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눈먼 불꽃
이유는 간단했다.
선봉 순서로 출전한 광천고의 김수민과 호쿠토 고교의 타카바타 코가가 취한 겨눔세가 기묘하게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단지 겨눔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반응이 나올 리는 없었다.
현재 검도계의 주류는 단연코 중단세이고, 그러다 보니 크지 않은 대회에서 전원이 같은 겨눔세를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하자면, 중단세 말고 다른 자세가 그만큼 비주류라는 뜻이기도 했다.
한 대회에 한 명만 있어도 많은 편이다.
그렇게 말해질 만큼.
···지금은 썩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두 선수가 모두 상단세라. 이건 또 굉장히 드문 경우군요.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과거 상단세와 이도 한정으로 가슴 찌르기가 인정되던 규정으로 인해 중단세 이외의 겨눔세가 크게 줄었죠. 그 후로 이렇듯 두 선수가 모두 상단세를 취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광경입니다.”
손지찬 캐스터의 감탄에 송학림 교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보탰다.
중계진의 대화처럼 현재 김수민과 타카바타 코가 두 사람은 모두 상단세를 취하고 있었다.
지난 일 년간 성현이 본 상단세가 손에 꼽을 정도이며, 그들 모두 퍽 훌륭하지 못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걸 고려해보면─백성호는 예외로 두고─ 상당히 의외인 장면이었다.
중계진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타카바타 코가 선수야 그렇다 쳐도, 자료에 따르면 김수민 선수는 출전했던 대회들에서 중단세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상단세라니···.”
“음- 아무래도 이번 대회에서 선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한 무기가 아니겠습니까? 마침 같은 팀에 상단세로 고교 최강의 별명을 얻은 이성현 선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성현 선수에게 배운 상단세라- 하하! 굉장히 기대되는군요!”
중계진들은 애써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 속에 숨겨진 뜻은 명확했다.
김수민이 상단세를 취한 것에 대한 의혹!
검도에서 겨눔세란 모든 동작의 기본이고, 시작이며, 종결이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겨눔세를 취했다가, 기술을 내고, 다시 겨눔세로 돌아오는 게 검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만큼 겨눔세라는 건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법이었다.
설령 바꾼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실전에서도 써가면서 바꿀 터.
지난 대회까지만 해도 중단세를 쓰다가, 이번 대회에 갑작스럽게 상단세를 쓴다는 기이한 행동은 당연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하지만 중계진들이 그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이번 경기가 한일전이라는 점.
‘한일전에서 괜한 소리 할 수는 없지.’
‘회의할 때 한국 선수들에게는 좀 더 너그럽게 해설을 해도 된다고 했으니···.’
가위바위보도 패배해서는 안 되는 한일전.
거기에 수민이 자국 선수라는 점까지 더해보면, 중계진들이 한국 선수들에게 좀 더 너그러운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같은 팀에 성현이 있다는 것이었다.
‘유망주 대회에서 중단세로 이겨나가다가, 결승에서야 상단세를 꺼낸 게 이성현 선수다.’
‘그런 선수한테 배웠으면 뭔가 다를 수도 있으니, 섣부른 추측으로 안 좋은 소리를 할 수는 없어.’
성현은 갑작스러운 겨눔세 변화로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런 그에게 배웠다면, 당연히 수민의 상단세 또한 다른 이들과는 남다른 면이 있을 터!
따라서 섣부르게 이러니저러니 말했다가, 수민이 덜컥 압도적으로 이겨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분명 계속해서 안 좋은 이야기가 따라붙으리라.
상단세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건 시합이 끝나고 조심스럽게 해도 늦지 않다.
그게 중계진들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준비되지 않은 이를 내보낼 성현이 아니기에.
“후우우···.”
상단세를 취한 수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모조리 토해버리려는 듯이.
긴 날숨 끝에 그가 남긴 건 단 하나였다.
시합에 출전하기 전, 성현이 그에게 했던 말.
─“지금의 너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수민에게 있어 공식 대회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는 상단세라는 사실도, 타카바타 코가가 일본에서 꽤 알아주는 유망주라는 사실도 중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성현이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는 사실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는 이길 수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현이 그렇게 말했기에.
‘성현이가 이길 수 있다고 했어.’
상대를 바라보는 수민의 눈동자가 잿가루처럼 흐리게 가라앉았다.
지금 수민이 성현에게 갖는 믿음은 차라리 맹신(盲信)에 가까웠다.
만약 다른 이가 했으면 어처구니없어하며 웃어넘겼을 말도, 성현이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믿을 수 있을 만큼.
여태까지 성현이 쌓아 올린 업적이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케 할 정도로 대단한 까닭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검도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욱 무서운 일이다.
검도에 한해서라면 성현의 말은 수민에게 길이요, 진리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나는 이길 수 있어.’
마음은 어디까지나 고요하고.
정신은 자신조차 잊은 채 하나만을 바라보니.
이것이야말로 무아지경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것이 설령 타인을 의거한 인위적인 경지일지라도, 결코 학생선수가 도달할 수준은 아니다.
““─!””
상대, 타카바타 코가는 물론이고, 막 시작 구령을 외치려던 심판조차 흠칫 놀라며 수민을 보았다.
그만큼 지금의 수민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은 탓이다.
폭발할 것처럼 타오르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서리가 내린 듯 차갑기만 했다.
