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청원고
광천고의 승승장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32강에서 호군고를 격파한 그들은 거침없이 내달렸고, 16강에서 만난 금제고를 상대로도 어렵잖게 승리를 거두었다.
호군고와 마찬가지로 금제고도 많은 준비를 해왔다는 게 보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두 고교 검도부 사이에는 감히 부정 못 할 체급 차이가 존재했다.
성현뿐만 아니라, 그에게 일 년간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은 수민과 3학년 트리오 또한 현 한국 고교 검도계에서 보기 드문 강자였으니.
심지어 16강에서는 1학년들이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해주기까지 했다.
이기지는 못했지만, 무승부는 한 번 내준 것!
32강에서의 패배를 딛고 일어선 그들이 비로소 제 실력을 발휘하니, 다른 학교의 고학년생들에게도 맞서볼 만해진 거다.
1학년, 은우와 서준에게 그럴 실력이 있던 덕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야, 이 녀석들! 잘했다!”
“무승부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굿굿!”
“너희도 할 수 있어! 긴장 풀고 이대로만 가자! 알겠지?”
““네! 선배님!””
예상치 못했던 1학년들의 약진에 3학년 트리오가 놀란 얼굴로 칭찬을 쏟아냈다.
성현의 말마따나 그저 경험이나 쌓기를 바랐던 애들이 前 빅4 금제고의 주전들을 상대로 언뜻 대등하게 싸워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뭐, 그래서 고른 거였으니까.’
반면, 성현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앞서 예상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미래만을 보고 출전 선수 명단에 집어넣었을 리가 없잖은가.
충분히 재능이 있는 유망주의 실전 경험을 키워주고 싶다면 춘계 전국 대회 같은 큰 대회보다 자잘한 학생 대회를 경험하는 게 더 낫다.
실제로 수민도 상단세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지냈으니까.
그 당시에는 정철을 비롯한 졸업생들이 주전 자리를 꽉 잡고 있었으니 이야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여하튼 간에.
성현이 1학년들을 선수 명단에 포함 시킨 건 단순히 키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의도가 있다는 걸 아예 부정할 생각은 없다.
실제로도 그는 32강에서 1학년들이 좌절했을 때 직접 그들에게 이번 대회를 양분으로 삼아 성장하라고 말했었으니.
다만, 그걸 제외하고도 1학년들은 충분히 춘계 전국 대회의 주전으로 나설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중학교에서 가장 강했던 유망주들이란 타이틀은 폼이 아니다.
성현이 판단하건대, 은우와 서준은 믿고 맡긴다면 제구실을 해낼 이들이었다.
그래서 명단에 넣은 것이고 말이다.
“광천고는 역시 광천고네.”
“호군고랑 금제고도 꽤 강했는데···.”
“누가 이번 대회가 광천고가 약해진 틈을 타 쓰러뜨릴 유일한 기회라고 했었지?”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
“뭔데.”
“진짜로 저게 약해졌다는 거야.”
“······허. 작년의 광천고는 대체······.”
이제 관객들은 더는 광천고를 쓰러뜨릴 기회니 뭐니 하는 말들을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빅4라는 이름으로 한국 고교 검도계를 꽉 쥐고 있던 강자들이 광천고에게 연달아 패퇴했다.
딱히 그들이 약해진 것도 아니다.
호군고야 광천고만 만나서 객관적으로 보여준 게 적다지만, 금제고는 32강 상대를 아예 박살 내면서 올라왔으니 말이다.
용암고와 경중고가 과연 이렇게 강한 광천고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대회 시작 전부터 있던 설레발에 대한 답이 이미 드러났으니.
“8강 상대는 누구야?”
“어디보자···. 청원고?”
그런 걸 알 리가 없는 광천고 주전들은 다음으로 만날 상대를 확인하고 있었다.
8강에서 만날 상대 쪽 대진표에서는 이렇다 할 강호가 없었기에, 어떤 고등학교 검도부가 올라올지 예측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前 빅4가 아니고서야 누가 올라올지를 맞히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춘계 전국 대회 8강전.
광천고 vs 청원고
“청원고? 청원고···. 으음- 어째 기억나는 게 없는데. 너희는 어때.”
상대를 확인한 대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지난 삼 년간 대진표를 자주 들여다 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도 딱히 없는데.”
“나도.”
“저도 없어요.”
영준과 윤호, 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인즉, 최소한 작년 한 해 동안은 큰 대회에 한 번도 참가한 적 없는 검도부라는 뜻이었다.
“다 못 들어본 걸 보면 신생 검도부일지도?”
“새로 생긴 곳이 전국 대회 8강까지 왔다는 건 또 놀라운데···.”
“대진표빨일 수도 있지.”
청원고의 32강, 16강 경기 결과들을 확인한 대현이 눈을 크게 떴다.
제법 놀라운 기록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32강 5승 2무 승리, 16강 6승 1무 승리?”
단 1패도 없는 완승 기록들이었다.
그야말로 상대를 압살했다는 뜻!
게다가 그중에는 배전공고처럼 꽤 강하다 일컬어지는 학교도 있었다.
성현에게는 주장이 반칙이나 쓰는 불쾌한 놈으로 기억되었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배전공고의 전력은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뛰어났다.
아니었다면 회장기 검도 대회 16강까지 진출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청원고는 그런 배전공고에게 5승 2무로 완승했다.
어지간히 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 뭐야?”
대현의 당황에 다른 주전들도 다가와 경기 결과를 확인했고, 곧 눈을 크게 떴다.
그들로서도 놀라운 결과였으니까.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검도부가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올라온 것은.
“청원고···. 청원고? 아, 혹시 거긴가?”
