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35화 (135/150)

135화: 원동력

춘계 전국 대회의 다크호스, 청원고를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며 승리한 광천고지만,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용암고였다.

지칠 줄 모르는 도전자 김규호와 백성호의 뒤를 잇는 천재라 일컬어지던─물론 성현의 등장 이후로 완전히 사라진 이야기지만!─ 강찬울이 있는 고등학교.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었던 빅4 시절부터 강호였고, 호군고와 금제고와는 달리 그때의 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이번 대회 최초의 위기인가.’

호군고와의 32강, 금제고와의 16강, 청원고와의 8강까지, 총 세 경기를 치르면서도 성현은 단 한 번도 위기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그저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길 수 있겠지.’라고 예상했을 뿐.

실제로 경기는 그가 생각한 그대로 되었다.

앞서 만났던 세 개의 고등학교 검도부는 광천고를 제대로 몰아붙이지 못했고, 경험치만 쌓는 역할에 그쳤으니까.

하지만 용암고는 달랐다.

이미 몰락한 前 빅4와는 달리, 아직 그 위상을 유지하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

김규호가 그를 피해서 다른 순서로 나온다면, 용암고가 이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물론 용암고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이길 거였다면 추계 전국 대회 때도 출전 순서를 바꿔 나왔으리라.

당시 금제고가 먼저 출전 순서를 바꿔 시합에 나섰었고, 그 덕에 용암고 또한 출전 순서를 바꿨어도 별다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때에도 정면 승부를 택한 용암고가 이번에 갑작스레 방침을 바꿀까?

성현은 그 질문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측대로, 용암고가 택한 건 다시금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 │ 광천고 │ 용암고

선봉 │김 수 민│강 찬 울

2 위 │김 은 우│허 진 웅

3 위 │이 서 준│배 주 원

중견 │최 영 준│김 현 우

5 위 │손 대 현│이 도 찬

부장 │조 윤 호│김 수 민

주장 │이 성 현│김 규 호

“이번에는 출전 순서 바꿀 거라 생각했는데.”

“정면 승부 안 된다는 거 추계 전국 대회에서 알았을 텐데 왜 또···?”

“실업 검도가 아니라 학생 검도니까 그렇지. 도망쳐서 편한 길로 이기면 그게 진짜 승리야?”

“그래도 이기는 쪽이 더 낫지.”

출전 선수 명단을 보며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추계 전국 대회에서 맞붙었다 깨진 용암고이니만큼 이번에는 순서를 바꿀지도 모른다고 예측했는데, 그게 빗나간 까닭이다.

물론 강찬울이 본디 중견에서 선봉으로 간 건 나름 변경이긴 하지만, 현재 춘계 전국 대회에서 수민의 활약을 생각해보면 그건 절대로 이기기 위한 순서 바꾸기가 아니었다.

일단 가장 강한 김규호가 성현과 그대로 맞붙는 것부터가 용암고의 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로 출전 순서를 바꾸어서 이기고 싶었다면 강찬울이 선봉으로 가는 변경이 아니라, 주장인 김규호가 다른 곳에 가는 걸 택했을 테니까.

“어쩐지 제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다른 관객들의 웅성거림에 시합을 기다리던 권도연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함께 대회를 관람하던 김동안이 물었다.

“추계 대회 때 말이죠?”

“네. 아하하. 이제 와보니 부끄럽네요. 당연히 바꾼다고 생각했던 게···.”

추계 전국 대회 4강에서 광천고와 용암고가 맞섰을 당시의 일이다.

권도연은 용암고가 승리를 위해 출전 순서를 바꾸리라 예측했었다.

반대로 김동안은 그럴 일 없을 거라 단언했고.

결과적으로, 정답을 맞춘 건 김동안이었다.

용암고의 감독, 구영철과 용암고 주전들은 승부를 피해 이기기보다, 당당하게 맞서기를 택했다.

성적보다는 성장에 중심을 두는 학생 검도답게.

