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31화 (131/150)

131화: 이기면 그만

선취점 이후, 두 번째 판은 일방적이었다.

먼저 점수를 얻은 수민이 시종일관 주도권을 갖고 상대를 몰아붙였다는 뜻이다.

이를 견디다 못한 신철우가 억지로 기회를 잡아 밀고 나왔지만, 그게 그의 패착이었다.

성현이 직접 일깨워준 수민의 ‘눈’에는 무리한 타돌로 인해 드러난 약점이 훤히 보였고, 이를 놓칠 수민이 아니었기에.

수민은 기다렸다는 듯 ‘벌려 걷기’로 격자를 피해낸 뒤, 자연스레 손목을 노려 죽도를 휘둘렀다.

그것으로 선봉 순서의 시합은 끝났다.

실로 깔끔한 결과였다.

前 빅4 호군고의 선봉, 신철우를 상대로 완승.

심지어 상대는 한 학년 높은 3학년이기까지 하다.

이 정도면 의문 부호가 붙었던 수민의 실력을 확실하게 증명했다고 봐도 충분하리라.

그건 관객들의 반응만 봐도 확실했다.

““와아아아아-!””

“광천고 진짜 장난 아닌데!”

“김수민-! 이름 기억했다-! 잘 하네!”

“최고다, 김수민-!”

수민은 관객들의 환호성에 손을 흔들며 광천고 주전들에게로 돌아왔다.

시합 때와는 달리 적잖게 들뜬 얼굴이었다.

누가 그를 무표정하게 성현의 말만을 되뇌던 광신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제엔장, 믿고 있었다고-!”

“수고했다, 수민아!”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당당히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수민을 향해 광천고 주전들의 축하 세례가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게, 이번 시합은 선봉 순서의 시합이란 걸 제외하고도 수민에게 있어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기 때문이다.

첫 전국 대회 출전과 처음으로 기록된 승리!

수민이 비로소 규모가 큰 대회에서 광천고 주전으로 활약한 것이었으니.

“잘 했어. 제대로 보여줬네”

“응!”

성현의 칭찬에 수민이 빙긋 웃었다.

정말이지, 만족스러움이 가득한 미소였다.

시합에서도 이기고, 동경의 대상인 성현에게도 잘 했다 인정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수민에게 있어 지금 그를 향한 관객들의 모든 환성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 성현이 가볍게 던진 칭찬 한마디였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천고의 좋은 분위기는 거기까지였다.

2위와 3위로 나선 은우와 서준이 호군고 주전들에게 연달아 패배한 탓이다.

어떻게든 광천고를 잡아내고자 하는 의지로 불타는 호군고는 2위 순서에 3학년을, 3위에는 2학년을 기용했고, 이것이 제대로 먹혀든 까닭에 벌어진 일이었다.

성인이라면 모를까,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 않은 고등학교 시절에 한 살, 혹은 두 살이 더 많다는 건 엄청난 격차.

아직 1학년인 은우와 서준이 패배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무승부라도 했어야 했는데-”

연패라는 결과 앞에 고개를 떨군 은우와 서준.

중학교 최강 듀오였던 만큼 자신만만했지만, 역시 고등학교의 벽은 높았다.

승룡기 검도 대회에 이어 춘계 전국 대회에서까지 이렇게 별 활약을 못 할 줄이야.

“괜찮아.”

두 사람에게 다가선 성현이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아직 시합은 안 끝났으니까.”

1학년 두 명이 연달아 졌다고 해도 겨우 2패.

뒤에 나올 3학년 트리오와 성현까지 네 명 중에 두 명이 더 져야만 광천고의 패배다.

아직 승부는 한참 남았다는 이야기다.

잘못을 자책하며 고개를 숙이기에는 너무 일렀다.

성현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너희가 할 건 자책하는 게 아니라, 지금 경기를 되짚어보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거야.”

“선배님···.”

“설마 나랑 선배님들이 져서 광천고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웃음기 섞인 성현의 질문에 은우와 서준이 고개를 강하게 휙휙 내저었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이.

