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14화 (114/150)

114화: 반칙

기회를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보다 어려운 건 얻은 기회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일이다.

지친 수민을 대신해 광천고 선봉으로 나가는 것이 결정된 은우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광천고의 16강 상대, 용암고 주전들이 맞은 편에서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니 비로소 첫 출전이 그에게 있어 현실이 된 까닭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출전 기회를 잡았다는 기쁨도 잠시였을 뿐.

현실을 자각한 은우에게 뒤늦게 닥쳐온 건 크나큰 걱정이었다.

자신이 여태 보아온 쟁쟁한 학생선수들을─심지어 나이도 더 많은!─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근심 말이다.

만약 여기서 허무하게 지기라도 한다면?

제대로 찍혀 다시는 기회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린 은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성현은 절대로 그런 성격이 아니었지만, 은우가 성현을 가까이서 본 건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에 불과했으니.

‘긴장된다.’

입안이 바싹 마를 정도!

중학교에 다니며 여러 대회를 나가 활약했을 때만 해도 이런 긴장감은 느껴본 적 없었건만, 지금은 거짓말처럼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겨우 손에 넣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이 정신을 바짝 조이고 있는 까닭이리라.

만약 일반적인 대회였다면 은우도 이토록 긴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대회가 어떤 대회인가.

한국과 일본, 두 국가가 손을 잡고 개최한 한일 합작 승룡기 검도 대회다.

그 안에는 서로를 가늠하고 넘어서려 하는 온갖 수작이 있지만, 그걸 참작해서도 대회의 위상이 어마어마한 건 변치 않는다.

이제까지 나간 가장 큰 대회가 전국 검도 대회 남중부인 은우에게는 중압감이 느껴질 수밖에.

심지어 16강에 올라섰다는 건 이미 두 개의 학교를 넘어선 강자라는 뜻!

첫 출전인 은우로서는 큰 부담이 되리라.

“···긴장돼?”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은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건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성현이었다.

“괜찮습니다!”하고 대답하려던 은우였지만, 곧 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긴장되네요.”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솔직하네?”

“거짓말은 별로 안 좋아해요. 그리고, 이제 와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실 거 같지가 않아서요.”

“하긴, 많이 티 나긴 했어.”

“그러니까 말을 걸었지.”라고 덧붙인 성현은 소리 내어 웃었다.

반면 은우는 자신이 그렇게 긴장한 티를 냈나 싶어─그것도 주장이 직접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얼마나 불안해 보였으면 직접 말을 걸어왔을까 싶었으니까.

가늘게 뜬 눈으로 은우를 보던 성현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마.”

“-네?”

“만약 은우 네게 실력이 없었다면 수민이를 빼고 너를 넣지 않았을 거야. 너는 충분히 이 대회에서 활약할 수 있어.”

“···선배님···.”

“긴장하지 말고 차분하게. 평소 실력만 낼 수 있으면 이길 수 있을 거야.”

만약 다른 사람이 그리 말했다면 입에 발린 말이라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성현이 하니 말에 담긴 무게가 남달랐다.

실제로 아무런 성적도 내지 못했던 수민을 발굴해 여기까지 키워낸 게 성현이라는 사실은 은우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수민이 틈만 나면 떠들어댄 까닭이다─.

이미 증명해낸 게 있다 보니 그저 응원하듯 던지는 조언조차 은우에게는 큰 힘이 됐다.

온몸을 옭아매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그걸 대신해 자신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졌으니···.

성현은 고작 몇 마디 말로 자신감을 되찾아준 것이다!

“어때, 할 수 있지?”

“네! 선배님!”

“좋아! 그럼 가서 네 실력을 보여줘!”

“네! 알겠습니다!”

활기찬 대답과 함께 경기장으로 나아가는 은우.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성현에게 다가온 건 대현이었다.

자연스레 성현과 어깨동무한 대현은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올- 후배 긴장 풀어주는 모습 봐라- 멋진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성현은 픽 웃었다.

폼으로 검도장을 몇십 년간 운영한 게 아니다.