지금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좀 아쉽긴 해요. 만약 바꿨다면 지금의 광천고는 십중팔구 용암고가 이겼을 텐데 말이죠.”

“당장 거둘 승리에 집착하지 않는 겁니다.”

김동안은 경기장에 있는 용암고 검도부 주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왜 순서를 바꾸지 않았냐는 관객들의 웅성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시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깨끗하고 진지한 표정이다.

만약 출전 순서를 바꿔 정면 승부를 피했다면 저들이 지금과 같은 표정으로 시합을 기다릴 수 있었을까?

절대로 아니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여기서 순서를 바꿔서 이기면 과연 좋을까요?”

“글쎄요. 음, 좋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반반일 거 같은데요?”

“저는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그리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좋지 못한 결과라···.”

“편한 길로 이기는 걸 배운 거잖아요. 그건 제대로 된 강함이 아니죠. 아마 구영철 감독도 그걸 경계해서 순서를 바꾸지 않은 게 아닐까요?”

결과를 내야 하는 실업 검도.

성장을 중시하는 학생 검도.

어느 쪽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용암고의 정면 승부 결정은 좋게도, 나쁘게도 보인다.

하지만 최소한, 이 선택이 패배를 만들더라도 학생 선수들을 더욱 강하게 키워 낼 것이라고 김동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상대가 강하더라도 정면에서 끝까지 맞서기를 고집하는 것. 그게 용암고와 호군고, 금제고를 갈라놓은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빅4 시절의 위상을 유지한 용암고.

반면에 한때는 같은 급이었다가 이젠 그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호군고과 금제고.

이들의 차이는 패배를 각오하고 광천고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가라고 김동안은 말하고 있는 거다.

권도연은 담담히 말하는 김동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씩 웃었다.

“좋네요, 그런 거. 그게 학생 검도의 매력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직 성적과 결과로만 이야기되는 실업 검도─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와는 달리, 학생 검도에는 이러한 낭만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곳에 수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원동력이리라.

두 사람이 그렇게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경기 준비가 끝나고, 마침내 광천고와 용암고의 4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너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응! 이기고 올게!”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시합장으로 나아가는 수민의 뒷모습을 보며 성현은 턱을 매만졌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말과는 다르게 사실 그는 반반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직접 자신과 같은 재능을 조형하고 키워낸 수민은 확실히 강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강찬울도 절대 어쭙잖은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약한 성격 탓에 경중고에서 뽑지 않았음에도 오롯이 가진 바 재능과 실력으로 용암고에 들어간 게 바로 강찬울이었으니까.

한때는 백성호와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얼 하랴.

‘게다가, 경험의 차이도 꽤 커.’

수민이 본격적으로 큰 무대에 나와 활약하기 시작한 건 올해 초 승룡기 검도 대회부터다.

그전부터 작은 대회를 꾸준히 출전하기는 했으나 본격적으로 강자들과 맞붙은 경험은 얼마 없다는 뜻이다.

그에 비해 강찬울은 용암고에 들어간 해, 즉 1학년 때부터 여러모로 활약했었다.

S 방송사의 검도 유망주 대회부터 시작해서, 회장기는 물론, 전국 대회, 거기에 국가 교류전까지 빠짐없이 나갔다는 이야기다.

큰 대회를 수없이 나가며 경험치를 쌓았다는 거고, 그건 생각보다 엄청난 차이였다.

“기대되는 걸.”

누가 이길지 확신할 수 없기에 더욱 재밌다.

성현은 경기장에서 마주 선 두 사람을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성현이가 이길 수 있다고 했어.’

‘이 녀석을 밟고 올라가서, 이성현한테 닿겠어.’

그저 성현의 말을 등불 삼아 나아가는 광신도 수민과 상대를 발판 삼아 목표에 이르려는 강찬울.

심판을 사이에 둔 둘은 서로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오직 하나의 목표에만 집중하는 눈빛과 상대 너머에 있는 진짜를 노리는 눈빛이 교차했다.

