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심해
강찬울은 국가 교류전을 거치며 성현과 제법 친해졌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웠다.
상대는 그저 쓰러뜨려야 할 적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열 받고 짜증 나는 적!
그의 눈동자가 뜨거운 투지로 불타올랐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어.’
어울리지도 않게 최대한 버틴다느니, 체력을 빼놓겠다느니 생각한 게 문제였다.
성현은 그런 수작이 통할 이도 아닌 데다가, 강찬울 본인도 막는 것보다는 치는 쪽이 더 자신 있는 타입이었으니까.
억지로 버티려 하니 행동이 어설퍼질 수밖에.
그러니 자신이 장외까지 밀려났음에도 그걸 뒤늦게서야 눈치챈 게 아니겠는가.
‘내가 자신 있는 걸 하자.’
“후우우-”
강찬울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자신의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모두 토해내려는 것처럼.
반칙 한 번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어디 검도 하루 이틀 하나?
검도를 하다 보면 반칙도 꽤 많이 받기 마련이고, 이번 장외 반칙도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물론, 뒤늦게서야 장외를 깨달은 건 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꼴사납다는 것 빼고는 별다를 게 없다는 거다.
점수를 내준 것도 아니니까.
이제부터 달라지면 그만.
‘지금부터는··· 제대로 맞서 싸운다.’
“재개!”
[강찬울 선수의 장외 반칙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경기가 재개됩니다]
[일단 기세를 잡은 쪽은 이성현 선수네요. 기백과 공세만으로 상대를 밀어내서 반칙을 얻어냈다는 건 큽니다. 상당한 압박이 될 겁니다.]
‘오?’
강찬울의 기세가 바뀌었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역시나 성현이었다.
상대를 하고 있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상대를 더 깊게 들여다봐야 이길 수 있는 법이므로.
그의 ‘눈’에 훤히 보이기도 했고.
어쭙잖게 뒤로 빼려던 방금 전과 달리, 평소의 그것으로 돌아온 자세가.
그에 맞춰 성현의 기세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상대가 제 모습을 찾았으니, 그 또한 이전보다 한층 더 진심을 내야 할 때였기에.
뭐니 뭐니 해도 강찬울은 재능 하나만큼은 ‘천재’ 백성호와도 비견된다고 말해지던 소년이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띄워주기식 과장이 섞인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강찬울의 재능이 백성호를 끌어들일 만큼 출중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특유의 오만한 성정 때문에 가려져 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
성현이 신경 써서 상대해줄 가치가 충분한 인재라는 뜻이다.
불행하게도.
스윽.
[차분하게 나아가는 이성현 선수. 이번에는 강찬울 선수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장외 반칙으로 어설프게 버티려고 했다간 그대로 짓뭉개진다는 걸 깨달은 듯합니다. 차라리 맞서 싸우는 게 맞다는 판단을 내렸군요]
검도에는 타승법(打勝法)과 승타법(勝打法) 두 가지가 존재한다.
전자는 일단 치면서 이기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고, 후자는 이긴 뒤에 치는 방법을 추구하는 걸 의미했다.
반드시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나, 기본적으로 검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향은 이긴 뒤에 칼을 내는 승타법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이긴 뒤에 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이 바로 ‘공세’였다.
공세란(攻勢), 내가 공격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대가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며, 그를 통해 상대의 자세를 무너뜨려 승기를 잡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가볍게 두드리고, 휘감고, 누르는 등의 행동에 다양한 의도를 불어 넣고, 상대의 반응을 보고 겨눔세를 무너뜨려 기술을 결정짓는 고도의 기술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공세는 어떤 공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순간의 기력에 따라, 온갖 조건들로 인해 달라지는 것이 바로 공세인 것이다.
그래서 공세는 공방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고절한 기술이었다.
성현은, 바로 그런 공세에 감히 통달했다 말해도 되는 유일무이한 인물이었고.
[차분하게 공세를 나누며 서로의 기회를 엿보는 이성현 선수와 강찬울 선수]
[으음···. 이건···.]