그 뒤에는 천수아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긴 했지만, 그가 문하생들을 누구보다 잘 가르치지 않았다면 한국 최고의 검도장 소리를 듣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을 터.

일개 검도부에서 부원들을 북돋고 키워주는 것쯤이야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상대에게 그럴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전, 주장이니까요.”

“역시 주장님! 멋지십니다!”

“하하···.”

존댓말에 손뼉까지 치는 대현을 보며 성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농담은 여기까지.

슬슬 경기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 │ 광천고 │ 용암고

선봉 │ 김 은 우 │ 김 현 우

2 위 │ 손 대 현 │ 이 도 찬

중견 │ 최 영 준 │ 하 성 우

부장 │ 조 윤 호 │ 강 찬 울

주장 │ 이 성 현 │ 김 규 호

[16강 경기! 광천고 대 용암고! 선봉으로 나선 건 1학년 김은우 선수와 3학년 김현우 선수입니다]

[광천고는 좋은 활약을 펼치던 김수민 선수가 빠지고 1학년 후보 선수를 기용했군요. 아무래도 체력적인 문제 같습니다. 연달아 네 경기를 치렀던 게 독이 된 모양이군요]

[과연 김수민 선수를 대신해서 나온 김은우 선수가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을까요?]

성현이 직접 용기를 북돋아 준 덕분일까?

은우는 용암고의 선봉으로 나선 김현우를 상대로 계속해서 1대1을 유지한 끝에 연장전까지 갈 만큼 잘 싸웠다.

무척 아쉽게도 연장전으로 가서 먼저 득점을 빼앗기며 패배하기는 했지만, 1학년 대 3학년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2년, 그것도 한창 성장하고 있을 고등학교 시기의 세월을 넘어선 분투였다.

정작 은우 본인은 “···이길 수도 있었는데···!”라고 분한 마음을 드러냈지만.

[굉장히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현재 이 두 고교가 고교 검도계에서 뜨거운 라이벌 관계 중 하나거든요. 경기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손대현 선수의 득점! 김현우 선수를 꺾으며 광천고가 승리를 가져갑니다!]

은우와 접전을 펼치며 지친 김현우를 광천고 2위 대현이 잡아내고, 다시 그걸 용암고 2위 이도찬이 이겨내며 승리.

광천고의 에이스 후보였던 영준이 이도찬에 이어 하성우까지 잡아내며 2연승을 거뒀지만, 뒤에 나온 강찬울 또한 영준과 윤호를 연달아서 이기며 다시 2연승을 거두었다.

최종적으로 성현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용암고에 남은 인원은 두 명!

강찬울과 김규호였다.

가장 까다로운 두 사람이 남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강찬울이 이미 두 명을 상대하며 상당히 지친 상태라는 것 정도.

하지만 강찬울 본인도 그걸 깨닫고 있는지 무언가 굳게 결심한 표정이었다.

[32강에 이어서 16강도 광천고의 운명은 이성현 선수에게 맡겨졌습니다]

[으음, 이건······ 어떤 의미로는 32강보다 더한 위기이기도 하군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현재 이성현 선수는 네 번 연달아 경기하며 많이 지쳤을 테고, 강찬울 선수와 김규호 선수는 이성현 선수를 몇 번이나 상대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약점을 제대로 찌를 수 있는 이들이란 거죠]

[그렇군요. 송학림 해설의 말씀처럼 무적 같았던 이성현 선수를 강찬울 선수와 김규호 선수가 무너뜨릴 수 있을지 무척 기대됩니다!]

‘흐음?’

성현은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강찬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가진 바 재능과 오십 년의 검도 경험이 합쳐져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그의 ‘눈’에 강찬울의 의도가 훤히 읽혔기 때문이다.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 했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근육의 수축과 이완 정도, 미묘하게 달라진 자세, 이전과는 달리 뒤쪽으로 쏠린 무게 중심까지 거짓으로 꾸며낼 수는 없을 테니까.

‘최대한 버텨서 내 체력을 빼놓겠다는 건가.’

