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기대
“솔직히 말해서.”
깨끗하게 정돈된 방 안.
컴퓨터 앞에 앉은 남성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승룡기를 안 본 검도팬은 인생 절반 손해 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뭔 대회를 인절손까지ㅋㅋ
-17연승 못 봤으면 인절손 킹정인 거 모름?ㅋㅋ
-검도팬이면 무적권 봐야 하긴 함
우수수 올라오는 채팅들을 보며 남자, 아이튜버 하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치 ‘대체 왜 내 말을 믿어주지를 않는 거지?’라고 말하는 듯한 한숨이었고, 실제로도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게 맞았다.
인생 절반 손해라는 말은 살짝 과장이 들어있긴 했어도 순도 백 퍼센트 진심이었으니까.
“아니, 진짜로. 농담 아니고.”
-나 못 봤는데 그 정도였음?
-시작부터 끝까지 버릴 게 없긴 했지!
-못 본 사람들은 빨리 검라 가서 경기랑 다승왕 인터뷰 보고 오셈ㅋㅋ
-걍 고딩들 대회 하나로 너무 난리 아닌가···.
“승룡기는 그냥 고등학생 대회가 아니에요. 한국이랑 일본이 유망주들 전부 까고 붙은 대회죠. 간단히 말해서, 미래에 누가 더 셀지 미리 겨뤄본 거나 다름없어요.”
승룡기 검도 대회는 겉으로는 한국과 일본 양국이 손을 잡고 개최한 친목 대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
‘다음 세대’의 고등학교 유망주들끼리 대놓고 맞붙어 누가 더 강한가를 겨룬 것이나 다름없으며, 거기서 이겼다는 건 향후 이십 년을 우위에 설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대회로 인해 일본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있는 현 세계 검도의 판도가 뒤바뀔지도 모른다! 라고.
하온은 진지한 어조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 경기 기록 보면 그렇지는 않던데
-걍 갓성현이 갓갓했다 아님?
-솔까말 광천고도 갓성현 빼고는 다 져서 답도 없었자늠
-아ㅋㅋ 하온이 또 낚시하려드네ㅋㅋ
-검라에 이런 내용 쓰면 욕 먹는다 ㅇㅈ?
그러나 하온의 방송을 보고 있던 이들은 그런 그의 해석을 믿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이성현을 포함한 한국 유망주들이 잘해봐야 결국 고등학생 수준에서 이야기일 뿐.
차차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 유망주들이 앞서나가서 전과 똑같은 결과만 남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하기야, 지난 몇십 년간 일본이 세계 최강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으니, 이번에도 똑같을 거라는 그들의 생각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아주 적긴 해도 믿는 이들도 있긴 했다.
그저 그 수가 너무 적어서 제대로 티가 나지 않았을 따름.
채팅창 반응을 보며 무어라 말하려던 하온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더 뭐라 말한들 안 믿겠지.’
어차피 말한 게 증명되기 위해서는 족히 십 년은 지나야 할 터.
그때까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면서 시청자들이랑 싸우느니, 결과가 나온 뒤에 자신이 했던 말을 재조명받는 게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아마 그때가 되면 시청자들은 언제 믿지 않았냐는 것처럼 태도를 바꿔 하온을 찬양할 것이다.
그들이 늘 그랬듯이 말이다.
“뭐, 좋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는 걸로 하고, 다른 이야기 좀 해볼까요.”
-ㅇㅋㅇㅋ
-무슨 이야기 하게?
-지금 할만한 이야기면 하나밖에 없지
-ㄹㅇㅋㅋ 바로 전국 대회자너~
“맞아요. 춘계 전국 대회. 이제 2주 남았죠?”
춘계 전국 대회가 열리는 건 4월 20일.
하온의 말마따나 지금으로부터 2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승룡기 검도 대회가 열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전국 대회인가 싶었지만, 애초부터 두 대회의 간격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기간이 짧아 좋은 점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승룡기 검도 대회의 흥행이 바로 뒤에 이어지는 춘계 전국 대회로 주목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화제가 뜨거울 때 이루어지는 대회이니만큼 자연스레 그리될 수밖에.