비단 공세에는 ‘칼끝으로의 공세’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단순히 가까이 다가서 거리를 좁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공세가 될 수 있는 법이므로.
검선은 물론이요, 내딛는 발, 굳건한 중심, 죽도를 쥐는 방법, 개인의 기백 같은 요소조차도 공세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성현을 보며 검도를 깊이 안 이들이 입을 다무는 건 그 때문이었다.
강한울을 압박해 들어가는 성현의 공세는 십수 년이 넘게 검도를 배운 이들조차 뜻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고절하였기에.
얼핏 보기에 성현과 강찬울 두 사람은 나름 대등한 것처럼도 보였다.
서로 죽도를 겨눈 채 기회를 찾는 듯했으니.
하지만 진짜배기 검도인들의 눈에는 보였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성현의 공세에 잡아먹혀 가고 있는 강찬울의 모습이.
죽도를 올리면 몸을 올려 누르고, 중심을 빼면 과감히 나아가며, 발악하듯 칼끝을 세우면 두드려 기세를 죽인다.
그것은 실로 늪, 아니 심해(深海)다.
강찬울은 깊고 깊은 바닷속에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절규를 내지르며 익사해가고 있다.
‘저게 겨우 고등학생이라고?’
‘나는 저 공세를 이겨낼 수 있을까.’
‘지금 나이에서도 저런 괴물이건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렵다.’
오싹함.
그리고, 두려움.
이 경기를 지켜보던 검도인들은 성현이라는 괴물에 대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고교 검도계에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실업 검도에서조차 그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지 의아할 지경인데, 어찌 고교 검도에서 그를 이겨낼 수 있으랴.
저건 그런 괴물이다.
지금 당장 실업 검도계에 진출해도 모든 걸 망가뜨릴 수 있는···.
꽈아악-
‘전보다 더 강해졌어.’
그러나 모두가 그런 감정만을 느낀 건 아니다.
성현이 보여주는 실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를 향한 투쟁심을 불태우는 이들은 분명히 있었으니.
대표적으로는 이 경기를 보며 눈을 빛내는 김규호 같은.
다음 상대가 성현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 절망이 아니라 오직 기회였을 뿐이다.
“크, 으아아앗-!”
모두를 일깨운 건 사나운 기부림이었다.
마치 울부짖는 것처럼도 들리는.
성현의 공세에 잡아먹히고 있던 강찬울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죽도를 내지른 거다.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다.
이대로 심해 깊은 곳에 가라앉아 패배를 맞이하느니, 뭐라도 해보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그게 통하지 않을 상대라는 것이 강찬울에게는 안타까울 따름.
[강찬울 선수, 머리 치기를 시도합니다]
[굉장히 무리한 공격입니다. 물론 강찬울 선수의 상황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
성현은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강찬울이 내지른 죽도를 바라보았다.
극도로 집중한 그의 눈에는 죽도가 움직이는 그 모든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고 있었다.
단호하게 그의 머리를 노리는 죽도.
발악하듯 내지른 격자임에도 묵직한 기세가 담겨 있는 데다가, 자세 또한 견고하니 칼끝에 어떠한 흔들림도 없다.
강찬울의 재능을 알 수 있는 훌륭한 검이었다.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한.
그렇다 해서 맞아준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성현이 차분하게 몸의 무게 중심을 낮추며 죽도를 들어 올렸다.
타-아-악-
강찬울의 죽도는 비스듬히 세운 성현의 죽도를 맞고 튕겨 나갔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집중한 성현에게는 죽도끼리 맞닿는 타격음조차 늘어진 테이프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상대의 공격을 막았으니, 기회를 쥔 건 이쪽.
완벽한 방어로 인해 무너져 버린 강찬울을 보며 성현은 곧 결정을 내렸다.
“하아아앗-!”
기부림을 내지르며 오른발을 강하게 구른다.
강찬울의 죽도를 막기 위해 비스듬히 세웠던 성현의 죽도는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내려온다.
자연스레 허리가 돌고, 칼이 휘돌며 힘이 실렸다.
노리는 곳은 허리!