이해 못 할 선택은 아니었다.

강찬울은 앞서 영준과 윤호 두 명을 잡아내며 체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다.

지친 상태에서 성현을 상대로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 차라리 최대한 버텨가며 성현의 체력을 빼놓는 게 이득이라 보았으리라.

마지막 순서인 성현과는 달리, 강찬울에게는 뒤에 남은 김규호가 있었으니까.

앞선 시합에서의 4연승, 그리고 자신까지 상대해서 지친 성현이라면 김규호가 이겨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을 터.

‘자, 그럼 어떻게 할까.’

성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하나는 적당히 강찬울의 의도에 맞춰가며 체력을 비축해두는 것이다.

적당히 두들기기만 하면 알아서 몸을 사릴 테니 퍽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억지로 버티려 하는 강찬울을 빠르게 박살 내고, 남은 김규호마저 끌어내서 그 또한 박살 내버리는 거다.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으니까.

잠시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성현은, 곧 결정을 내렸다.

“─시작!”

‘참을 필요 없겠지.’

두 명 모두 박살을 내버리기로.

[드디어 이성현 선수와 강찬울 선수의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곧장 움직이지는 않네요. 아무래도 두 사람 다 체력적인 압박이 심한 탓일 듯합니다]

“······.”

“······.”

정적 속에서 이루어진 대치.

먼저 상대를 향해 나아간 건 성현이었다.

애초에 버티기만 하겠다고 뜻을 세운 강찬울이 먼저 나올 리가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성현은 묵직한 기세를 뿜어내며 발을 내디뎠다.

스윽-

기부림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언제라도 치고 들어갈 것처럼 상대를 압박하며 전진했을 뿐.

죽도를 밀어내며 다가서는 성현의 행동에 강찬울은 인상을 찌푸린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강찬울의 등으로 식은땀이 축축이 배어 나왔다.

단순히 가까이 다가오는 것인데도 남다른 위압감이 느껴진 탓이다.

마치 거대한 산이 가까워지는 것 같은.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산이.

···강찬울은 몰랐지만, 그건 일찍이 성현을 처음 상대했던 김규호의 감상과도 닮아 있었다.

[이성현 선수, 서서히 몰아붙입니다]

[상단세나 방어 능력에 묻혀서 그렇지, 공세가 남다른 선수거든요? 작정하고 몰아붙이니 강찬울 선수가 제대로 대처를 못 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서서히 밀고 들어오는 성현을 상대로 강찬울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물러서는 것뿐이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경고하듯이 성현의 죽도가 그의 죽도를 두들겼으니까.

그건 마치 강찬울에게 말하는 듯이 느껴졌다.

‘버티기만 한다며? 왜 나서려고 해?’라고.

물론 진짜로 그런 뜻은 아니었겠지만, 강찬울에게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한참을 성현에게 쫓겨 정신없이 물러나던 강찬울을 일깨운 건 갑작스레 울린 심판의 목소리였다.

“반칙!”

“···응?”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진 깃발의 색깔은 청색!

성현이 아니라, 강찬울을 의미하는 색이었다.

심판의 저 말과 행동인즉, 강찬울이 반칙을 범했다는 뜻이다.

“반칙이라니, 무슨···!”

말을 내뱉던 강찬울은 자신의 왼발이 선 바깥을 딛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현의 강렬한 위압감에 정신없이 물러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는 이미 경기장 끝까지 몰려 있었던 거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강찬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장외에 나갔다는 것조차 눈치 못 채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란 말인가.

[자신이 장외 반칙을 범했다는 걸 나중에서야 눈치챈 모습입니다, 강찬울 선수]

[이성현 선수가 묵직하게 밀어내면서 신경을 자신에게 집중시켰습니다. 죽도로 툭툭 두들기면서 정신을 빼놓은 거죠. 장외로 나간 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

호면 너머, 성현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것을 본 강찬울은 열이 훅 치솟는 걸 느꼈다.

도발이라는 걸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

지금이 바로 그랬다.

‘박살을 내버리겠어!’

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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