누가 승리를 거머쥘 것인가?

“─시작!”

주심이 시합 개시를 선언한 직후.

먼저 주도권을 낚아챈 건 보다 공격적인 쪽─ 상단세를 쓰는 수민이었다.

‘나는, 이길 수 있어!’

“우오오오─!”

비교적 가는 몸에서 토해내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우렁찬 포효.

처음 수민의 기부림을 듣는 사람은 호리호리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울림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만다.

상대를 기로써 제압하고,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는 거다.

탓, 후웅-!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내리치는 격자!

오롯이 첫 일격에 모든 걸 거는 상단세다운 아찔하고도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깨끗한 궤적을 그린 죽도가 강찬울의 머리를 노리며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는데, 그것을 보고 성현을 떠올린 사람이 꽤 많았다.

비록 진짜와 비교하면 많이 부족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벼락과 같은 머리치기’는 상당히 닮은 면이 있었기에.

타다악-!

물론 이를 가만히 당해줄 강찬울이 아니다.

대뜸 치고 들어와 갈겨버리는 머리치기에 점수를 내주기에 그의 경험은 너무나도 풍부했으니.

그는 재빨리 반응해 죽도를 들어 올려 수민의 죽도를 막아냈고, 수민 또한 이 정도쯤은 예상한 듯 자연스레 후속 공격으로 이어갔다.

“우오오오-!”

탁! 타닥! 타아악! 탁!

상대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연격이 몰아친다.

상단세를 취하려는 듯하며 주도권을 넘기는 것 같다가도, 강찬울이 조금이라도 뭔가를 하려면 귀신같이 흐름을 끊으며 공격을 했다.

대저 첫 일격에 모든 걸 거는 상단세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지만, 최소한 이게 엄청나게 위협적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이는 성현처럼 모든 상대에게 일격 승리를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수민이 찾은 또 다른 길이었다.

성현과 그가 가진 재능- ‘눈’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길!

오롯이 성현의 말만을 진리처럼 생각하는 눈먼 불꽃이 바로 수민이라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결과였다···.

“크읏-”

어찌 죽도를 들어 방어한 강찬울이 잇새로 작게 침음을 흘렸다.

죽도에 실린 힘이 시합 전에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배는 더 강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경기를 보고 잘 흉내 낸 가짜는 아니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하위 호환보다는 더 나은 수준이 아닌가?

‘아니, 그것도 아닌가.’

성현의 강함을 떠올린 강찬울의 눈이 깊어졌다.

만약 지금 싸우는 게 성현이었다면, 어쩌면 첫 일격에 이미 결판이 났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런 면에서 수민은 좋은 연습 상대였다.

성현에게 닿기 위해 밟을 발판답게.

‘내 목표는 이성현이라고.’

그러니까.

‘하위 호환 따위한테 발목 잡혀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단 말이야!’

“으랴아앗-!”

강찬울이 우렁찬 기부림과 함께 장작을 쪼갤듯한 기세로 죽도를 내질렀다.

수민이 어찌 끊어낼 수 없는 순간을 적절하게 노린 일격이었고, 그건 일방적으로 쥐고 있던 주도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시합 개시 직후의 기세를 유지해나가던 흐름을 바꾸는 강렬한 격자!

타악!

죽도와 죽도가 맞부딪치며 대나무 특유의 텅 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어 코등이 싸움을 하듯 붙어선 두 사람은 호면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 진 상대의 얼굴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건 성현의 말을 신앙처럼 받드는 이와 성현을 노리고 올라서려는 이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성현이가 내가 이긴다고 했다고!’

‘널 이기고, 이성현도 잡는다!’

“우오오오-!”

“으랴아앗-!”

두 사람이 재차 격돌했다.

서로의 모든 걸 끌어내는 듯한 시합이 이어졌고, 그에 관객들마저 응원을 잊고 침묵하던 때.

마침내.

타악-!

첫 번째 판을 결정짓는 일격이 이루어졌다.

벼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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