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시상식
“이제 시상식 하시러 가시겠네요.”
“네, 그래야겠죠.”
천수아의 질문에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의 다른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전들도 시상식을 준비하기 위해 주섬주섬 일어서고 있었다.
여고부 경기가 끝난 후, 시상식 및 폐회식이 진행된다는 일정을 오전부터 미리 전달받은 터라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다시금 우승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이건 아직 말씀드릴지 말지 고민하던 내용입니다만-”
‘음?’
말끝을 흐리는 천수아를 보며 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도 잠시.
천수아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은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조만간 언더키의 이름을 건 실업 검도팀이 창설될 예정입니다.”
“······!”
언더키 실업 검도팀의 창설!
천병중 회장이 직접 천씨 가문 회의에서 밝혔던 창설 의사가 마침내 천수아를 통해 성현에게 전해진 것이다.
성현은 자신의 기억보다 십 년은 발리 나온 언더키 실업 검도팀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오면서, ‘전’과 같은 미래는 이미 없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팀의 창설조차 앞당겨졌을 줄은 예상 못 했으니까.
“물론 근시일 내에는 아닙니다. 아직 많은 준비가 필요한 상황이니···.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언더키는 이 팀을 세계 최고의 검도팀으로 만들 의지와 능력이가 있습니다.”
“그걸 제게 말씀하신다는 건···.”
“예, 그렇습니다. 언더키 실업 검도팀에 이성현 선수를 스카웃하고 싶습니다.”
제안을 들은 성현이 턱을 매만졌다.
딱히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그는 서울시청 실업팀에서 잠시 몸을 담고 있다가 언더키 실업팀으로 옮기려고 계획을 짜두었던 상황.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언더키 실업팀이 십 년 뒤에 창설될 예정이기에 그랬을 뿐이다.
그보다 빨리 팀이 창설된다면야···.
‘문제는 과거 수준으로 지원을 해주냐는 건데.’
성현의 걱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천수아가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최고의 대우와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으음-”
“아직 창설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말씀드린 건, 꼭 이성현 선수를 팀에 영입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천수아의 눈이 진지함을 품고 빛났다.
“세계 최고의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것은 일찍이 천씨 가문의 집안 회의 당시 천수아가 천병중 회장에게 했던 설득이었다.
동시에, 아까 전 성현이 말했던 선수로서의 목표를 언급함으로써, 은근히 돌려서 묻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세계 최고끼리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결국, 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언더키 실업 검도팀의 첫 번째 선수, 이성현이 입단하는 순간이었다.
*
한국 고등학교 한 곳의 시상식 독점!
장담하건대, 아마 한국에 합작 제의를 했던 일본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들은 대회 우승을 빼앗길 거라고조차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현 일본 고교 검도의 강함은 그리 자부할만한 수준이었으니까.
실제로도 대회는 그들의 생각대로 될 뻔했었다.
용암고나 경중고 등 한국의 강호 고등학교는 광천고를 상대로 탈락했고, 그 외에는 일본 고교의 우세 속에서 대회가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평균적인 학생선수의 실력은 일본이 명백하게 한 수 위였다는 뜻이다.
그저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한국에는 이성현이라는 상식 밖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
이 괴물이 일본의 모든 계산을 짓밟아 뭉개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17연승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괴물은 저 검도 종주국이자 세계 최강인 일본에서도 감히 찾아볼 수 없는 존재였으니.
더해서 여고부에는 훗날 ‘검도 여제’라 불릴 만한 인재 두 사람이 한 팀에 있으리라고 대체 어떤 이가 예상할 수 있으랴.
만약 그걸 예상 가능했다면 애초에 한일합작 제안을 하지 않았을 터.
[남고부 우승! 광천 고등학교!]
[여고부 우승! 광천 고등학교!]
[정말 가슴 뛰는 광경이군요. 시상대 위에 오롯이 한국 선수들만이 올라서다니···.]
