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23화 (123/150)

123화: 세계 최고

한일합작 승룡기 검도 대회 2일 차.

잠실 학생 체육관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남고부 경기는 어제 모두 끝났을지 몰라도, 아직 여고부 경기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성현을 비롯한 광천고 주전들이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잠실 학생 체육관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어제 경기에서 여자 검도부에게 받았던 응원을 되돌려주기 위해서.

작년부터 몇 번인가 서로를 응원하다 보니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일이었다.

“광천고다···.”

“같은 학교 여자 검도부 응원하러 온 거 같은데.”

“사인받을 수 있나? 부탁해도 되나?”

정말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관람석에 찾아온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전들은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바로 어제 관객들 앞에서 벼랑 끝에서 역전해내는, 그야말로 극적인 우승을 거둔 그들인 만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걸 본다면 누구라도 사인 한 장쯤 받고 싶어지기 마련이기에.

게다가 여기에 와서 경기를 직관하고 있다는 건 검도 팬, 특히 고교 검도 팬일 확률이 높았고, 그런 이들에게 성현과 광천고 주전들은 스포츠 스타와 다름없었으니까.

만약 광천고 남자 검도부가 경기를 앞두고 있거나, 혹은 이미 여고부 경기가 시작했다면 이야기가 달랐으리라.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잠시 ‘괜찮나?’, ‘괜찮으려나?’ 하며 머뭇거리던 사람들은 곧 용기를 내어 다가섰다.

“저, 저기!”

“네?”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네. 물론이죠. 성함이?”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로 다가선 여성 팬에게 성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었는데, ‘전’에 그가 현역 생활을 할 때도 이러한 일이 제법 자주 있었던 까닭이었다.

당시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검도 팬들에게 인기 있는 선수였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그의 태도는 도화선에 불을 댕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저, 저도 한 장만 좀!”

“최영준 선수, 사인 한 장만 부탁합니다!”

“네? 네? 저요?”

“부탁합니다!”

“아, 네! 해드릴게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다음에는 저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인을 받기 위해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

광천고 주전들은 거절하는 일 없이 웃으며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멀찍이 앉아 있던 이들마저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곧 사인을 받기 위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서는 게 아닌가?

그걸 본 다른 이들이 또 몰려들고, 다시 그 모습을 본 이들이 몰려들다 보니, 어느새 광천고 주전들 근처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수준이 되었다.

“이성현 선수, 저도 사인 한 장만!”

“저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와! 감사합니다! 다음 대회도 힘내세요!”

“네, 응원 감사합니다.”

역시나 주전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 건 성현이었다.

이번 승룡기 검도 대회뿐만 아니라, 작년 내내 신화라고 불릴 정도의 업적을 쌓으며 활약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뒤를 이은 건 영준이었고, 놀랍게도 그다음 순서는 다름 아닌 수민이었다.

다른 2학년 트리오도 아닌 수민이라는 점이 꽤 놀라웠지만, 이번 대회 초반에 그가 보여준 충격적인 3연승을 떠올려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아마 ‘성현의 하위 호환’이라는 특이한 개성도 그러한 인기에 한몫하였으리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성현과 광천고 주전들이 정신없이 몰려드는 사인 요청에 대응하고 있을 때, 곧 경기가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그에 따라 사인을 받던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사인을 받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오늘 이곳에 온 가장 큰 목적은 2일 차 여고부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였으니.

“와, 나 이런 거 처음이야.”

“나도. 사인 요청이라니.”

처음 받아보는 사인 요청에 진땀을 뺐던 영준과 대현이 헤실헤실 웃으며 떠들었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학생선수가 팬들의 사랑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경험은 흔한 게 아니었으니까.

검도 자체의 인기 문제라기보다는, 정말 어지간히 유명한 유망주가 아닌 이상, 그런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끽해봐야 백성호 정도나 이처럼 사인 요청을 받는 경험을 해봤을 터.

“솔직히 내가 윤호보다는 많이 했다. 인정?”

“인정 못 해.”

“왜 인정 못 해. 누가 봐도 나한테 받으러 오시던 분들이 더 많았는데!”

“그거 영준이한테 받으려다가 잘못 간 거.”

“영준이 가려던 분들도 나 보고 줄 바꿨는데?”

누가 더 사인을 많이 했냐는 걸로 옥신각신하는 대현과 윤호를 보며 성현이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두 명이 “천상계가 인간계를 비웃는다!”라든가, “수연이한테 여성 팬들한테 친절했던 거 다 이를 거다!”라는 말을 지껄였지만, 성현은 가볍게 넘겨버렸다.

저들이 저러며 웃고 떠들어댄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기에 굳이 대응하지 않은 것이다.

얼마 안 가 진정할 걸 알았으니까.

과연 성현의 예상대로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대현과 윤호는 언제 아옹다옹했냐는 듯 옆자리에 앉아 여고부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무렵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 앗! 천수아 팀장님!”

뒤늦게 사인을 요청하려는 팬인가 싶어 대답하던 대현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광천고 주전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천수아 팀장’은 지난 합숙 훈련 당시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언더키’의 마케팅부 산하 선수 후원기획팀 팀장 천수아라는 이름을 어찌 학생검도 선수가 쉽게 잊을 수 있으랴.

다른 곳도 아닌 언더키인데 말이다.

광천고 남자 검도부는 더더욱 그랬다.

성현이 있기 때문인지─아마 십중팔구는 그러하리라고 다들 생각했다─언더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까닭이다.

“잠시 이성현 선수 옆에 앉아도 될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아, 네! 물론이죠! 앉으세요!”

