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한국 검도의 미래
모두의 기대가 모이고 있는 와중에도 광천고 여자 검도부는 거침없이 승리를 쌓아갔다.
많은 관심이 부담될 법도 하건만, 그녀들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비치지 않았다.
일찍이 여자 고등학교 사이에서도 강호로 군림하고 있던지라 이 정도 주목은 부담 축에서 속하지 않은 까닭이다.
파죽지세로 나아간 끝에 결승전까지 진출했음에도 그녀들의 얼굴에 긴장 대신 자신만만한 미소만이 감도는 건 바로 그래서였다.
“이제 한 번만 더 이기면 돼.”
결승전이 시작되기 직전.
광천고 여자 검도부 주전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하윤이 씩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제 결승이다.
여기서 이기면, 그녀들은 당당히 승룡기 검도 대회 우승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발 먼저 그 자리에 선 남자 검도부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다들, 우승하러 가자!”
““네, 주장-!””
“꼭 우승해요, 우리!”
힘차게 대답하는 여자 검도부 주전들.
그에 하윤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때, 이하은이 돌연 히죽 웃으며 옆에 반듯하게 서 있던 수연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야 회장기, 전국 대회에 이어 승룡기 우승 커플이라 자랑할 수 있으니까. 맞지?”
“힉?!”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이하은의 말에 수연이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이하은은 그런 그녀를 따라가지 않은 채, 그저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 지켜보았다.
마치 ‘네 마음은 이미 다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
수연은 단숨에 이하은이 뭐라 말한들 들을 표정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물기를 택했다.
괜히 뭐라 더 말했다가 말꼬리를 잡혀 놀림당하느니, 햄스터가 자신의 해바라기 씨를 지키듯 바짝 경계하는 모습을 취한 것이다.
물론, 이것도 딱히 효과가 있는 대처는 아니었다.
어느새인가 이하은 말고도 다른 선배들도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어떻게 알아냈는지 성현이 있는 방향을 정확히 가리키며 떠들었다.
“저-기 네 남친 있다. 수연아.”
“어? 지금 이쪽 보는 거 같은데.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게 어때?”
“남친이 응원이라니~ 너무 부럽잖아~”
“하은이 너는 최영준한테 부탁ㅎ, 읍-읍!”
짓궂은 선배들의 놀림에 수연의 얼굴이 홍시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현재 광천고 검도부에서─남자 쪽과 여자 쪽 둘 다!─ 성현과 수연 두 사람의 사이는 반쯤 공인되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연 쪽에서 워낙 티를 내다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더군다나 성현도 딱히 싫은 기색이 아닌 데다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 주말까지 붙어 다니니 지켜보는 이들로서는 당연히 그들이 커플, 내지는 그 직전의 관계라 생각할 수밖에.
······어찌 보면, 그녀들은 수연의 원대한 ‘계획’에 가장 먼저 걸려든 셈이었다.
“수연이 그만 놀리고 시합 준비해!”
“알았어~”
“재밌었는데 아쉽다-”
곤경에 처한 수연을 구해준 건 하윤이었다.
주장인 그녀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자, 다른 주전들도 별말 없이 시합 준비를 하러 갔다.
언제까지고 장난치고 있을 시간은 없었으니.
그렇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준 하윤에게 수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하윤 선배.”
“···별거 아냐.”
어쩐지 인사를 받는 하윤의 표정이 떨떠름했지만, 수연은 신경 쓰지 않고 시합 준비를 서둘렀다.
결승전에서 이겨서 우승해야 이하은이 말했던 것처럼 성현과 성룡기 우승 커플이라는 업적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
승룡기 검도 대회의 파급력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기회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관객석에서 그 모든 모습을 보고 있던─물론 소리는 너무 멀어 들리지 않았다─ 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쪽을 가리키면서 대화를 한 것으로 보아 자신도 관련된 이야기 같은데, 무슨 내용인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은 탓이다.
수아를 포함해서 다들 웃고 있던 걸 보면 좋은 이야기 같기는 한데─
‘뭐, 됐나.’