하긴, 누가 이런 상황에 긍정할 수 있겠냐마는.

“이번 시합, 그리고 다음 시합. 아니─ 이번 대회까지 전부. 너희가 성장하는 데 밑거름으로 삼아. 그게 지금 너희에게 바라는 전부니까.”

““네! 선배님!””

은우와 서준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춘계 전국 대회 전부를 자신들을 키우는 경험으로 삼으라는 성현의 말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가능성을 대단히 크게 봤다는 뜻이므로.

······나쁘게 말하면 지금 당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 했으니.

“참, 선배님들 응원도 열심히 하고.”

““네! 선배님!””

“선배님들. 설마 1학년들이 이렇게 응원하는 데 실망하게 하지는 않으시겠죠?”

성현이 묻자, 3학년 트리오가 피식 웃었다.

1승 2패의 상황임에도 적잖게 여유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믿음이 있다는 뜻이리라.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하기야, 호군고는 광천고가 성현의 힘없이 쓰러뜨린 유일한 빅4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건 작년 회장기 검도 대회 때의 일이지만, 3학년 트리오에게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건 그들이 가진 자신감의 근거가 되었다.

“당연한 말을 해.”

“걱정하지 말고 딱 기다려.”

윤호와 대현은 물론이고, 중견으로 다음 시합에 나서야 하는 영준 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1학년들의 눈빛이 더욱 깊은 존경심으로 가득 찬 건 물론이었다.

이어진 중견 순서 시합.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늘었네.’

상대와 마주한 영준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나오기 전에 저토록 당당하게 말한 이상, 패배라는 두 글자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야 했다.

1학년들 앞에서 당당한 선배로 있기 위해서라도.

물론 만에 하나라도 그가 진다고 한들 1학년들이 뭐라 말하지는 않겠지만,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들의 얼굴을 보겠는가.

속된 말로 ‘쪽 팔려서’ 얼굴을 들기 힘드리라.

‘설마 성현이가 그걸 노린 건가?’

문득 든 생각에 영준이 눈을 끔뻑거렸다.

어쩐지 굉장히 설득력 있는 생각이었기에.

1학년들의 기운도 북돋아 주고, 3학년들에게 기합도 넣었으니 실로 일거양득이라 할 만했으니.

만약 그렇다면 성현에게는 은근히 음흉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곧 영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후우우···.”

‘뭐, 좋아. 이기면 그만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기면 장땡.

1학년들을 보기에 부끄러울 일도 없다.

게다가 그걸 제외하고도 이길 이유는 넘쳤다.

개중 가장 큰 건 올해로 3학년이라는 것.

내년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 혹은 실업 검도 쪽으로 나아가야 할 테니, 올해는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줘야 했다.

몸값을 더 올려둬야 향후가 훨씬 편해질 테니.

‘빡세게 가자!’

그러한 각오 덕분일까?

영준은 수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호군고의 중견, 강지운을 상대로 깔끔하게 압승을 거두었다.

그로써 광천고와 호군고의 경기는 2대 2 동점.

호군고를 향해 기울어졌던 저울이 평행해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고, 유리함을 거머쥔 쪽은 광천고였다.

왜냐하면, 남은 순서는 이제 셋 뿐이었으니까.

주장 순서에는 공식전 무패, 세계최강의 유망주 성현이 나오는 만큼 호군고가 이길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다.

그럼 남은 건 5위와 부장인데, 2대2로 동점이니 두 번 중에서 한 번이라도 비기거나 지게 되면 주장 순서까지 연결되어 버린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끝이다.

주장전에 이은 대표전까지 괴물이 나와 제멋대로 날뛸 테고, 호군고는 그걸 감당할 힘이 없으니.

광천고가 유리하다는 건 바로 그래서였다.

괴물을 피하려면 호군고는 무조건 두 번을 연달아 승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게 쉬울 리가 없다.

3학년 트리오는 허수아비가 아니니.

“2위, 3위가 졌을 때는 어떻게 되나 했는데···.”