“배려 감사합니다.”

차분히 인사를 건네고는 자연스레 성현의 옆자리로 가서 앉는 천수아.

그녀를 보며 서준이 속닥거리듯 물었다.

“저분 누구예요?”

1학년들은 작년 합숙 훈련 당시만 해도 중학교 3학년이었던 바, 천수아를 오늘 처음 만나보았던 만큼 당연한 질문이었다.

서준의 질문에 답한 건 대현이었는데, 그는 어쩐지 우쭐거리는 태도로 말했다.

“언더키 선수 후원기획팀 팀장님.”

“헉! 언더키?!”

“그래.”

“언더키 팀장님이 성현 선배를-? 음-”

잠시 놀랐던 서준은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현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아무리 언더키가 대단하다고는 해도, 성현은 세계 수준에서도 어나더 레벨이었으니까.

향후 세계 검도 정상에 설 인재이니 언더키도 저처럼 팀장급이 나서서 대우해주는 것이리라.

“우승 축하드려요, 성현 선수.”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응원이 큰 힘이 됐어요.”

“다행이네요.”

결승전 직전에 성현은 [우승 응원하겠습니다]라는 삭막하지만, 천수아다운 톡을 받은 바 있었다.

그에 [우승하겠습니다]라고 답을 보냈었고.

이를 언급하니 천수아의 얼굴에 꽃이 피듯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고 보면···. 이성현 선수는 하신 말씀을 굉장히 잘 지키시는 것 같아요.”

“음- 그런가요?”

“네. 호구를 드릴 때도 그랬고, 합숙 훈련 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렇네요.”

기대에 보답하겠다고 했을 때도.

앞으로 더 기대해도 좋을 거라고 했을 때도.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랬다.

성현은 천수아에게 했던 모든 말을 지켜냈다.

남들이 보면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약속들조차 완벽하게 이루어낸 것이다.

그것도 오롯이 자신의 실력만으로.

검도 애호가의 피를 타고난 천수아에게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답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성현 선수는··· 어디까지 가실 생각이신가요?”

“어디까지라뇨?”

“선수 생활의 목표- 라고 할까요? 어떤 선수가 되고 싶다 같은 거. 문득, 궁금해져서요.”

“그거야 간단하죠.”

성현이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검도’가 아닌 ‘선수 생활’의 목표라면, 단 하나뿐이지 않은가?

“세계 최고.”

“세계··· 최고.”

“다르게는 세계 최강이라고도 말하겠죠. 어느 누가 됐건 검도에서 가장 강한 선수를 떠올릴 때, 제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 겁니다. 그게 제 선수 생활의 목표입니다.”

“아···.”

단호하기까지 한 성현의 대답에서 천수아가 본 것은 기묘하게도 아버지의 그림자였다.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향해 달리던 아버지.

어린 시절, 그녀가 어느 사람보다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흐릿하게 성현의 위로 덧입혀져 보인 것이다─

두근두근.

문득, 천수아는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깨달았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성현의 모습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도와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기지 못할 만큼.

어쩐지 그녀는 할아버지, 천병중 회장이 유망주만 보면 후원해주지 못해서 안달을 내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빛나는 데 자신의 도움이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으랴.

“경기 시작했네요.”

“······네, 그렇네요.”

여고부 경기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와중에도 천수아는 성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성현을 곁눈질하는 그녀의 모습을 가족들이나 부하 직원들이 봤다면 깜짝 놀랐으리라.

늘 냉정하고 삭막하기만 했던 그녀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으니.

““광천고 파이팅-!””

처음에는 천수아가 옆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광천고 주전들은 언제 그녀를 신경 썼냐는 듯 체육관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응원의 외침을 내질렀다.

한때는 선수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소리를 죽이는 게 관람 문화였던 적도 있지만─꽤 오래된 이야기다─, 지금은 이처럼 응원하는 선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팬들은 물론이요, 선수들도 오히려 응원의 목소리를 듣는 쪽이 더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친 와중에 힘이 난다나.

그러한 광천고 남자 검도부의 응원 덕분일까?

“백색, 허리! 시합 끝!”

“백색, 머리! 시합 끝!”

광천고 여자 검도부는 승승장구하며 이겨나갔다.

사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 고교 검도의 평균 수준이 한국 고교 검도보다 높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선수들의 이야기일 뿐.

일찍이 백성호와도 비견되던 임하윤과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강수연은 명백히 양국을 합쳐도 톱클래스의 학생선수였으니까.

심지어 그 두 사람이 한 팀이기까지 하다?

요컨대, 남고부로 따지면 백성호와 김규호가 한 팀인 것과도 같은데, 당연히 승승장구할 수밖에!

“와, 이러다가 여고부도 우승하는 거 아냐?”

“그럼 남고부랑 여고부 다 먹는 건데.”

“···어쩐지 작년 회장기랑 전국 대회가 떠오르는데. 나만 그래?”

광천고 전성시대.

작년 고교 검도계는 그리 불렸다.

단체전, 개인전, 더해서 남녀를 가릴 것 없이 광천고가 우승했기 때문이다.

이번 승룡기 검도 대회도 이미 남고부에서 광천고가 우승했으니, 여고부에서도 광천고가 우승한다면 또 한 번 광천고만이 시상대 위에 서게 되는 셈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현재 광천고 여자 검도부가 보여주는 포스는 일본 고교들조차 한 수 물러줄 정도.

그렇다면 정말로 가능성이 있었다.

한일합작에서도, 광천고가 오롯하게 최강의 자리에 올라설 가능성이···!

““광천고 파이팅-!””

한국 검도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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