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머지않은 미래
“64강에서는 선봉이 3연승, 32강에서는 주장이 4연승이라···. 굉장히 재밌네요.”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말한 건 검도라이프 매거진의 기자, 권도연이었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경기를 마치고 퇴장하는 광천고 주전들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주장까지 몰려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역전승.
조마조마했던 만큼 기쁠 수밖에 없는 일이고, 그 때문에 광천고 주전들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좋은 얼굴이라 생각한 권도연이 카메라를 들어 올렸을 때,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남성─ ‘검맨’ 김동안이 말했다.
“세대교체가 그럭저럭 잘 되긴 했지만, 아직 불안한 면이 있어 보이는군요. 춘계 전국 대회 때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정철 선수의 빈 자리가 그리 쉽게 메워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찰칵.
“···그래도, 최소한 이번 대회에서는 질 것 같지가 않지만요.”
김동안은 과연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승룡기 검도 대회가 연승전 방식인 한, 광천고가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저 ‘괴물’이 당당히 마지막 자리를 지키고 있을진대 대체 누가 그를 꺾고 광천고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인가?
네 명이 덤벼들었던 야나기가우라 고교조차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정리되었는데 말이다.
‘파란의 64강, 위기의 32강···. 광천고는 역시 재밌는 기삿거리가 많다니까.’
권도연은 환히 웃는 광천고 주전들 사이, 비교적 담담한 얼굴의 성현을 확대했다.
홀로 판을 뒤집어엎은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유유자적한 표정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더욱 무시무시하게만 느껴졌다.
일본 3대 유망주 중 한 명을 포함한 야나기가우라 고교를 짓밟아버린 것마저 그에게는 별일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기에.
찰칵.
‘16강에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나···.’
“참, 그러고 보니 이제 두 명째네요.”
“두 명이요?”
“이성현 선수가 잡은 일본 3대 유망주요. 가토 카츠히토 선수랑 히라와타 신지 선수를 잡았으니 히사츠네 아츠시 선수만 남았잖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니 왠지 트로피라도 수집하는 것 같네요?”
카메라를 내린 권도연이 키득대며 웃었다.
하지만 김동안은 웃지 않았다.
대단히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을 뿐.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바뀔 세계 검도의 구도를 증명하는 트로피겠죠.”
“······세계 검도의 구도.”
“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앞으로 세계 검도는 많은 변화가 있을 겁니다. 늘 최강의 자리를 지키던 일본이 무너질 테니까요. 그리고 그걸 주도하는 건─”
“─한국이겠죠. 이성현 선수를 중심으로 한.”
그건 머지않은 미래였다.
올해로 이성현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
내년이면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내후년이면 졸업이라는 뜻.
고작 2년의 세월만 흐르면 고교 검도계에 머무르던 괴물이 그곳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그때 가장 먼저 한국 검도가 바뀌리라.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세계 검도 또한.
“거창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김동안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차분히 받아들이는 권도연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은 까닭이다.
세계 검도의 변화라느니, 일본이 무너진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얼핏 들으면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한 것들이었으므로.
검도라이프 매거진에서 기자로 일하며 검도계에 빠삭할 권도연이라면 자신은 생각이 다르다 고개를 가로저을 것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런 김동안의 의아함을 알아차린 것일까?
권도연이 쓰게 웃었다.
“저도 이성현 선수를 지켜봤으니까요. 저 괴물 같은 선수가 일 년 만에 이뤄낸 걸 보면 나중에 어떤 대단한 일을 벌일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러려니 하게 되거든요.”
“하하! 굉장히 공감되네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는 백성호 선수가 그런 사람이 될 거라고 봤거든요, 저. 한국 검도의 숙원을 이뤄줄 사람이 있다면 백성호 선수가 아닐까 하고 말이죠. 지금은 바뀌었지만.”
“이성현 선수로 말이죠?”
“네. 이성현 선수라면 한국 검도의 숙원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어요, 지금은.”
세계최강 일본을 넘어서는 것.