“전 이번 전국 대회에 매우 큰 기대를 하고 있어요. 왜냐구요? 3학년들이 졸업하고 난 뒤 첫 전국 대회니까요! 아마 한국 고교 검도계에 다시 엄청난 지각 변동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뜬금없이 뭔 엄청난 지각 변동?
-응~ 아냐~ 어차피 광천고가 다 이기고 끝이야~
-ㄴㄴ 이건 하온 말이 맞음
-승룡기에서 봤자늠. 광천고 다른 주전들 실력 어떤지. 걔네로는 춘계 전국 대회 우승 못 함
시청자의 채팅이 거칠긴 했지만, 내용만큼은 하온이 생각하던 것과 일치했다.
이번 승룡기 검도 대회에서 광천고를 우승까지 끌어올린 건 어디까지나 이성현의 대활약이었다.
17연승이라는, 사실상 대회를 홀로 끝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성적을 거둔 덕에 우승 트로피를 든 것이고,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기껏해야 16강 정도에서 떨어졌으리라.
아니면 잘 해봐야 8강 정도?
그게 성현이라는 괴물의 존재를 제외한 광천고의 ‘현 위치’였다.
경중고보다, 어쩌면 용암고보다 아래.
단연코 정점이었던 작년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다.
“3학년들이 졸업한 지금, 광천고는 무척 약해졌어요. 다행히 뒤를 이을 사람들을 확실히 구해놔서 세대교체는 성공적이라 할만하지만··· 지금 당장 전력은 크게 떨어진 건 부정할 수 없거든요.”
무조건적인 1승을 장담하던 정철.
능숙한 경기 운영으로 팀을 도운 장현성.
또 다른 에이스라 할 수 있는 김경진.
세 사람의 빈자리를 당장에 채우지 못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워낙에 실력이 뛰어났으니까.
다른 두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전 주장인 정철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백성호라도 데려다 놔야 할 판이니 말이다.
그나마 성현의 하위호환이라 불리는 김수민과 유망한 1학년들을 발굴해 그럭저럭 세대교체에는 성공했지만, 하온의 말처럼 많이 약해진 상태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이번 승룡기 검도 대회에서 성현에게 과도한 부담이 주어진 건 그 때문이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만약 3학년 트리오가 있었다면 광천고의 우승은 지금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졌으리라는 것도.
“다른 고등학교들도 그걸 알고 있을 거고, 이번 대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새로 광천고 주전으로 들어온 이들이 경험과 실력을 쌓으면 광천고는 다시 강해질 테니까요. 그전에 한 번 흐름을 꺾어두고 싶겠죠.”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또 한 번의 ‘광천고 전성시대’만큼은 피하고 싶으리라.
시상대 위에 오직 광천고 검도부만이 오른다는 굴욕적인 사태는 작년의 대회들로도 충분했다.
올해까지 그랬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광천고가 약해진 상황에서 집중포화를 이겨내고 다시 정점에 서느냐. 아니면 벼르던 이들이 나서서 끝내 고교 최강의 타이틀을 빼앗아 오는 데 성공하느냐······.”
어느 쪽이든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광천고가 이기지 않을까
-연승전 아닌 이상 갓성현 원맨쇼는 불가능함
-1승은 무조건 보장해주지만, 단체전에서 필요한 승수는 4승이니까
-허리 순서 싸움에서 질 듯ㅋㅋ
“아무튼, 이제 제가 왜 이번 전국 대회를 기대하고 있는지 다들 아시겠죠?”
하온은 진심을 가득 담아 웃었다.
그가 말한 두 가지 상황 중 어느 것이 이루어지든 간에 그에게는 나쁠 게 없었으니까.
어느 쪽이든 화제가 될 테고, 그리하여 검도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검도를 주 콘텐츠로 삼은 아이튜버인 그 또한 이득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그래도 광천고가 이겼으면 좋긴 하겠다.’
왜냐하면, 광천고에는 이성현이 있었으니까.
