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이걸로, 3승
콰악.
“커-헉!”
[이성현 선수의 날카로운 반격! 나자와 선수의 머리치기를 한 걸음으로 무력화시키며 단호하게 찌르기를 성공시켰습니다!]
[정말 놀라운 기술, 아니 기예입니다. 마치 나자와 선수의 격자를 모조리 꿰뚫어 본 듯합니다!]
성현의 죽도는 여지없이 나자와 로쿠로의 유효 격자 부위 중 한 곳─ 목에 꽂혔다.
그건 기부림을 지르기 위해 숨을 토해내던 나자와 로쿠로에게는 꽤 끔찍한 일이었다.
제대로 된 찌르기에 당하면 한순간 숨통이 탁 틀어막히게 되는데, 심지어 호흡을 내뱉던 도중에 그것을 당해버렸으니까.
거친 신음을 내지른 나자와 로쿠로가 그 자리에 쓰러지듯 털썩 주저앉고 마는 모습만 봐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자와 로쿠로의 행동이 시합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었다.
이미 성현의 반격이 성공한 시점에서 첫 번째 판은 끝난 뒤였기 때문이다.
주심을 비롯한 세 명의 심판은 찌르기가 성공하는 그 순간, 성현을 뜻하는 백색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린 채, 그의 승리를 선언한 상태였다.
성현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첫 번째 득점을 성공시킨 것이다.
““우와아아아-!””
“광천고 파이팅!”
성현이 선취점을 올리니 한국인 관객들로부터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4대1 교환 앞에서 힘 빠졌던 그들에게 성현의 승리는 달콤한 꿀과 같았던 까닭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아직 모른다.’라는 생각과 함께, 이미 앞선 경기들에서 성현이 쌓아 올린 연승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처럼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희망론이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물론 그러한 희망에 성현이 그 경기들을 통해 얼마나 지쳤는지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이성현 선수의 선취점, 이거 굉장히 크게 작용할 것 같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송학림 해설님?]
[맞습니다. 이제 쫓기는 쪽은 이성현 선수가 아니라 나자와 선수가 되었죠. 물론 나자와 선수가 개인의 승리보다 팀의 승리를 추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습니다만···.]
[팀의 승리라! 과연 나자와 선수가 어떻게 나올지가 중요한 일이 되겠군요.]
“후으으-”
겨우 숨을 가다듬고 일어선 나자와 로쿠로의 표정은 많이 변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뚜렷하게 드러났던 투지가 확 죽어버렸다는 점이다.
본래 실력이 뛰어난 만큼 보이는 게 많은 법.
그는 이번 반격 한 번으로 자신과 성현 사이에 있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격차를 깨달았다.
아무리 발악해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지는 뻔했다.
최대한 상대의 체력을 빼놓고, 뒤에 나올 동료들이 이 괴물을 꺾어주기를 바라야 할 터···.
““와아아아-!””
“······.”
“······.”
관객들의 열성적인 응원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정적 속에서 대치했다.
첫판과는 다르게 신중하게 진행되는 경기.
[나자와 선수가 많이 움츠러든 모습이죠?]
[섣부르게 들어갔다가 반격당하는 걸 경계하는 것 같은데··· 이러면 오히려 이성현 선수한테는 좋은 일이죠.]
[그렇죠. 선취점을 얻었으니 마음이 급해진 건 나자와 선수 쪽이니까요.]
문제는 도통 나자와 로쿠로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만히 간을 보듯 하면 상대는 요지부동.
그렇다고 섣부르게 치고 들어가면 아까처럼 허무하게 반격당하리라.
체력 소모를 끌어내기조차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은 나자와 로쿠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본 최강 에이겐 고교의 주전으로서 가졌던 자부심이 단 한 사람의 한국인 고등학생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
중단세를 취한 성현은 다만 무덤덤하게 나자와 로쿠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 표정 없는 얼굴······.
그리고, 어떠한 감정이나 의도도 드러내지 않는 무색(無色)의 기세!