잠시 대화를 추론해보던 성현이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만약 그가 알아야 하는 이야기라면 수연이 어련히 알아서 이야기해주겠지, 라는 마음이었다.
아니라면 굳이 알고자 노력할 이유가 없고.
“······계속해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 네. 말씀하세요.”
“혹시 이성현 선수가 광고했던 신상품 저지 기억하십니까? 국가 교류전 당시에 입었던-”
“물론이죠. 수연이랑 같이 입었던 그거 맞죠?”
“네, 맞습니다.”
기억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천수아가 직접 집으로 찾아와 고급스러운 자동차에 성현과 수연을 태우고, 경기장까지 데려다주며 전해줬던 제품이었으니까.
게다가 국가 교류전이 끝나고 나서 광고 촬영을 진행하기도 한 제품이기도 했고.
언더키 매장에서 했던 두 사람의 약속이 이뤄졌다면서 수연이 기뻐하던 모습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저지가 검도 국가 교류전을 계기로 굉장히 잘 나간 덕에 이번에 봄-가을 버전이 새롭게 출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 그래요? 잘 됐다. 그거 여름 버전 좋았는데. 봄-가을 버전도 하나 사야겠네요.”
“원하신다면 바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네? 제가 구매해도-”
“-아뇨.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이성현 선수가 자사 제품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후원사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부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지원 감사합니다.”
성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사에서 지원하고 싶다는 걸 굳이 끝끝내 고집을 부려 구매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런 식으로 전부 제 돈으로 살 거였다면 언더키에게 후원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만 그는 알지 못했다.
천수아가 그에게 새로운 제품을 제공하고 싶은 이유는, 개인의 욕심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럭저럭 변명을 잘한 덕에, 그가 입는 물건, 사용하는 물건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자신의 후원으로 채우고 싶다는 그녀의 욕망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채로 묻혔다.
당장은 말이다.
“아무튼, 이번에 새로 나올 봄-가을 저지에도 이성현 선수와 강수연 선수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라인의 제품이니까요. 괜찮으시다면 근시일 내로 관련된 내용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광고라. 으음, 수연이가 좋아하겠네요.”
“···이성현 선수의 의사는 어떠신지요?”
“저야 물론 좋습니다.”
사실 아무리 언더키가 밀어주는 운동선수라 해도 이처럼 같은 라인 제품의 광고를 연달아 촬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스포츠 브랜드가 운동선수가 광고를 찍는 건 사람들에게 무언가 인지도가 크게 올랐을 때가 많은 까닭이다.
올림픽 같은 국제 대회에서 활약하거나 할 때.
그 시기에 몰아서 찍기에 같은 라인의 다른 제품이 나와도 또 광고를 찍는 경우는 드문 것이다.
성현은 그저 여러모로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보는 게 좋았다.
새 제품이 나올 때마다 국제 대회에 나섰으니.
물론, 거기서 엄청나게 활약하지 못했다면 광고를 받을 일이 없으니, 어디까지나 기회를 잡은 건 그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그건 수연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대회만 해도 수연은 광천고 여자 검도부 선봉에서 매 경기 꼬박꼬박 1~2승은 거둬주고 있었으니.
“백색, 목! 시합 끝!”
““와아아아아-!””
“강수연 잘한다!”
“다 이겨버려!”
결승전에서도 수연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시라유리 여자 고등학교의 선봉, 사사베 에리카를 상대로 허리-목으로 이어지는 연속 득점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2위로 나선 나오노 유키도 감히 그녀를 멈춰 세우지 못했고, 단숨에 2승을 거두며 결승전의 무게추는 광천고로 기울었다.
“아···! 아깝다!”
“3연승이면 우승 반쯤 확정인데!”
아쉬운 건 중견으로 나온 히타모리 아사코에게 아슬아슬하게 1대0 패배를 당했다는 점.
연달아 세 경기를 치르며 체력적 소모가 컸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결승전에 올라올 때까지 경기당 평균적으로 두 번을 싸워왔으니······.
[정말 대단합니다, 강수연 선수. 결승전에서조차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네요.]
