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30화 (130/150)

130화: 신이나 마찬가지

*

검도 대회에서 대진표를 짜는 방식은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소규모일 경우에는 당일 선수들이 모여서 정하고, 비교적 규모가 큰 대회일 때는 전날 미리 모여서 추첨하여 짜는 식이다.

춘계 전국 대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회 전날 감독들끼리 모여─아무래도 선수들은 학업에 열중해야 하기에 불참이었다─ 따로 추첨하고, 그대로 대진표를 짜서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진표는 대회 전날 오후 즈음에 각 검도부에 정식으로 알려지게 된다.

보통은 그 전에 감독에 의해 알게 되긴 하지만, 그 정도 오차 정도야 딱히 큰 차이도 아니었으니.

여하튼, 중요한 건 그거다.

춘계 전국 대회 전날에 이미 대진표가 나왔으며, 광천고 주전들 모두 그걸 봤고, 자신들의 32강 상대가 호군고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심지어 그다음 16강 상대는 호군고와 마찬가지로 전 빅4였던 금제고였다─어디까지나 금제고가 이기고 올라왔을 때의 이야기다─.

불행 중 다행으로 8강은 어느 고등학교가 이기고 올라와도 딱히 강한 적은 없었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4강 상대는 용암고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거기서도 이기고 올라간다면······ 아마도 경중고가 결승전 상대가 되리라.

강팀이란 강팀은 전부 마주치는, 그야말로 지옥의 대진표였다.

“미안하구나···.”

김만석 감독이 몇 번째인지 모를 사과를 건넨 건 그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꿀 대진을 가져간 경중고와는 달리, 광천고의 대진은 역경과 고난으로 가득했으니까.

안 그래도 전력이 작년보다 약해졌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와중에 이처럼 꽃길은커녕 불꽃길을 걷게 만들었으니 감독으로서 미안할 수밖에.

“괜찮습니다. 대진표야 뭐, 어렵게 잡힐 수도 있는 거니까요.”

성현이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딱히 만석을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만석이 억지로 대진표를 어렵게 잡아 온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요.”

성현은 빙긋 웃었다.

“어려운 대진표를 뚫고 올라가 우승할 때, 사람들은 새로운 광천고가 고교 최강의 검도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허어-”

“대진표대로 빅4를 다 꺾고 우승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태평하기까지 한 성현의 말에 만석이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레 우승을 입에 담고 있었기에.

자신과는 생각하는 관점 자체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달은 거다.

“맞는 말이야.”

뒤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3학년 트리오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이대로면 최소한 빈집털이 소리는 안 듣겠네. 차라리 잘 됐다. 안 그래?”

“약한 애들만 이겨봐야 기쁘지도 않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감독님. 저희만 믿고 기다려주세요. 다 이기고 올라가겠습니다.”

“너희들······.”

만석이 감동한 얼굴로 3학년들을 바라보았다.

어려운 대진표를 가져온 자신을 원망할 법도 한데, 대현을 비롯한 주전들에게서 그런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감독으로서 할 일을 제대로 못 하고 부족한 자신이건만.

‘검도부를 맡길 잘했어···!’

물론, 그건 만석의 생각일 뿐이다.

올해로 검도부 활동이 삼 년 차에 접어드는 3학년 트리오는 전 감독과 현 감독인 만석을 모두 겪은 이들이다.

만석이 작년에 검도의 ㄱ자도 모르는 상황에서 떠넘겨진 감독직을 어떻게든 수행하려 했던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검도 관련 서적을 구해 읽는 것은 물론, 여자 검도부 감독인 서유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을 청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을 정도!

그런 이가 대진표 좀 나쁘게 가져왔다고 기분 나빠할 3학년들이 아니다.

‘뭐, 조금 빡세긴 하지만.’

‘우승하려면 어차피 다 제껴야 했으니.’

화기애애한 만석과 3학년 트리오를 웃으며 지켜보던 성현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건 수민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쭉 선봉을 맡게 된 수민은 첫 번째 순서인 만큼, 호구를 모두 착용한 채 시합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민아.”

“응!”

부름에 잽싸게 대답하는 수민.

어딘지 강아지 같은 모습에 성현은 피식 웃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이번 춘계 전국 대회 동안 광천고의 선봉은 계속 너야.”

승룡기 검도 대회 때처럼 바꿀 생각은 없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설령 몇 번을 패배하더라도 말이다.

선봉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수민에 대한 강한 믿음이 없어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안에 담긴 믿음을 헤아린 수민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응!”

“난 너라면 해낼 수 있다고 믿어.”

성현은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게 아니라, 해낼 수 있으리라고 단언했다.

‘전’의 관장 생활 동안 수많은 제자를 키워내 본바, 수민 같은 성향의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는 까닭이었다.

수민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대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여 그것을 채우는 타입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스스로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믿을 때보다, 남이 할 수 있다고 말해줄 때 더 힘을 낼 수 있는 타입이랄까.

이런 타입의 사람을 다루는 방식은 지극히 간단했다.

지금의 성현처럼 믿음을 보여주는 것.

‘할 수 있겠어?’라고 묻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다!’라고 단언해버리면, 그를 부응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쥐어짜 내니까.

“가서 제대로 보여주고 와.”

“알았어!”

힘차게 대답한 수민이 경기장으로 나아갔다.

광천고의 선봉, 수민과 호군고의 선봉, 신철우 두 사람이 경기장에 들어서자, 관객들의 이목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분명히 경기장을 넷으로 나눠, 다른 시합들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천고 대 호군고의 시합이 벌어지는 쪽으로 시선이 몰려 있는 게 보일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이러한 관심은 비단, 이 시합이 현 고교 최강의 검도부인 광천고와 그 자리를 노리고 있는 호군고의 경기이기 때문에 생긴 건 아니었다.