문득 들려온 혼잣말.
광천고 주전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서준은 갑자기 모여든 시선에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대현이 물었다.
“청원고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어?”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데, 작년에 저희한테 입학 권유했던 고등학교였어요. 내년을 목표로 대대적으로 투자 중인데 올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요.”
“대대적인 투자라···.”
“운동부가 투자한다고 성적이 나오나?”
영준이 아리송한 얼굴로 말했다.
예체능 계열은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돈을 안 쓸 때보다야 좋을 테지만, 그래도 성적을 노리고 투자를 하는 건 애매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쟤네는 나왔잖아. 전국 대회 8강까지 올라왔으니 할 말 없지.”
“음, 그것도 그렇네.”
어쨌든, 청원고는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것도 학생 대회 중 최고봉인 춘계 전국 대회에서, 8강까지 만난 상대를 전부 압살하면서.
투자한 만큼의 성과는 충분히 보인다는 뜻이다.
“뭐, 상대가 어떤 곳이든 간에 저희가 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죠.”
성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과연 성현의 말대로였다.
청원고가 8강까지 올라오는 데 어떤 사연이 있고,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광천고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으니.
“그래, 이기면 그만이니까.”
“8강까지 왔으면 많이 왔다. 이제 보내줄 때야.”
“첫 출전에 그 위까지 노리는 건 욕심이지.”
3학년 트리오가 히죽 웃었다.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수민이나 은우, 서준도 비슷한 감상인 듯했다.
그들의 표정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성현이 입꼬리를 쓱 끌어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 가죠.”
*
“그래서, 남자친구 응원은 잘했어?”
갑작스러운 선배의 말에 수연이 반사적으로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자신을 보고 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그러했다.
그도 그럴 게, 최근 광천고 여자 검도부에서 ‘남자친구’ 관련 이야기는 모두 선배들이 그녀를 놀려먹는 빌드업으로 써먹은 까닭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급선회하여 그녀를 놀리곤 했으니, 저도 모르게 반응한 건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응? 말 좀 해봐, 하은아. 슬쩍 빠져나가서 남자친구 응원은 잘했어?”
“경기 전에 통화라니~ 너무 좋겠다~”
“시끄러워-”
다행스러운 건 이번 놀림 대상이 수연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준과 커플이 된 이하은을 향해 다른 여자 검도부 주전들의 엉큼한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녀가 광천고와 청원고의 경기가 시작하기 전, 자리를 비운 걸 귀신같이 알아차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행이다···.’
수연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통 경기 전에는 통화보다 톡을 주고받는 편이기에 굳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던 게 좋았다.
아니었다면 그녀도 지금 이하은처럼 짓궂은 장난의 대상이 되어 있었을 테니.
하지만 그녀의 안도는 꽤 섣부른 것이었다.
“요 계집애가 자기는 아닌 척 하는 거 봐!”
“그러게. 톡하는 거 다 봤는데!”
“하은이야 이번이 처음이라지만, 수연이 너는 매번 대회 때마다 그랬잖아.”
이하은을 놀리고 있던 선배들이 순식간에 타겟을 수연으로 변경한 거다.
그녀를 향한 놀림의 집중포화가 쏟아졌다.
역시나 이번 남자친구 이야기 또한 수연을 놀리는 빌드업이었던 거다.
“맞아! 따지고 보면 수연이가 더 닭살이지!”
심지어 앞서 놀림의 대상이었던 이하은마저 끼어들어 한 마디를 던져왔을 정도!
‘선배가 어떻게 절-!’라고 배신감에 물든 시선을 던지는 수연에게 이하은이 ‘미안, 나도 살아야지.’라는 뜻을 담은 눈빛을 되돌려주었다.
커플이라는 공통점─엄밀히 말해 수연은 아직 아니긴 했지만, 여하튼─ 때문일까.
두 사람은 시선만으로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이번 상대인 청원고에 대해서 들으셨어요? 이번 대회 다크호스라던데!”
쉴 새 없이 놀림당하던 수연이 돌연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말을 꺼냈다.
필사적인 화제 돌리기였다.
그러나 속된 말로 ‘타격감’이 가장 찰진 수연을 선배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얘는. 그게 지금 중요해?”
“성현이랑 저번 주말에도 만났다면서!”
“거의 매주 주말에 만나서 데이트 하는 거네.”
“으으-”
슬금슬금 다가와서 주위를 포위한 채 질문을 쏟아내는 선배들에게 움츠러드는 수연.
그런 그녀를 구해준 건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환호성이었다.
8강전을 치를 두 학교, 광천고와 청원고 주전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고, 관객들이 그에 환호성을 내지른 것이다.
잽싸게 그걸 눈치챈 수연이 말했다.
“서, 선배님들! 곧 경기 시작할 거 같아요!”
“남자친구가 구해주러 왔네~”
“타이밍 봐. 이것도 혹시 문자로···?”
선배들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더 놀려먹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경기가 곧 시작하는 상황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으니까.
겨우 악의 손길에서 벗어난 수연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경기장을 보았다.
“인사!”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막 경기장에 나온 두 학교 검도부들은 중앙에 도열한 뒤, 서로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단숨에 그중에서 성현을 찾아낸 수연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그녀가 이렇듯 성현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에 더욱 선배들이 놀린다는 걸, 여자 검도부 중에서 수연 혼자만 몰랐다.
만약 알았다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짝짝짝짝!
““광천고 파이팅-!””
“청원고 이겨라!”
그렇게 쏟아지는 박수와 응원 속에서 ‘고교 최강’ 광천고와 ‘다크호스’ 청원고의 8강이 시작되었다.
다크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