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Win-Win
*
‘건방진 놈.’
히라와타 신지는 경기장에 우뚝 선 성현을 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자신들을 오시하는 저 모습을 보라.
이 얼마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인가?
어쩌다 한번, 운 좋게 세계최강 일본을 상대로 이긴 것 가지고 뻐겨대는 꼴이라니!
그가 보기에 성현의 행동은 제13회 검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일본이 미국에 ‘실수’로 패배한 틈을 타 우승하고 세계최강이라 날뛰던 한국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금방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고 오만방자하게 군다는 뜻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히라와타 신지의 머릿속에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성현은 다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나기가우라 고교 측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 모습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제법 오만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간에.
‘짓밟아주지.’
꽈악.
호면의 끈을 강하게 잡아당겨 묶은 히라와타 신지가 죽도를 집어 들었다.
길고 짧은 두 자루의 죽도.
왼손에는 대도를, 오른손에는 소도를 한 자루씩 들고 나니 거칠어졌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타고난 성정이 사납건 말건, 죽도를 든 상태에서는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이 그의 몸을 지배한 까닭이리라.
하지만 그것이 마음속 분노가 사라졌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저 안으로 갈무리 되었을 뿐, 성현을 향한 그의 분노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무사시! 무사시! 무사시!””
일본에서부터 원정을 온 응원단이 히라와타 신지의 별명을 소리높여 불렀다.
공공의 적, 이성현을 히라와타 신지가 박살 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의지가 담긴 외침이었다.
“후우우···.”
히라와타 신지는 ‘무사시의 환생’이라는 별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혐오했다.
최강의 검호라 불리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허구라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
그런 가짜에 빗대어 지어진 별명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으랴.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놈에게만큼은···! 미야모토 무사시가 되어주마!’
오늘만은 그 별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두 자루 검을 쥔 채 일본 최강의 검호 자리에 올랐던 이의 환생답게, 저 건방진 자식에게 이도의 공포를 뼛속 깊이 새겨주리라.
두 자루 죽도가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강함을 느끼고 좌절하도록, 그리하여 비로소 일본의 진정한 강함을 깨닫게 할 것이다!
‘그리고 백성호, 그놈까지!’
눈을 부릅뜬 히라와타 신지가 경기장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
[광천고의 주장, 이성현 선수 대 야나기가우라 고교의 중견, 히라와타 신지 선수의 경기입니다. 물론, 순서만 그럴 뿐, 사실상 각 고교 주장들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맞습니다. 과연 어느 선수가 이길지 무척 기대됩니다]
[이성현 선수가 전 경기와 같은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줄지, 아니면 히라와타 선수가 마지막 저항을 끊어내고 다음 경기 진출권을 손에 쥘지! 기대되는 경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기장 안에서 대치하는 두 선수.
작년 돌풍을 일으키며 한국을 대표하는 유망주─비단 자국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그렇다! 이 또한 국가 교류전의 영향이었다─가 된 성현과 일본 3대 유망주 중 한 명인 ‘무사시의 환생’ 히라와타 신지였다.
시작 선 앞에 선 채 겨눔세를 취한 그들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심판이 구령이 내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이라는 두 글자가 귓가에 들리는 그 순간,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서.
그리고 곧, 개시의 구령이 울려 퍼졌다.
“─시작!”
[시합이 시작됐습니다. 일단 두 선수 모두 조용히 대치하고 있는데요. 경기 흐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이라 보십니까?]
[아무래도 이도를 사용하는 히라와타 선수의 방어를 이성현 선수가 뚫어내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무승부만 내도 야나기가우라 고교의 승리가 확정되기 때문에···.
중계진들의 해설이 이어지는 가운데.
성현은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 히라와타 신지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사시의 환생’, 히라와타 신지.
‘전’에도 몇 번 맞붙어 본 적 있는 상대였다.
이도의 상징과 같은 무사시가 되살아났다고 말해질 만한 실력이 있는 선수였고, 당시에는 제법 고전했던 기억도 있었다.
이기기야 당연히 이겼지만, 여하튼.
중요한 건, 성현이 히라와타 신지의 완성형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전’에 만났던 삼십 대의 원숙해진 히라와타 신지에 비하면 지금의 히라와타 신지는 어설프기 그지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지난 번 국가 교류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절차탁마한 게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뿐.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단숨에 따라잡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하였으니.
‘약점도 그대로려나.’
만약 그렇다면 이건 좋은 기회가 되리라.
제대로 된 새싹밟기를 할 수 있는.
지금의 대련을 통해 약점을 고치고 온 히라와타 신지의 모습을 떠올린 성현이 비죽 웃었다.
히라와타 신지는 몰랐던 약점을 고쳐서 좋고, 성현은 그로 인해 ‘전’보다 강해진 히라와타 신지를 밟고 올라설 수 있어서 좋고.
참으로 서로에게 Win-Win이지 않은가.
물론, 히라와타 신지는 그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겠지만!
‘가볼까.’
툭! 툭-
[이성현 선수, 히라와타 선수의 소도를 두드리며 공세를 겁니다. 전 경기와는 달리 굉장히 신중한 움직임인데요]
[아무래도 히라와타 선수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 3대 유망주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거든요?]
성현은 마치 천천히 시동을 걸 듯이 가볍게 소도를 두들겼다.
딱히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는 공세였다.
치고 나오기 위해 기회를 잡기보다는, 상대의 반응을 보려 하는.
히라와타 신지는 단숨에 그 점을 파악했고, 정보를 내주지 않기 위해 그저 소도를 단호히 세우는 것으로 대처를 끝냈다.
깔짝거리는 게 거슬린다 해서 치고 나갈 만큼 멍청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하나 그는 몰랐다.