문제는─ 그러한 차가움이 도를 지나쳐,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그대로 얼어붙어 버릴 것 같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언제까지고 시작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시작!”
망설이던 주심이 이내 크게 소리쳤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구령.
동시에, 타카바타 코가가 기부림을 내지르며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선공을 노린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
“끼야아앗-!”
몇 번이나 설명했던 것처럼 상단세는 방어를 도외시하면서까지 공격력을 극대화한, 그야말로 공격에 사활을 건 자세다.
그런 상단세끼리 맞붙는다는 건 서로의 턱밑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상태에서 경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바싹 들이댄 칼을 누가 먼저 상대의 머리에 꽂아 넣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자연히 선공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타카바타 코가가 시작과 동시에 타돌을 시도한 건 그 때문이었다.
「타카바타 선수! 빠르게 치고 들어갑니다!」
「침착하게 잘 대처해야 합니다, 김수민 선수! 이번 공격만 잘 막거나 흘린다면 기회를 가져갈 수 있어요!」
쏘아진 화살처럼 달려드는 타카바타 코가.
그리고 그 모든 걸 수민은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회를 빼앗겨 당황하고 몸이 굳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수민의 ‘눈’에는 타카바타 코가가 달려들기 전부터 그 움직임이 모두 보였으니까.
그런데도 가만히 있던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완벽한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
‘─지금이다.’
타카바타 코가의 발이 절반쯤 내디뎌졌을 때.
그제야 수민은 맞이하듯 기부림을 내질렀다.
“우오오오─!”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강렬한 기부림과 마주 휘두르려는 것처럼 들썩이는 팔!
찰나의 순간, 타카바타 코가는 주어진 정보들을 바탕으로 상대가 마주 공격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더욱 내지르는 검에 힘을 실었다.
설령 동시 타격일지라도 상대보다 더 이득을 가져갈 수 있도록.
수민이 바랐던 그대로 말이다!
후웅-!
‘아니?!’
「김수민 선수, 깔끔하게 첫 일격을 피했습니다! 이러면 기회는 김수민 선수에게로!」
「타카바타 선수가 완전히 속았습니다!」
타카바타 코가의 생각과는 달리, 수민은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기부림을 내지르며 달려들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그러지는 않고 몸을 옆으로 내뺐다는 뜻이다.
상대를 축으로 삼고 회전하듯 피하는 ‘벌려걷기’!
이를 악물고 내지른 타카바타 코가의 죽도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수민의 눈에 서늘한 광기가 떠오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모든 게 그가 원했던 대로였다.
그는 상대의 공격을 예측한 뒤, 정확한 타이밍에 맞상대하려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상대를 완벽히 속여넘겼다.
그로 인해 상대는 기술에 과하게 힘을 쏟았고, 그게 빗나가자 자세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공격권은 그대로 가진 채 최고의 기회를 손에 넣은 것이다!
“우오오오─!”
이렇듯 완벽한 설계로 만들어낸 기회를 놓칠 수민이 아니다.
강렬한 기부림과 함께 내지른 죽도는 번개처럼 떨어지며 훤히 드러난 타카바타 코가의 머리 윗부분을 두들겼다.
심판이 아니라 누가 봐도 득점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호쾌한 일격이었다.
“백색, 머리!”
「득점! 김수민 선수가 한발 앞서 나갑니다!」
「정말 완벽했습니다. 상단세끼리 시합할 때 보여줄 수 있는 교과서적인 반격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대단합니다, 김수민 선수!」
「그렇습니다. 김수민 선수가 괜히 상단세를 들고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써먹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으니 가지고 나왔던 거겠죠!」
정확히 45도 각도로 위로 들어 올린 흰색 깃발과 심판의 구령.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 합 승부에 숨죽였던 관객들이 이내 큰 소리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믿고 있었다고, 광천고-!”
“상단세 진짜 개 멋있다!”
“김수민! 이름 기억했다! 앞으로도 잘해!”
“···어.”
쏟아지는 환성 속에서 수민은 얼떨떨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용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을.
상대와 대치하고, 속여 넘긴 뒤, 완벽한 일격으로 득점을 해낸 것이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이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환성이, 사람들이 보내는 박수가 그가 해낸 게 모두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수민이 갑작스레 휙 뒤를 돌아보았다.
환한 얼굴로 박수를 보내는 광천고 주전들 사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성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성현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주 잘했다는 의미이리라.
그걸 보고 나니 비로소 수민은 자신의 승리를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성현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이번 승리로 인해 수민이 얻은 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다.
그저 성현에 대한 믿음만이 더욱 굳건해졌을 뿐.
왜냐하면, 그가 지금 이길 수 있던 건 시합에 나서기 전 성현이 충분히 이긴다고 했기 때문이니까.
“······.”
수민은 다시금 무표정해진 얼굴로 상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적’을 마주 보았다.
더욱 확고한 믿음 속에서, 눈먼 불꽃은 다만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한일합작 승룡기의 제1경기 광천고 대 호쿠토 고교에서, 광천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선봉 김수민의 파죽의 3연승에 힘입어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경기를 통해 검도 팬들은 똑똑히 알게 되었다.
고교 최강인 광천고가 세대교체에 성공하였음을.
그리고 그 안에는 광천고의 새로운 불꽃, 김수민이 있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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