, 그 뒤를 이어 용암고의 주장을 맡게 될 건 강찬울이 분명했다.
그러니 성현을 상대할 걸 대비하여 하위호환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수민을 상대하고 경험을 쌓으려 한 것일 터.
딱히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영준 또한 강찬울과 같은 처지였다면 똑같은 행동을 했을 테니까.
다만, 그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이야기다.
‘선봉을 이겨놓고 바꾼 중견까지 이기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잖아.’
선봉으로 가서 경험과 승리를 챙겼으니, 중견에서는 패배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준을 자유롭게 놔두었으면 말이다.
그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하아아앗-!”
타악-!
“─청색, 머리! 시합 끝!”
폭풍처럼 휘몰아친 영준은 용암고의 중견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전’에는 정철의 뒤를 이어 광천고를 지탱하는 에이스이자 소년가장이었고, 지금은 성현에게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더 강해진 영준이다.
뛰어난 재능에 피땀 어린 노력, 거기에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까지 더해졌다.
강찬울이 덤비고서도 이길까 말까 한 영준을 수재에 불과한 김현우에게 이기라 하는 건 무리한 요구였다.
광천고의 첫 승리!
“이제, 너희 차례야.”
돌아온 영준이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대현과 윤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은 역할을 다했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주장인 성현에게까지 순서를 잇는 건 그들의 몫이었다.
“좋아! 선배답게 후배들 커버해주러 가볼까!”
씩 웃으며 대꾸한 대현은 시합에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켰다.
용암고 5위로 나선 이도찬을 상대로 2대1 아찔한 승리를 거두며 광천고의 패배를 한 걸음 더 뒤로 밀어낸 것이다.
늘 장난스럽게 떠들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던 대현이지만, 실력마저 우스운 건 아니다.
그 또한 성현에게 지독한 가르침을 받은 건 마찬가지였으니.
‘이거, 절대 지면 안 되는 이유가 늘었네.’
윤호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경기의 승패를 떠나 다른 3학년 트리오는 이겼는데 진다면 계속 놀림 받을 테니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제나처럼 서늘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시합에 임한 윤호의 속에서는 ‘무조건 이긴다!’라는 의지가 용암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곧장 드러났다.
용암고의 부장, 김수민─광천고의 선봉 수민과 이름이 같았다!─을 상대로 1대0 승리를 거둔 거다.
꽤 진땀을 흘린 신승이기는 해도, 어쨌건 승리는 승리.
광천고가 용암고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던 저울을 처음 상태로 되돌리는 순간이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는 처음 상태처럼 보이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
광천고가 기어코 탈락의 위기를 벗어나 결승 진출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사실을.
이유야 말할 것도 없다.
광천고의 주장은 공식전 전승, 지난 한해 동안 모든 경기에서 승리한 명실상부한 괴물이었으니!
““와아아아-!””
“3연패 후에 3연승이라니.”
“진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시합이네.”
“이제 주장으로 이성현 나오는 거 아냐? 그럼 광천고가 이기겠네.”
“크, 지는 줄 알았는데 광천고는 역시 광천고다.”
3승 3패의 극적인 상황.
하지만 의외로 관객들은 담담한 반응이었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천고의 주장 순서로 나올 게 누구인지, 그리고 얼마나 괴물 같은지.
용암고의 주장, 김규호로는 감히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선 괴물이 바로 이성현이었으니.
“······.”
고요한 관객들의 분위기를 읽어낸 김규호가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승부가 이미 결정된 것처럼 행동하는 관객들에게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그만큼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었을뿐더러, 애초에 그조차도 시합에 임하기 전 강찬울에게 자신은 이길 수 없을 거라 말했었기에.
쓸 수 있는 건 전부 써보고, 시도할 수 있는 것도 죄다 시도해봤는데도 이기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쓸 수 있는 걸 다 써봐? 죄다 시도해봤다고?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이길 방법이 없으면 그걸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하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면 그만.
패배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은 알아도, 그 앞에 꺾여 무너지는 법은 모르는 게 김규호였다.
게다가.
“찬울아.”
“···네, 주장.”
“끝까지 똑똑히 봐라. 앞으로는 네가 상대해야 할 테니까. 알았지?”
“네! 주장!”
용암고의 주장으로서 남겨야 할 것도 있었으니.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잘 보고,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찾아. 노력하고, 계속 노력하는 거다.”
““네, 주장!””
패배 앞에 굴하지 않고, 끝없이 도전하라.
그게 용암고 검도부의 정신이다.
비단 지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경중고가 고교 최강의 자리를 지킬 때도 그랬고, 그전에도,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랬다.
용암고는 늘 도전해왔다─
김규호는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며 당당히 섰다.
그의 눈은 명확한 패배 앞에서도 불꽃이 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명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