[한국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기분입니다. 저 선수들이 성장해서 일반부 경기를 치를 수 있을 때가 무척 기대됩니다!]
“와, 설마 한일합작인데 이렇게 되다니···.”
“국내 대회야 그렇다 쳐도, 국제 대회까지?”
“어허허- 한국 검도가 일본 검도를 정면에서 쓰러뜨리는 날이 올 줄이야.”
감탄, 흥분, 기쁨, 감동···.
한국인 관객들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시상대 위에 오른 광천고 주전들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검도 팬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은,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 단 한 번도 정면에서 일본을 꺾은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유망주들끼리의 대회라 해도 일본과 당당히 맞서 싸워 이겼다는 건 그들에게 큰 의미였다.
“······.”
“······.”
반면 일본인 관객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박수를 치고 있긴 하지만 의례적인 행동일뿐,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기야, 대체 어느 누가 국가 대표의 패배를 달가워하겠는가.
그들은 이제 위기감마저 느끼고 있을 지경이었다.
늘 항상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이들이 목 아래까지 치솟아 오른듯한 불안함 때문이다.
물론, 이 대회는 어디까지나 유망주들끼리 치른 대회일 뿐이며, 일본의 진정한 전력은 나서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으리라.
한데 그러지 못하는 건 성현이 향후 어떻게 자라날지 그들의 눈에도 뻔히 보인 까닭이다.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 괴물이 시간이 흘러 더 많은 경험이 쌓이고 완숙해지면 정말 일본 검도를 뒤흔들 괴물이 될지 명약관화하니.
심지어 한국에는 괴물과 명경기를 펼쳤던 백성호까지 있었다!
위기감을 느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으리라.
세계 최강의 타이틀을 한국에 빼앗길지도 모르는 불안이 일본인 관객들을 잠식했다···.
“정말, 정말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시상식 독점이 한국 검도 관계자들에게도 인상 깊었는지, 트로피를 전달하는 한국 검도 협회장도 무척이나 감동한 얼굴이었다.
성현은 어쩐지 ‘전’에 보았던 한국 검도 협회장이 떠오르는 모습에 속으로 웃고 말았다.
당시에도 한국 검도 협회장은 성현을 무슨 보물처럼 대했고, 그가 우승할 때면 늘 감격에 찬 눈으로 바라보곤 했으니까.
“여러분들은 한국 검도의 보배입니다! 부디 앞으로도 좋은 활약 보여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급기야 한국 검도 협회장은 광천고 주전들을 일일이 끌어안기까지 했다.
나중에 보다 못한 임원이 옆에서 말린 덕에 깃발까지 내어주고 시상대를 내려가긴 했지만, 어쨌든 이번 대회 결과가 협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장 이전에 성현에게 이번 대회에 대해 귀띔해줬던 곽해수도 저 멀리서 협회장과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
[다음은 이번 한일합작 승룡기 검도 대회의 다승왕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다승왕? 그런 것도 있었어?”
“응. 연승전이라 MVP 대신 타이틀 하나 새로 만들었더라. 뭐, 많이 이겼으면 MVP니까.”
“하긴 그건 그렇네.”
MVP를 대체한 다승왕 상.
남고부에서 받을 사람은 당연하게도 성현이었다.
결승전까지 포함하여 무려 열일곱 번을 이겼는데 감히 누가 이견을 제시할 수 있으랴.
성현 또한 그것을 잘 알았기에, 아직 발표가 되기 전임에도 자연스레 한발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은근슬쩍 가까이 다가선 수연이 서 있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여고부에서 다승왕을 받을 만큼 많은 승리를 거둔 건 다름 아닌 수연이었기 때문이다.
우승팀 선봉으로 매 경기 연승을 쌓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고부 다승왕! 광천고 남자 검도부 이성현!]
[여고부 다승왕! 광천고 여자 검도부 강수연!]
짝짝짝!
“이번에도 광천고 독식이네.”
“우승팀이니까 그럴 만도 하지.”