“1학년들 넣고도 이길 수 있다는 거지.”

“올해 광천고 약해진 거 맞아? 1학년들 빼고는 공략할 구석이 안 보이는데?”

“작년에는 그것도 없었어.”

“미친. 진짜 말도 안 되는 팀이었네.”

5위 순서, 손대현의 2대1 승리.

이어서 부장 순서, 조윤호의 1대0 승리!

1학년들의 연패를 거뜬히 메꾸는 3학년 트리오의 3연승에 관객들은 환호했다.

괜히 작년 고교 최강의 타이틀을 지키고 있던 게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 같은 압도적인 경기력이었으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설마하니 주장 순서까지 이어지지도 않았는데 결판이 날 줄은 몰랐다는 이들도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작년까지 빅4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호군고이니만큼, 못해도 주장 순서, 나아가서는 대표 순서까지는 이어질 거라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런 이들에게는 작년 회장기 검도 대회를 봤던 이들의 친절한 설명이 뒤따랐다.

“그래도 1학년 앞에서 쪽팔리지는 않았네.”

“그러게. 다행이다.”

“나, 솔직히 동점 됐을 때 엄청 쫄았다.”

“뒤에서 보는데 엄청 필사적이어서 웃겼어.”

“다 이겼는데 나만 지면 어떻게 하냐고~”

“이겼으니 됐지, 뭐.”

······1학년들 앞에서 체면치레는 한 3학년 트리오야 어찌 되었든.

‘이제 내 차례인가.’

성현은 차분하게 경기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비록 광천고가 4승을 먼저 거둠으로써 시합의 결과는 나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시합은 주장 순서까지 진행되는 까닭이다.

대저 검도 시합이 원래 그러했다.

결과와는 관계 없이 끝까지 경기를 치렀다.

이기고 지는 것 이상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걸 더 중요시 여기기에.

검도는 단순한 ‘스포츠(Sports)’가 아니라, ‘무도(武道)’이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

성현이 경기장에 발을 내딛자, 이전까지 보다도 더 압도적인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성현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걸음을 옮겼으니까.

호군고의 새로운 주장, 이원형은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성현의 얼굴 쏘아 보았다.

성현은 담담하게 그 눈빛을 받아들였다.

‘이원형이라.’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그럭저럭 실력 있는 선수였던 걸로.

뚜렷하게 무언가 떠오르는 건 없지만, 사실 성현의 기억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선수로서는 일류라는 뜻이었다.

오십 년 간 검도를 하며 수많은 선수를 만났던 성현이다.

직접 겨룬 이들만 몇만 명이 넘고, 얼굴만 보고 넘어간 이들은 그것의 열 배가 넘는다.

그러니 기억에 남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선수일 수밖에.

간단히 말해서.

‘키울 보람이 있다는 거지.’

성현에게는 충분히 ‘새싹 밟기’를 할만한 대상이라는 뜻이었다.

강한 이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심지어 이원형은 그와 같은 2학년이다.

올해는 물론이요, 내년까지 광천고와 호군고의 단체전 때마다 붙게 된다는 뜻이고, 그런 상대가 강해진다면 나쁠 건 없었다.

찰나에 생각을 정리한 성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이 이원형에게는 영 불쾌한 듯했다.

안 그래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던 눈빛이 이제는 물리력을 가진 것처럼 피부를 따끔하게 찔러오고 있는 걸 보면.

지금의 이원형은 마치 자신의 앞에 있는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투견 같아 보였다.

“시작!”

“우오오오-!”

이윽고, 주심으로부터 내뱉어지는 시작 구령.

볼 것 없다는 듯 이원형이 바닥을 박찼다.

그는 마치 늑대의 하울링과 같은 외침과 함께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한순간에 좁혀진 거리!

무심코 감탄이 나올 만큼 빠른 몸놀림이었다.

‘작년보다 훨씬 더 발전했네.’

호군고의 전 주장이었던 김정현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물론 그렇다 해서 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달려드는 이원형을 응시하는 성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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