그것은 또 다른 압박감이 되어 나자와 로쿠로를 짓눌렀다.
차라리 기부림을 내지르고, 어떻게든 득점을 해내려는 의사가 보였다면 이처럼 속이 타들어 가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성현에게 그런 어설픈 전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그를 오연히 응시하고 있을 따름.
마치 ‘격이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자식···.”
바드득.
그 어떤 도발보다도 마음에 꽂히는 성현의 눈빛에 나자와 로쿠로가 이를 갈았다.
이마저도 끝끝내 참아야 하는가?
고민하던 그는 결국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울분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어중간한 각오로 체력을 소모하게 하려고 시도한들 제대로 성공하지도 못할 것 같으니, 차라리 미약하게 있는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어진 상황은 첫 번째 판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나자와 로쿠로가 기부림과 함께 격자를 시도했고, 성현은 그걸 마치 미래를 읽어낸 듯 가볍게 피한 뒤 반격, 그러자 심판들은 깃발을 들어 올려 성현의 승리를 알렸다는 뜻이다.
관객들에게 그건 마치 두 사람이 짜고 보여주는 연극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칠지 서로 논의한 게 아니라면 어찌 단 한 걸음만으로 공격을 피하고 반격에 나설 수 있단 말인가.
[이성현 선수가 1승을 따내며 광천고의 불씨를 극적으로 이어갑니다]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모습입니다. 연승전이란 게 원래 그렇죠. 주전 전원이 지기 전까지는 패배한 게 아닙니다. 주장 순서가 강하다면 더더욱 말이죠]
[맞습니다! 1대4의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역전은 가능하거든요? 전 경기에서 이성현 선수는 그걸 직접 보여줬고요!]
‘이걸로 1승.’
“스읍, 하아아-”
체육관을 진동시키는 환호성을 흘려버리며 성현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다행히도 이번 시합의 체력 소모는 크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나서서 자멸해준 덕도 있고, 애초에 불패는 정(靜)의 극의와도 같았던 까닭이다.
최소한의 움직임과 최저한의 힘으로 최적의 경로에 따라 움직인다면 체력 소모를 극도로 억제하는 게 가능했으니.
물론 어디까지나 억제일 뿐이다.
결국, 몸을 움직여야 하고, 상대를 두들겨야 하는 건 똑같으니까.
게다가 무거운 호구를 입고 서 있는 것으로도 체력은 쭉쭉 빠져나갔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삐걱대던 몸은 억제된 체력 소모로도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고.
‘버틸 수 있으려나.’
성현은 다음으로 올라오는 상대, 에이겐 고교의 중견 ‘나가히로 벤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 있다는 건, 미래에도 이름을 떨치는 강자라는 뜻과도 일치했다.
특히나 외국 선수일 경우에는 더더욱.
한국 선수가 아닌 외국 선수와 그가 마주할 수 있는 건 대개 국제 대회고, 거기에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 국가를 대표할 자격이 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에이겐 고교에서 다음으로 올라오는 건 중견, 나가히로 벤조 선수입니다.]
[주장인 히사츠네 선수만큼은 아니지만 바로 그 뒤를 잇는 강자입니다. 작년 인터하이 개인전에서 무려 4강까지 진출한 선수죠.]
[일본 3대 유망주의 뒤를 바짝 쫓는 유망주라고 할 수 있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나가히로 벤조는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성인보다도 더 큰 키와 덩치를 자랑했다.
성현도 백팔십 센티미터가 넘었는데, 그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컸으니, 아마 2미터 정도는 훌쩍 넘지 않을까 싶었다.
심지어 키만 멀대같이 큰 게 아니라, 근육도 탄탄하여 느껴지는 위압감은 그보다 더했다.
‘무시무시한걸.’
무기술이 아무리 체급보다는 기술이라지만, 그래도 리치가 길면 유리하다는 건 당연한 이치.