내지르던 죽도가 막히며 자세가 무너진 이상, 강한울이 이 일격을 막아낼 방법은 없다.
승타법(勝打法).
이긴(勝) 뒤에 치는 것(打).
그것을 형상화하는 듯한 그림 같은 반격이었다.
타아악-!
“백색, 허리!”
[깔끔하게 들어가는 받아허리!]
[강찬울 선수가 공세로 압박당하는 걸 견뎌내지 못하고 나섰고, 이성현 선수는 그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내며 반격까지 성공시켰군요]
높이 들린 하얀 깃발과 주심의 구령.
득점을 올리고 차분하게 물러나는 성현을 보며 강찬울은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성현의 공세가 그만큼 대단한 까닭이었다.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보존하고 있던 모든 체력을 소모했을 정도로.
성현이 괴물이라는 건 강찬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괴물일 줄은···.
득점을 내준 받아 허리는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었다.
공세 싸움에서 느껴졌던 질식할 것 같은 절망.
제대로 손도 발도 쓰지 못했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유망주 검도 대회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그때도 높은 벽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절망과도 같은 암담함을 느끼진 않았으니까.
‘진짜 괴물이구나.’
성현의 별명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괴물인 이유를, 강찬울은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
“백색, 머리! 시합 끝!”
[이성현 선수가 완벽한 머리치기로 승리를 거머쥡니다. 이로써 5연승이군요!]
[장외 반칙과 이어진 득점으로 인해 강찬울 선수가 무너진 게 아쉽네요. 잘 추슬렀다면- 음- 그래도 어려웠을 것 같긴 합니다. 첫 번째 판의 공세를 생각해보면 말이죠]
두 번째 득점은 첫 번째보다 훨씬 빠르게 나왔다.
강찬울이 여러모로 한계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연달아 세 번을 경기하며 체력적으로도 그랬고,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마주하며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이른 것이다.
성현은 그렇게 생긴 틈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거침없이 몰아쳤고, 그대로 강찬울을 무너뜨리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승룡기 검도 대회에서의 5연승이었다.
‘그리고 이제 6연승을 할 차례지.’
[강찬울 선수가 내려가고, 새롭게 경기장에 나서는 건 김규호 선수입니다. 이 선수도 이성현 선수의 대항마 중 한 명이죠?]
[네, 그렇습니다. 현재 한국 고교 검도 개인전은 이성현 선수의 독주하는 가운데 백성호 선수와 김규호 선수를 필두로 한 다른 선수들이 쫓는 구도입니다. 충분히 대항마라 할 만하죠]
[본래는 백성호 선수와 라이벌 관계로 묶였었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작년 고교 검도계의 변화는 광천고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 있는 게 이성현 선수니까요. 하하]
성현은 당당하게 경기장 나서는 김규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로 직전 경기에서 두렵기까지 한 공세를 봤음에도 김규호의 표정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강렬한 투쟁심 외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오직 지금부터 있을 시합만을 머릿속에 두고 나머지를 깔끔히 지워버린 이만이 보이는 게 가능한 얼굴이었다.
‘멋진 표정이네.’
저런 표정을 짓고 있던 상대 중에서 성현을 실망하게 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성현은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아, 이번에는 어떤 수단을 준비했을까.’
성현이 김규호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그가 어떻게든 성현을 쓰러뜨리기 위해 노력과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재능으로 성현에게 도전해오는 백성호와는 달리, 김규호는 온갖 수단을 궁구하여 그를 꺾으려 들었다.
얼마 전에 있던 근간 싸움 또한 그랬다.
비록 그게 안 좋은 결말을 맞긴 했지만···.
그거야 성현이 의도치 않은 함정을 파놓았기 때문일 뿐, 김규호의 잘못은 아니었으니.
곧 성현과 김규호는 서로를 마주했다.
누구보다 앞에 선 자와 뒤를 쫓을 때 비로소 강해지는 자.
기묘하게도 얽혀 있는 이들이 시합을 준비했고, 중심에 섰던 심판이 그 시작을 알렸다.
“시작!”
대상단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