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11화 (111/150)

111화: 다음!

광천고 대 야나기가우라 고교.

32강 첫 번째 경기이자, 한국 대표 유망주 대 일본 대표 유망주─이쪽은 세 명이나 되지만!─의 대결이 성사된 경기는 안타깝게도 시종일관 야나기가우라 고교가 원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출전 순서의 문제라기보다는, 광천고가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에 가까웠다.

64강에서 파죽지세로 3연승을 달성한 선봉, 수민조차 한 사람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아무리 잘할 때와 못할 때의 기복이 심하다고 해도 전 판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과였는데, 이는 야나기가우라 고교의 선봉, 아리미츠 키요타다가 흔치 않은 이도 사용자라는 점 때문이었다.

첫 경기에서 미친 듯이 날뛴 것의 반동이라도 오듯 떨어진 기복에 이도라는 낯선 겨눔세─이도를 겨눔세 중 하나로 취급해야 하는지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여하튼─까지 겹쳐진 결과, 그대로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다.

차후 더 경험이 쌓이면 이런 일도 줄어들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현도 그걸 각오하고 선봉에 수민을 세운 것이었으니.

처음 보는 이도에 당황한 건 2위로 나선 대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 고교 검도에서는 아예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이도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특기로 삼은 타돌이 반격당하며 패배했다.

수비에 특화된 이도에게 타돌은 되려 좋은 먹잇감이었기에.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대현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공격에 나섰으나, 이미 득점을 올리고 방어를 굳힌 이도를 대처법도 모르는 그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광천고의 2위까지 그리 무너졌다.

그나마 중견으로 나선 영준이 상대 선봉을 쓰러뜨리고 1승을 올리며 기세를 이쪽으로 끌어들이는가 했으나, 히치 유노를 상대로 1점을 빼앗긴 채 아슬아슬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겨야 겨우 본전이라 할 수 있는 영준과 자신이 패배해도 뒤에 3대 유망주 중 하나가 있어 마음이 편했던 히치 유노!

시합이 갈린 건 두 사람의 마음가짐이었다.

절박함은 큰 힘이 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독이 되니까.

이번에도 그랬을 뿐.

그렇게 1승을 거둔 채, 성현을 제외하면 광천고 최대 저력이라 할 수 있는 중견마저 패배!

이런 상황에서 부장으로 나선 윤호가 패배한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상대 중견이자 최대 전력인 히라와타 신지가 나서기 전에 이쪽의 중견까지 쓰러졌다는 건, 기세가 완전히 야나기가우라 고교 쪽으로 넘어갔다는 뜻이니까.

지금 같은 안 좋은 흐름을 끊어내고 새롭게 기세를 끌어올리는 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무리다.

윤호가 작년에 빠르게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광천고는 주장 순서를 제외하면 모두 패배하게 된 것이다.

5인 단체전이 무시무시한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밀린다- 라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는 것.

만약 연승전 방식의 대회가 아니었다면 앞서 중견까지 패배했을 때 시합은 그대로 끝났으리라.

“4명이나 남은 상태로 주장 순서라니.”

“상대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어. 그러면 안 됐는데. 젠장-”

“1승이라도 더 올렸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승리를 내준 광천고 주전들은 죽을상을 한 채 성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승리를 위해서는 성현이 야나기가우라 고교의 네 명을 연달아 이기는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더욱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자신들이 조금만 더 잘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이겼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테니까.

그러지 못했다는 게 그저 이를 악물게 만들 따름.

뒤늦은 후회임을 알지만, 그들은 ‘더 잘했어야 했는데.’하고 자신을 자책했다.

물론 그들은 성현이 대단하다는 걸 안다.

대련할 때면 늘 몇 사람을 연달아 상대하는 괴물이 바로 성현이니까.

그러나 대련과 시합은 명백히 다르다.

정신이 깎여나가는 것도, 체력이 소모되는 것도 압도적으로 시합이 더 크다.