성현과 수연은 이번에는 일본 검도계 쪽에서 나선 인물이 건넨 상장을 받아들었다.
무척 감격스러워하는 눈빛이었던 한국 검도 협회장과는 달리, 이쪽은 웃는 얼굴임에도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적의마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시선.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 시선에 성현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전’에 성현을 ‘인성이 덜 되었다’라든가, ‘실력이 다가 아니다’라며 비난하던 일본 검도계의 인사.
하도 시비를 걸어서 국제 대회에서 우승한 후 소감으로 몇 번 깠더니 조용해졌었는데-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네.’
“감사합니다-!”
성현의 옆에 있던 수연은 눈빛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상장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상장을 받은 두 사람은 사진사의 요청에 따라 바짝 붙어섰다.
다승왕이라 쓰여진 상장을 앞으로 펼친 채.
어쩐지 유망주 검도 대회가 떠오른 수연이 밝게 웃었고, 그걸 본 성현도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선남선녀 검도 선수네요]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두 사람 사귀는 사이라던데.”
“다승왕 커플이라···.”
“사위 겸 제자라니. 강찬 선수는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거지?”
“내가 알기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어.”
“뭐야, 누구 말이 맞는 거야?”
시상대 위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나서 이어진 건 우승 소감 인터뷰였다.
보통 검도 대회에서는 안 하고 넘길 때도 많은 인터뷰였지만, 방송 송출까지 되고 있는 국제 대회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
물론, 그렇다 해서 두 우승팀 주전 다섯과 후보 둘을 전부 인터뷰할 수는 없으므로─시간 관계상 그건 불가능했다─, 마이크를 잡게 된 건 두 팀의 주장들 뿐이었다.
즉, 성현과 하윤이 우승 소감 인터뷰를 위해 나섰다는 이야기다.
“우승 축하드립니다! 이성현 선수, 임하윤 선수!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아주 좋습니다.”
“정말 기뻐요.”
“표정만 봐도 얼마나 기쁘신지 느껴지네요! 혹시 이번 대회에서 가장 힘들었던 고등학교를 꼽으시자면 어디일까요?”
인터뷰어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하윤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4강 상대였던 서울여고요.”
“저도 4강 상대였던 경중고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성현과 하윤 모두 4강, 그것도 한국 고등학교를 제일 힘들었던 상대로 고르자, 통역을 끼고 듣던 일본 검도 업계 인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마도 결승전이 제일 힘들었다, 뭐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라도 자존심을 챙기고 싶은 것이겠지만─
‘알고 있지?’
‘물론이죠, 하윤 선배.’
─문제는 인터뷰이로 나선 두 사람에게 그래 줄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점이다.
성현이야 ‘전’부터 늘 과감하게 인터뷰를 하는 편이니 그렇다 쳐도, 하윤까지 이렇게 나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정말 간단했다.
그동안 수도없이 맞아왔으니까!
임정호 선수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일본 검도계의 한국 무시 발언을 많이 보았고, 그걸 되갚아 줄 기회만 벼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 기회를 잡았으니, 얌전하게 인터뷰를 해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그럼 가장 강했던 상대를 세 사람만 고르자면?”
“서울여고의 백라윤. 한주여고의 이채원. 세송고의 김지희요.”
“경중고의 백성호, 백지호. 용암고의 김규호.”
단호하기까지 한 두 사람의 대답에 인터뷰이로 나선 여성이 어설프게 웃었다.
“아하하- 다들 한국 고교 선수네요.”
“네, 그렇네요.”
“기억에 남는 선수가 그렇게밖에 없어서요.”
슬쩍 보니, 이제 일본 검도 업계 인사들의 표정은 아주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저들이 뭘 어쩔 것인가.
우승자들이 제일 어려운 상대가 일본이 아닌 한국 선수들이었다는데.
결국 한일합작 승룡기 검도 대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본의 자존심을 구기는 대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전 세계 검도인들은 알게 되었다.
한국이, 마침내 이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날카롭고, 치명적인 송곳니를···.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