그것이야말로 성현이 바라던 행동이라는 사실을.
‘그대로네.’
견제하듯 내찌르는 상태에서 머리를 치켜드는 모습으로 바뀐 소도를 본 성현의 눈이 빛났다.
히라와타 신지의 약점은 소도에 대한 공세에 무덤덤하다는 점이다.
이도니까 뒤에 대도를 내서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그는 소도를 향해 거는 공세를 대부분 수비적으로만 받아들였다.
사실 이는 약점이라고 할 것까지도 아니지만, 그걸 이용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 히라와타 신지의 상대가 된 성현처럼.
툭, 툭, 툭-
연달아 이어지는 가벼운 건드림.
위에서, 아래에서, 위에서, 옆, 다시 위.
성질을 자극하려는 듯 툭툭 건드리는 공세에 히라와타 신지가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그 순간.
투욱-
위를 잡고 있던 성현의 죽도가 히라와타 신지의 소도를 강하게 눌렀다.
소도를 이리저리 두드린 건 성질을 돋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러한 의도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소도를 내리누르는 이성현 선수!]
[히라와타 선수의 자세가 흐트러졌습니다!]
‘아차!’
그것을 깨달은 히라와타 신지의 얼굴에 뒤늦게 낭패의 빛이 서렸다.
하지만 그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자신이 괜히 일본 3대 유망주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듯, 그는 빠르게 판단을 내려 왼손의 대도를 성현의 머리를 향해 내질렀다.
구도를 뒤바꾸어 소도를 상대를 끌어들이는 미끼로 삼은 셈이다.
실수를 완벽히 보완해내는 한 수!
“크아아압!”
‘이걸로 잡아낸다!’
[어엇, 히라와타 선수 반격합니다! 대도를 내질러 이성현 선수의 머리를 노리는데요!]
[위험합니다! 만약 무게 중심이 앞에 쏠려 있다면 이 반격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상대가 어지간한 이였다면 역으로 치고 들어오는 이번 수에 꼼짝없이 당했으리라.
어지간한 이였다면··· 말이다.
히라와타 신지의 불행은 단 하나.
그의 앞에 선 이가 시간을 되돌아온 괴물, 이성현이라는 점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쇄도하는 죽도.
성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뒤로 빼냈다.
아무런 거리낌 없는, 지극히 수월한 회피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소도를 누르기만 하고, 그걸 기회 삼아 달려들 생각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왜냐하면, 히라와타 신지가 반격할 것조차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후웅-
‘피했-다고?!’
히라와타 신지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분명 소도를 내리눌렀을 때만 해도 기회였는데, 어찌 반격할 걸 알고 빠진단 말인가?
당황하여 상대의 얼굴을 바라본 히라와타 신지는 오싹하고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동자.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은 눈이 그를 고고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천한 것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준엄한 신처럼.
“하아아앗-!”
과감한 기부림, 더해서 휘둘러지는 일검!
성현의 죽도가 날카롭게 휘어지며 훤히 드러난 손목을 노렸다.
반격이 실패하며 자세가 흐트러진 히라와타 신지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타아악!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진 뒤, 주심이 하얀 깃발을 번쩍 들며 성현의 모두에게 승리를 알렸다.
한국인 관람객이 환호하고 일본인 관람객은 고개를 떨구며 체육관 안에서 희비가 교차했다.
승패 이전에 두 선수에게는 각국의 자존심이 걸려 있기도 했으니.
[이건··· 이성현 선수가 완벽히 설계했네요]
[설계하셨다 하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성현 선수가 원하는 대로 시합이 진행되었다는 뜻입니다. 소도에 공세를 걸고, 그걸로 대도를 끌어내고, 피한 뒤 반격까지···. 지금 히라와타 선수는 굉장히 당황스러울 겁니다. 마음이라도 읽힌 거 같을 테니까요]
[과연. 이번 판은 이성현 선수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
성현은 느긋하게 히라와타 신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왜 이렇게 무력하게 당했는지를 붉어진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다.
하나 어찌 이 짧은 시간에 단순한 버릇 하나가 자신을 패배로 몰고 갔음을 알 수 있겠는가.
차후 오랜 시간을 들여 이번 시합을 복기하고 나서야 자신의 숨겨진 약점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두 판째가 시작하기 전까지도 히라와타 신지는 답을 찾아낸 표정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 성현의 설계가 또 한 번 제대로 먹혔다는 걸 의미했다.
“백색, 머리! 시합 끝!”
[결국, 이성현 선수가 히라와타 선수를 제압하고 승리를 가져갑니다! 이로써 2연승!]
[아직 야나기가우라 고교에는 부장과 주장이 남아 있긴 하지만··· 글쎄요. 히라와타 선수마저 무너진 마당에 그들이 과연 이성현 선수를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설마 했던 4연승인가요, 이성현 선수! 정말 한국 최강의 유망주답습니다!]
‘한국 유망주 대표 대 일본 유망주 대표’로 이야기되던 이성현과 히라와타 신지의 시합.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시합에 치열함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실력 차이만이 있었을 뿐.
이성현은 관객 모두의 앞에서 히라와타 신지를 박살 내다시피 했다.
국가 교류전에서 다른 일본 3대 유망주인 가토 카츠히토를 박살 냈던 그때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야나기가우라 고교의 최대 전력이 무너졌을 때, 지켜보던 모두가 알았다.
광천고는 결국 16강에 진출하리라고.
앞으로 남아있던 이들이 몇이 있던 간에.
그 바람대로 성현은 야나기가우라 고교의 부장과 주장을 겨우 38초 만에 연달아 쓰러뜨렸고, 32강 시합은 그대로 끝났다.
성현의 4연승만을 남긴 채로···.
머지않은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