아무리 성현이 대련에서 몇 사람을 연달아서 이기며 날아다닌다 한들, 시합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줄지는 의문이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설령 이긴다 해도 자신들의 잘못으로 성현에게 부담을 지웠으니 표정이 안 좋을 수밖에.

‘네 명이라.’

하지만 성현은 남아있는 상대의 숫자에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64강에서는 그가 나설 필요도 없이 경기가 끝났으니, 그때 못 올린 승리까지 전부 끌어다 올린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니.

안 그래도 한 경기를 쉬며 연승 기록을 얼마 못 쌓을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거라면 그럭저럭 10연승은 가능할 테니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성현아···.”

“괜히 마음 쓰지 마시고, 다음 경기 준비하고 계세요. 16강 때는 좋은 모습 보여줘야죠.”

16강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성현의 그 말에 죽을상이던 광천고 주전들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어렸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번 경기를 이기고 다음 경기에 진출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네 명이나 이겨야 하는 상황이건만, 성현의 태도는 이미 승리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수민이 너도.”

“···으, 응?”

“너무 축 처져 있지 마. 64강에서 3명이나 이겨놓고, 이번에 한 번 진 거로 뭘 그리 시무룩해 있어. 다음 경기에 잘하면 되지.”

“···응! 다음 경기에! 알았어!”

의기소침한 주전들을 달래준 성현은 호면을 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는 이미 경기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

언제까지고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애초에 시간제한도 있다─ 인제 그만 경기에 나가야 할 때였다.

“이성현 나왔다!”

“드디어···.”

“앞으로 네 명, 가능할까?”

걸어 나오는 성현을 보며 주위가 술렁였다.

관람석의 관객들은 물론이요, 상대 팀 진영의 선수들마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

하기야, 64강은 그가 나설 필요조차 없이 끝났으니, 이번 승룡기 검도 대회에서 성현이 시합에 나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심지어 앞으로 네 명을 연달아 쓰러뜨려야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으니.

눈이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었다!

성현은 그 모든 이들의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 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웃는 건 자신을 바라보는 야나기가우라 고교 2위의 시선이 제법 따끔한 까닭이었으니까.

투지로 불타오르는 시선.

참 마음에 드는 눈빛이 아닌가?

아마 광천고 주전들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는 이렇듯 사나운 의지이리라.

‘다음에 좀 더 자극해볼까.’

무심코 성현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 야나기가우라 고교를 비롯해 일본 고교 검도 선수들이 그를 이렇듯 공공의 적 삼아 노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작년에 있었던 국가 교류전, 그때의 도발 때문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좀 더 자극한다면, 더 좋은 반응이 돌아오리라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걸 진짜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쳐두고.

물론, 성현이라면 그게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망설임 없이 지르겠지만 말이다!

“인사!”

상대, 히치 유노와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선 성현이 심판의 구령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

히치 유노 또한 마찬가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든 인사는 해야 했다.

예를 중요시하는 무도인 검도에서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기에.

그렇게 인사가 끝나고.

성현과 히치 유노는 자신의 죽도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 모두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중단세였다.

“이번에는 중단세로 시작하려는 건가?”

“으음- 아무래도 상단세는 안정성이 떨어지니까 그런 걸 수도···. 네 명이나 상대해야 하니 나쁘지 않은 판단인 것 같은데.”

“반대로 상단세로 빠르게 끝내면서 체력을 남겨 두는 게 좋지 않으려나.”

성현의 겨눔세를 보고 관객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중단세와 상단세 모두 수준급으로 다루는 성현이지만, 일단 그의 상징과도 같은 자세는 상단세였기 때문이다.

가장 임팩트 사용한 자세이기도 하고, 전력을 다한다는 느낌이 들 때면 늘 상단세였으니까.

아니, 사실 다 핑계일 뿐이다.

관객들은 그저 아쉬워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성현의 상단세를 볼 수 없다는 것에.