물론 그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도 맞는 말이나, 거기에 더해 수민에 관한 호기심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당장 관객들의 웅성거림만 봐도 그건 분명했다.

“야, 저기 봐! 김수민 나왔다!”

“‘하위호환 이성현’!”

“이번에도 상단세 쓰려나?”

현재 수민은 검도 팬들과 업계인들 사이에서 여러모로 의견이 분분한 선수였다.

착실하게 강하지만 이렇다 할 개성이 없는 평범한 검도를 하던 그가 승룡기 검도 대회 때 처음으로 상단세를 사용하더니 깜짝 놀랄 만큼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일본 고교 선수를 상대로 무려 3연승!

심지어 널리고 널린 일반 고교도 아니고, 인터하이와 옥룡기에서 크게 활약한 호쿠토 고교의 선수들을 상대로 거둔 3연승이다.

선봉과 중견 같은 강자들마저 쓰러뜨렸다는 뜻이니, 쉽사리 볼 수 없는 위업임은 분명했다.

문제는 그 뒤 32강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을 뿐만 아니라, 출전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차후에는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64강 때 같은 임팩트 있는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고.

아무리 3연승의 여파라고는 해도 꽤 극심한 격차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호쿠토 고교를 상대로 한 3연승이 단순한 럭키 펀치였을 가능성도 은근히 나오고 있었으니···.

사용자가 적어 대처하기가 힘든 상단세라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기도 했고 말이다.

이번 경기에 이목이 집중된 건 그래서였다.

광천고의 선봉, 김수민의 진정한 강함을 확인하기 위해서.

“······.”

“······.”

인사를 마친 뒤.

시합 개시 신호만을 기다리는 때.

수민은 더할 나위 없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몸이 가벼워.’

어찌나 가벼운지, 들고 있는 죽도마저 과장 좀 섞자면 나무젓가락처럼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분명 호면을 쓰고 있음에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시야가 환했다.

전체적인 윤곽은 물론, 죽도를 쥔 팔 근육의 결, 호완 속에 굳어져 있는 손가락마저도 보이는 듯할 지경이었다.그러한 감각의 날카로움은 단지 시각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오감 전부를 아울렀다.

보는 것.

듣는 것.

느껴지는 것.

그 모든 게 세세하게 구분되는 느낌이랄까.

지금이라면 이전까지 막아내지 못했던 성현의 격자마저 막을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생길 정도였다.

‘최고의 컨디션이네.’

그리 길지 않은 수민의 검도 인생을 통틀어 몇 번 존재하지 않았을, 그런 몸 상태.

‘진다는 생각이 요만큼도 들지 않을 만큼.’

아마 성현은 이를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니 시합이 시작하기 전에 그토록 자신감 넘치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일 터.

수민은 새삼 성현의 대단함을 느꼈다.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몸 상태를 간파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에게 있어, 성현은 검도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신(神)이나 마찬가지였다.

‘······성현이가 할 수 있다고 했지.’

시합 시작 전, 성현에게 들은 말을 떠올린 수민의 눈동자가 잿가루처럼 흐리게 가라앉았다.

승룡기 검도 대회 때 보여줬던 모습처럼.

맹목적인 믿음이 눈을 가리기라도 한 듯이.

어떤 의미로 그건 맞는 말이었다.

수민에게 있어 성현의 말은 빛이요, 진리니.

‘그럼, 나는 할 수 있어.’

한순간에 달라진 분위기.

시합에 들뜬 소년, 김수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한 명의 광신도였다.

절대 꺾이지 않을 믿음으로 무장한.

심상치 않은 기세가 수민으로부터 뿜어져 나오자, 상대로 나온 호군고의 선봉, 신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시작!”

주심이 시작 구령을 외친 건 바로 그 때였다.

그것을 신호로 삼아 수민은 발을 내디뎠다.

소름이 끼칠 만큼 무정한 표정으로.

단 한 걸음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수민과 신철우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 듯했다.

수민에게서 뻗어 나오는 기세가 강대한 탓에 단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바로 앞까지 치고 들어간 듯했기 때문이리라.

그 압박을 떨쳐내려는 것일까.

“으아아앗-!”

신철우는 기부림을 내지르며 마주 달려들었다.

상단세에 선공을 양보하는 행위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만큼, 망설임 없는 행동이었다.

괜히 호군고의 선봉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듯한 빠르고 맹렬한 타돌!

이제 수민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철우의 타돌에 맞서지 않고 적당히 물러서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면에서 맞붙어서 부숴버리는 것!’

찰나의 순간, 수민은 선택했다.

두 번째 선택지─ 신철우에게 정면에서 맞붙어서 부숴버리는 것을.

만약 그의 몸 상태가 지금처럼 끝내주지 않았다면 다른 선택도 고려해보았을 테지만, 지금 그에게는 의미가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신철우가 마치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피해야 한단 말인가?

“우오오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기부림.

비교적 가는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묵직한 외침이다.

그러나 그래 봐야 상단세에서 내리꽂히는 것처럼 휘둘러지는 죽도에는 감히 비할 수 없으니.

흉포한 힘을 담은 죽도가 신철우를 노렸다.

‘이, 자식!’

예상치 못했던 상대의 사나운 반격에 신철우의 몸이 아주 짧은 순간 굳어졌다.

그것이, 승패를 갈랐다.

후웅-! 타아악-!

타악-

두 개의 소리가 교차했고.

곧, 주심이 하나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다른 두 사람의 심판들 또한.

그리고 그 세 명의 심판이 들어 올린 깃발의 색은 모두 같았다.

하얀색.

광천고를 뜻하는 색깔···!

“백색! 머리-!”

““와아아아-!””

이기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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