길쭉한 나가히로 벤조의 팔을 보면 그가 어째서 성현의 기억에 남을 정도의 강자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저 긴 팔이 휘어지며 갈기는 일검은 마치 채찍같이 느껴지리라.
성현이 아니었다면 어지간히 고전했을 터.
······성현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백색, 손목!”
[멀찍이서 연격을 가하던 나가히로 선수가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습니다!]
[팔이 긴 만큼 리치가 길어 유리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검이 닿지 않는 건 아니죠! 이성현 선수가 빈틈을 잘 파고들어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밑 손목 치기를 통한 선취 득점부터.
“백색, 허리! 시합 끝!”
[이성현 선수, 깔끔하게 나가히로 선수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허리 치기를 성공시킵니다! 2연승!]
[체력을 아끼려는 건지 수비적으로 경기를 운영하고 있지만, 본래 이성현 선수가 엄청난 폭발력이 있는 선수거든요!]
이어서, 빠른 타돌 및 허리로 쐐기 득점까지.
성현은 나가히로 벤조라는 강적을 상대로 이번에도 전 판과 같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죽도가 스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지독히도 완벽한 승리였다.
좌절하듯 고개를 떨군 나가히로 벤조를 보며 성현이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약함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이걸로 2승.’
““이! 성! 현! 이! 성! 현! 이! 성! 현!””
이를 알 리가 없는 관객들이 단숨에 2승을 올린 성현의 이름을 한목소리로 연호했다.
1대 4와 1대 2는 느낌이 확 다른 법.
‘어쩌면’, ‘혹시나’ 정도로만 생각했던 역전극이 바짝 다가오니 어찌 환호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한국인 관객들은 일제히 발을 구르며 성현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고, 그것은 에이겐 고교에게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적진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시합장에 나서는 치도 마츠시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더 지치게 만들어야 해.’
성현과 마주 선 치도 마츠시는 이미 아예 이길 생각을 버린 상태였다.
성현이라는 어나더 레벨의 괴물은 감히 그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므로, 온전히 히사츠네 아츠시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앞선 주전 두 사람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았으니 지극히 당연하고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팀의 승리를 위한 희생.
먼저 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현의 체력을 바닥내놓는 것뿐.
물론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아예 승리라는 헛된 목적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에이겐 고교의 부장을 맡을 정도의 강자가 추한 수단에 반칙까지 각오한다면 어쨌든 상당한 괴롭힘이 가능할 터!
치도 마츠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의도가 굉장히 노골적이네요, 치도 선수.]
[타돌 이후 곧장 코등이 싸움, 그리고 밀어내기라. 앞서 반칙 두 번을 받았는데도 멈추지 않는 건 반칙패조차 각오하고 있다는 뜻인 듯합니다.]
[어떻게든 이성현 선수의 체력을 빼놓으려는 게 눈에 보이는군요.]
치도 마츠시의 경기 운영은 간단했다.
타돌을 시도하고, 즉시 가까이 붙어 코등이 싸움에 들어간 뒤, 망설임 없이 억지로 밀어내며 뒤로 물러서기.
이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성현의 체력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은 것이다.
반칙 두 번으로 인해 한 점을 빼앗겼음에도.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히사츠네 아츠시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갸륵하기까지 했다.
‘흐음.’
솔직히, 치도 마츠시가 들고 나온 방법은 썩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만약 이게 성현을 제대로 갉아먹었다면 계속 시도하기 전에 치고 나가 끝을 보았으리라.
그러지 않은 건 큰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작은 귀찮음 정도?
오히려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점수를 가져다 바쳐준 셈이니 고맙기도 했다.
공세를 걸고, 상대를 무너뜨린 뒤, 기술을 내어 결정을 짓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하게 점수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이제는 끝내야겠지.’
네 번의 반칙을 모두 채울 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이유는 없다.
성현은 시합을 끝내고자 마음먹었고, 제 생각을 그대로 이루어냈다.
늘, 검도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백색, 머리! 시합 끝!”
‘이걸로, 3승.’
폭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