작년 추계 전국 대회 개인전에서 성현이 싸우는 걸 본 하온은 그의 검도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 아름답기까지 한 일격에.
흡사 검의 신(神)처럼 느껴지는 모습은 그를 단숨에 성현의 팬으로 만들어버렸다.
응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이후로 하온은 2주 뒤에 있을 전국 대회에서 우승할 팀에 대해 시청자들과 계속해서 떠들었다.
방송에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
─춘계 전국 대회에서 광천고가 정점에서 끌어내려 질지도 모른다!
은근슬쩍 검도 팬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평가를 장본인들, 즉 성현을 비롯한 광천고 주전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닌 본인들의 이야기였으니.
게다가 하온의 방송뿐만 아니라, 검도라이프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예측 글들에 관련 내용이 실려 있으니 모르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그러한 평가를 알게 된 이들─성현을 제외한─이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하면.
“······.”
빠득.
부릅뜬 눈으로 이를 갈며 분노했다.
사실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이유를 붙여도 결국 전보다 약해졌다는 이야기고, 새롭게 광천고 주전이 된 이들에게는 퍽 안 좋은 내용이었으니.
안 그래도 승룡기 검도 대회 때 성현의 발목을 잡았다는 사실 때문에 적잖게 자극받고 있던 그들에게 이건 쐐기를 박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강해져야 해.’
‘졸업한 선배들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철 선배는 맡긴다고 했고, 나는 받아들였지. 그러니 제대로 해야 해!’
어느 순간 자신들의 실력에 만족하고 걸음을 멈춰버렸던 2학년 트리오도.
‘승룡기 때는 너무 꼴사나웠어. 성현이에게 배우는 이상,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어야 해!’
64강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해 성현의 얼굴에 먹칠했다고 생각한 수민도.
‘기회를 제대로 잡았어야지. 이 멍청이!’
‘······더 열심히 하자. 더!’
새롭게 주전이 된 1학년 서준과 은우조차도 더 강해지기를 애타게 갈망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금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예측들을 모조리 박살 내버리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훈련에 임했다.
언뜻 오버 트레이닝처럼 보일 정도로.
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십 년간 사람들을 가르쳤던 성현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오버 트레이닝을 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은가.
“······잠시 휴식하겠습니다.”
“오케이-”
“으아, 힘들다!”
열의에 찬 다른 주전들과는 반대로 성현은 차분하고 냉정하게 검도부를 이끌었다.
누구 한 명은 선을 넘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 했고, 그건 주장인 그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까닭이다.
그마저 흥분해서 날뛰다 보면 어디선가 반드시 삐끗하게 되기 마련이니까.
“······슬슬 쉬려는 거야?”
“아, 하윤 선배.”
어느새인가 다가선 하윤의 질문에 성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직은 더 할 생각입니다.”
“그래? 그럼 나랑 대련 한 판 어때?”
“대련이요? 저야 좋죠.”
강자와의 대련은 언제나 환영인 법.
성현은 흔쾌히 하윤의 대련 제의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대련은 한때 남녀 검도부 모두의 시선을 끌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회장기 이후로는 종종 시간 날 때면 대련하기도 했을뿐더러 애초에 검도부에서 대련은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첫 대련이야 갑작스레 하윤이 한참이나 약하다고 이야기되던 성현에게 신청한 거라 놀라웠던 거고.
“오늘은 어떤 겨눔세로 대련할까요?”
“중단세로 부탁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성현이 죽도를 들어 올려 중단세를 잡았다.
곧 그의 눈이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실전이 아닌 대련이라 해서 어설프게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실전에서의 그것과 조금의 차이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장엄하고 단호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윤 또한 마찬가지.
“······.”
“······.”
남고부의 괴물과 여고부의 천재.
성현과 하윤 두 사람은 도저히 대련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진지한 모습으로 대치했다.
어찌나 그 기세가 어마어마한지, 막 성현에게서 해방되어 쉬기 위해 물러났던 2학년 트리오들마저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서늘한 정적 속에 이어지던 대립을 끊어낸 건 하윤이었다.
차라리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