한국 검도는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염원해왔다.
비단 그건 실제로 검도를 하는 이들이나 검도 관련업에 종사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검도를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그러했으리라.
그리고 한때 사람들은 그 숙원을 이루어낼 희망을 ‘천재’ 백성호에게서 찾았었다.
어렸을 적부터 싹을 보였고, 고등학교에 올라서도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았기에.
······어디까지나 한때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천재’를 뛰어넘는 ‘괴물’─ 이성현이 몸을 일으킨 뒤니까.
권도연의 생각이 바뀐 것도 이성현이라는 소년을 본 뒤부터다.
한국 검도의 숙원을 이룰 이는 백성호가 아니라, 이성현이라고, 그렇게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그의 실력을 한 번이라도 직접 목격한다면 바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고교 검도 선수들이 실업으로 나아가는 때. 전 그때가 분명 한국 검도의 황금 세대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황금 세대.
스포츠에서 뛰어난 선수들이 동시대에 여러 명 배출될 때 쓰는 단어.
이성현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한국 고교 검도를 표현하는 가장 완벽한 단어이기도 했다.
그만큼 유망주들이 넘쳐났으니까.
가장 앞에 선 이성현은 말할 것도 없고, 한발 먼저 대학 검도로 나아간 정철, 어려서부터 주목받던 백성호, 오싹한 집념의 김규호까지.
어디 그뿐이랴?
최영준, 강찬울, 백지호 등 앞서 언급한 것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어찌 이리 다 몰려 태어났나 싶을 만큼.
‘심지어 여자 검도도 그래.’
비단 남자 검도뿐만이 아니다.
임하윤으로 대표되는 여자 검도 또한 강수연, 백라윤, 이채원 등 쟁쟁한 인물로 가득했다.
특히 요즘에는 임하윤과 강수연 두 사람의 같은 학교지만 치열한 경쟁 구도가 여자 고교 검도의 세일즈 포인트일 정도였다.
‘지금의 인기가 만들어진 데는 이런 황금기가 큰 영향을 끼쳤겠지.’
임하윤과 백성호가 유망주 검도 대회를 통해 등장한 재작년부터 이성현이라는 괴물이 휩쓴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한국 고교 검도의 인기는 꾸준히 상승했다.
한 명만 있어도 스타가 될 수 있는 유망주들이 여럿이다 보니 검도를 몰랐던 이들조차 흥미진진하게 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언더키의 지원으로 늘어난 인기와 버금간다던가.
물론 그건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말해질 만큼 고교 검도, 넘어서는 한국 검도에 대한 인기가 폭증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기대되네요. 무척.”
“네. 정말로.”
*
“16강에서는 출전 명단을 좀 바꾸겠습니다.”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성현이 가장 먼저 말한 건 이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광천고 주전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후보로 나온 1학년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미한 기쁨이 어렸다.
출전 명단을 바꾼다는 건 지금의 주전을 잠시 뺀다는 뜻이고, 그건 후보들이 나설 기회라는 뜻이었으니까.
“출전 명단을?”
대현이 물었다.
“네.”
“···좋아. 어떻게 바꿀 건데?”
“선봉 교체입니다. 수민이를 잠시 빼겠습니다.”
“-나를?”
성현의 말에 수민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왜 나를 빼려는 거야?’라고 눈으로 묻는 수민에게 성현이 돌려준 건 아리송한 행동이었다.
“내 손 잡아 봐.”
“으, 응···.”
수민은 성현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두 손으로 감싸는 것처럼 공손하게.
어쩐지 그가 성현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같은 학년임에도 지극히 저자세로 손을 맞잡는 수민을 보며 광천고 3학년 트리오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고, 한 손으로 악수하듯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은 성현이 말했다.
그제야 수민이 악수하듯 손을 쥐었다.
“이렇게?”
“그 상태로 힘줘봐.”
꽈악-
“더, 강하게. 지금 낼 수 있는 최대한으로.”
“이, 이게 최대인데?”
“······역시.”