왜냐하면, 성현의 상단세에는 중단세와는 다른 로망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앞에 있는 적을 불태우며 나아가는, 맹렬한 불꽃의 로망이.

“-시작.”

어찌되었든 두 사람의 준비는 끝났다.

심판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뒤, 단호한 목소리로 시합의 개시를 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면을 박찬 성현의 몸이 쏘아진 화살처럼 나아갔다.

아무런 기부림도 없이, 다만 고요하게.

“─읏?!”

개전과 동시에 이루어진 타돌.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히치 유노가 당황하며 죽도를 들어 올리려 했으나, ‘당황했다’라는 것 자체가 이미 기회를 넘긴 거나 다름없었다.

본래 검도의 격자 기회 중 하나가 바로 ‘상대가 동요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심지어 당황은 검도의 사계(四戒), 경계해야 할 네 가지 마음 중 하나!

만약 성현이라는 상대를 맞이한 히치 유노의 마음이 좀 더 평온했다면 이렇듯 허를 찔릴 일은 없었겠으나, 그게 가능했다면 히치 유노는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으리라···.

타악!

죽도가 순식간에 손목에 내리꽂혔다.

히치 유노가 다소나마 팔을 든 덕에 득점으로 인정될 격자는 아니었으나, 애초에 성현은 이걸로 득점하려 했던 게 아니다.

그건 기부림을 아직도 기부림을 내지르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이건 그저 다음 공격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성현도, 그리고 히치 유노도 그걸 알았다.

‘젠-장! 어떻게든 대응해야-!’

이를 악문 히치 유노가 머리로 이어질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손목을 제대로 격타당한 통증이 없을 리가 없다.

저릿해진 팔은 곧장 그의 의지에 따르지 못했다.

성현이 노렸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고!

눈을 번뜩인 성현의 입에서 비로소 강렬한 기부림이 토해졌다.

“하아아앗-!”

타아악-!

경기장에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격타음.

당한 장본인인 히치 유노마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득점이었다.

성현이 존심을 유지하며 뒤로 물러서자, 심판이 “백색, 머리!”라고 외치며 성현을 상징하는 하얀 깃발을 높이 들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고작 몇 초 만에 득점을 얻어낸 것이다!

““와아아아-!””

“이성현 파이팅-!”

“충분히 이길 수 있어! 해볼 만해!”

“포기하지 마!”

앞으로 네 명이나 되는 상대를 이겨야 하는 상황에 반쯤 포기했던 관객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성현이 보여준 경쾌한 일격은 체육관 내부에 내려앉아 있던 암울함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아직 광천고는 지지 않았다는 걸, 성현이라는 괴물이 남았다는 걸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제엔자앙-”

상대에게 움츠러든 탓에 단숨에 1점을 빼앗긴 히치 유노가 이를 갈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점수를 빼앗기다니!

득점을 빼앗겼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은연중에 겁먹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는 못내 분했다.

두 번째 판에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지금과 같은 일이 없어야 하리라!

하지만.

그게 어디 원한다고 되는 일이던가?

성현이라는 괴물을 상대로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면, 히치 유노 또한 괴물이라 불렸을 터···.

‘미안하지만.’

타아악!

‘앞으로 세 명을 더 잡아야 해서, 놀아줄 시간이 없어.’

성현이 첫 경기를 2득점으로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십 초 남짓!

다소 과장 좀 보태면, 경기 전에 선수들끼리 나눈 인사가 경기 시간보다 더 길 지경이었다.

첫 번째 승리에서부터 물씬 풍기는 파란의 향기에 관객들은 주먹을 꽉 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세 명을 연달아 이기는 일.

그건 정말이지, 성현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에.

‘······.’

홀로 당당히 경기장에 선 성현은 야나기가우라 고교 선수들이 있는 쪽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다음!’이라 외치는 의지를 읽어낸 건, 비단 관객뿐만이 아니었으리라.

Win-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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