[제가 알기로 강수연 선수가 이성현 선수와 굉장히 친하거든요? 아마 이성현 선수가 강수연 선수를 많이 가르쳐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 모두 그런 내용의 인터뷰도 했고요.]
[오호- 그렇군요! 마침 같은 학년에 같은 학교 검도부이니 서로 많은 도움을 줬겠군요.]
[같이 사진 찍은 거 보면 굉장히 친해 보이죠.]
[저도 본 것 같습니다. 검도 선남선녀 선수로 꽤 유명했죠? 하하!]
중계진조차 수연의 분투에는 박수를 보낼 정도!
여담이지만, 후일 관련 방송을 본 수연은 자신의 활약을 칭찬한 것보다 성현과 자신을 엮어 말한 것에 더 기뻐했다.
중계진마저 입에 올릴 만큼 자신의 계획이 서서히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된 까닭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성현이한테 배웠다고 해도 되는 거겠지···?’
경기장에서 내려와 호면을 벗은 수연은 성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까와 비슷한 자세로 앉아 있던 성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씩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이 보였다.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수연은 꽃이 피어나듯 활짝 웃었다.
차후 편집된 영상으로 퍼져나가 그녀의 팬을 수없이 양산할 장면이었다.
이후로도 결승전은 시종일관 광천고의 주도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시라유리 여자 고등학교 주전 선수들도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흐름을 되찾으려 했으나, 선봉 수연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도 컸다.
그나마 주장인 시마자키 세츠나가 연승을 거두어 역전극을 그려내는가 싶었으나.
타아악-!
“백색, 머리!”
““와아아아아-!””
“임하윤 최고다! 다 부숴버려!”
“임! 하! 윤! 임! 하! 윤!”
이를 가만히 두고 볼 광천고 여자 검도부의 주장, 임하윤이 아니다.
그녀는 평소 이상으로 사나운 표정으로 시마자키 세츠나를 몰아붙였고, 이미 여러 번의 혈투를 벌인 시마자키 세츠나는 그 공세를 견디지 못했다.
거의 경기 시작과 동시에 이루어낸 득점 이후에는, 사실상 일방적인 경기가 펼쳐졌다.
시마자키 세츠나가 버텨낸 게 용할 만큼.
실로 결승전에 올라온 검도부의 주장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멋진 실력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건 버티기만 해서는 결국 승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점뿐.
“백색, 머리! 시합 끝!”
““와아아아아-!””
[우승-! 우승입니다! 여고부의 우승은 광천고입니다! 남고부에 이어 여고부까지! 광천고가 다시금 우승을 거머쥐는군요!]
[한 학교가 두 부문, 그것도 결승 한일전에서 승리하여 우승이라니! 하하하! 한국 검도의 미래는 정말 밝습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말이죠!]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한국 검도의 미래를 묻거든, 광천고를 보게하라! 라고요!]
[딱 맞는 말이군요! 하하!]
임하윤은 지친 시마자키 세츠나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끝에, 기어코 한 점을 더 따내며 광천고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광천고는 기어코 남고부, 여고부를 모두 제패하며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그것도 회장기 같은 일반적인 국내 대회가 아니라, 한일합작으로 개최된 대회에서!
무엇보다도 일본과 합작한 대회라는 게 컸다.
일본은 검도 종주국이자 현 세계 최강으로 오랜 시간 한국의 목표였었다.
도저히 따라잡을 방법이 보이지 않는 목표.
한데 아득하게만 보였던 그 격차가 미래에는 오히려 뒤집혀버릴 수도 있음을 이번 대회로 증명해낸 거다.
한국 검도를 사랑하는 검도 팬이라면 환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짝짝짝짝짝-!
개가(凱歌)처럼 들리는 박수 세례는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의 증명이었다.
함께 박수를 보내던 성현은 문득 피식 웃었다.
광천고가 여고부에서 우승했다는 것.
그 말인즉.
‘또 시상식에 우리끼리만 올라가겠네.’
또 한 번 광천고의 시상식 독점이 벌어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으니까.
시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