성현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32강에서 수민이 무너져 내린 이유 중 하나가 그가 생각했던 대로였기 때문이다.
주전이라는 사실이 기뻤기 때문에 본인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현재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였다.
하기야, 64강에서 3연승을 했다는 건, 자신이 패배한 경기까지 무려 네 경기를 연달아 치렀다는 이야기다.
안 지치려야 안 지칠 수가 없다는 거다.
당장 손아귀 힘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건 그것의 반증이었다.
‘좀 더 경험이 쌓이면 유연한 경기 운영으로 체력을 비축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이제 막 주전에 합류한 수민이다.
그런 그에게 체력 비축까지 바라는 건 너무 가혹한 요구라는 걸 성현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손 놔도 돼.”
“아, 응!”
“수민이 너도 이제 눈치챈 모양인데, 지금 너 많이 지쳐있어. 손아귀 힘도 많이 빠졌고.”
“아···.”
“64강에서 거하게 날뛰었기 때문이겠지. 그거 회복될 때까지 잠시 쉬는 거야.”
“하, 하지만···!”
“수민아.”
성현이 나직하게 수민을 불렀다.
그에 반사적으로 수민이 입을 다물었다.
합숙 훈련 당시, 그를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며 성현이 들려준 적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성현은 그에게 호된 질책을 가했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며 저절로 몸이 반응한 거다.
단 한마디의 말로 수민의 입을 틀어막아 버린 성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리하지 말자. 두 경기만 쉬면서 몸 좀 추스르고, 4강부터 다시 출전하면 되니까.”
“······.”
“설마 우리가 그 전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냐! 절대로 아냐! 나, 난 그냥-”
수민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성현을 비롯한 광천고 주전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차렸다.
이제 겨우 ‘주전’이라는 같은 선상에 섰는데, 두 번의 경기 만에 물러나려는 게 아쉬웠으리라.
비록 그게 체력 회복을 위해서일 뿐이더라도.
성현은 격려하듯 수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마. 16강이랑 8강만 쉬고, 4강 때부터는 다시 네 힘이 필요하니까.”
확고한 주전은 너라는 뜻이 담긴 응원.
성현의 그 말이 힘이 됐는지 어두웠던 수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광천고 주전들은 그게 주전 자리를 보장해주는 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수민은 주전 자리 보장과는 별개로 성현에게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즉 인정받았음에 기뻤을 뿐이기에.
“응, 알았어. 쉬면서 체력 좀 회복할게!”
“좋아. 그럼-”
성현이 다음으로 바라본 건 후보로 나온 1학년생들, 은우와 서준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두 사람은 성현의 시선이 닿자, 바짝 긴장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수민이는 16강이랑 8강 두 번 쉴 거야. 너희 두 사람 모두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뜻이지.”
“······!”
“먼저 나가고 싶은 사람 있어?”
“선배님이 정해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은우와 서준.
한치의 과장도 없는 진심이었다.
시합에 나가기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던 그들이기에 순서는 아무래도 좋았던 거다.
그런 걸 욕심낼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니.
“흐음.”
성현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두 사람 중 누구를 먼저 내보내는가.
잠시 생각하던 그가 바라본 건, 밝고 활기찬 표정의 소년, 은우였다.
“은우. 네가 16강에서 선봉으로 나간다.”
“네, 알겠습니다!”
“서준이 너는 8강이니까, 지금부터 긴장하면서 준비하고 있어.”
“네, 선배님!”
두 사람의 차례를 정한 성현이 한 차례 광천고 주전들을 쭉 둘러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 시선을 맞추듯이.
그건 이전 광천고의 주장, 정철이 자주 했던 행동이었고, 그걸 깨달은 3학년 트리오는 긴장이 풀린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성현이 바랐던 대로.
“이대로 우승까지 가죠. 광천고 파이팅!”
““광천고 파이팅!””
한마음 한뜻으로 외친 구호.
그건 광천고 검도부가 얼마나 강하게 뭉쳐 있는지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반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