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새로운 엔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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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너희의 몫이야.”
성현의 귓가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입부 체험을 왔던 중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말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거기에 있는 건 싱글벙글 웃고 있는 표정의 대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현의 양옆에는 영준과 윤호 두 사람도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2학년, 이제 3학년이 되는 트리오가 전원 성현에게 다가온 것이다.
“솔직히 이거 너무 한 거 아니냐?”
“네? 어떤 거요?”
피식 웃으며 하는 대현의 말에 성현이 능청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긴. 마지막에 그거. 지름길 보여주고 여기를 걸으려면 광천고로 오라고 한 거잖아. 그걸 선택은 너희의 몫이라고 하다니···.”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어쨌든 광천고를 택하는 건 걔네들 몫이니까.”
“그거야 미끼로 걸린 게 어지간할 때의 이야기고. 내가 봤을 때 오늘 입부 체험한 애 중에서 반 이상은 무조건 올걸. 안 그러냐?”
“무조건이지.”
“나였어도 왔을걸.”
성현이야 이쪽이 아무리 매력적인 조건을 내건다 한들, 결국 입부 체험자가 다른 곳을 고르면 그걸로 끝이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어디 그가 내민 게 보통의 미끼였던가.
현재 학생 선수 레벨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고 일컬어지는 성현과의 1대1 대련!
심지어 끝에는 장단점에 대한 언급과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점에 대해서 말해주기까지 한다?
단순히 감상 수준이 아니라는 건 이번 입부 체험으로 확인하기까지 했으니 더 말해서 무얼 하랴.
“글쎄요. 다른 학교 검도부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렇게까지는 안 올걸요?”
성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광천고에서 겨울방학 기간에 입부 체험을 한다는 소식은 다른 학교 검도부에도 전해졌을 터.
자칫 잘못하면 중학생 유망주들을 모조리 광천고에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는 건 너무 안일한 추측이었다.
분명 다양한 방법들로 중학생들을 자신들의 학교로 입학시키려 하리라.
그걸 생각하면 절반 이상이 광천고에 입학한다는 3학년 트리오의 생각은 들어맞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무튼, 악랄한 수법인 건 마찬가지야.”
“체험판만 맛보여주고 본편은 직접 들어와서 하라는 수준이었지.”
“원래 입부 체험이 그런 거 아냐?”
“그런가?”
대현을 비롯한 2학년 트리오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현이 돌연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걔네들 중에 몇 명은 진짜 세던데요? 제가 보기에도 재능이 있는 게······.”
말꼬리를 흐리는 성현.
2학년 트리오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덧붙였다.
“만약 걔네가 들어오면 주전 경쟁이 꽤 빡세진다고 생각해요. 분명히.”
성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명확했다.
그들을 잘 키우기만 한다면 현재 주전인 2학년 트리오도 밀어낼 정도로 성장한다는 것일 터.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웃어넘겼겠지만, 성현은 실제로 약소부의 2위와 3위였던 대현, 윤호를 강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게다가 실제로 모두가 약하다 했던 수민을 주전 수준까지 키워내기도 했고.
그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일체의 과장 없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우리 자리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거군.’
‘1학년한테 주전 자리를 빼앗긴 다라······.’
주전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였다.
슬쩍 표정이 변한 2학년 트리오가 일어섰다.
“좋아,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다시 훈련할까.”
“그래야지.”
아마 돌아간 입부 체험자들이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함께 훈련했을 때도 버거워서 헉헉댔던 훈련을 하고 난 뒤, 또 나머지 훈련을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고교 최강이라는 칭호를 손에 쥐기 위해 이들이 흘린 피땀이었다.
일개 약소부, 심지어 그중에서도 약점이라 불렸던 ‘잇는 순서’가 빅4 중 한 곳의 선봉, 중견과 정면으로 맞붙어 대등해지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노력이 필요했으니까.
“고생하세요-”
빙긋 웃는 얼굴로 2학년 트리오를 배웅한 성현은 곧 생각에 잠겼다.
현 광천고 남자 검도부의 감독인 김만석은 이제 갓 검도에 입문하여, 이런저런 지식들을 알아가고 있는 초심자다.
그랬기에 자연스레 주전 멤버와 출전 순서를 짜는 건 주장인 성현의 몫이 되었다.
추계 전국 대회까지만 해도 정철을 비롯한 3학년 트리오가 함께 있었으므로 한 번 정한 순서를 그대로 쓰면 됐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새로운 엔트리를 짜야만 한다는 뜻이다.
‘일단, 선봉으로 대현이 형을 세우자.’
추계 전국 대회에서 금제고와 맞붙었을 당시, 대현은 금제고의 선봉이었던 박조영과 무승부를 이룬 바 있었다.
이제는 퇴색된 빅4일지라도, 어쨌든 그리 불렸던 학교의 선봉과 대등하게 겨루었다는 뜻이다.
선봉을 맡을 자격은 충분했다.
특유의 기합 넘치는 타돌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순서가 없기도 했고.
‘중견에는 당연히 영준이 형을 두고.’
이미 지난 한 해 동안 여러 대회에서 자신의 실력을 여지없이 증명한 영준이다.
굳이 다른 누구를 중견으로 끼워 넣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그러니 중견은 영준으로 확정.
‘윤호 형은 부장 순서를 맡으면 되겠고.’
윤호를 3위 순서에 그대로 두는 건 낭비다.
그만한 실력을 지닌 이를 ‘잇는 순서’에 둘 바에야, 차라리 부장 순서에서 강적이라 싸우게 하는 게 훨씬 이득이니.
‘마지막으로 수민을 5위에 두면······.’
합숙 훈련 이후로 실력이 쑥쑥 늘어난 수민은 이제 실전 경험만 있으면 어느 순서에 들어가도 활약할 인재가 되었다.
아마 그가 경기에 나가는 날, 사람들은 많이 놀라게 되리라.
“으음-”
성현은 수민의 배치를 마지막으로 짜본 순서를 한 번 쭉 정리해보았다.
선봉 - 손대현, 2위 - ?, 3위 - ?, 중견 - 최영준, 5위 - 김수민, 부장 - 조윤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장 - 이성현.
남은 건 ‘잇는 순서’의 대표격인 2위와 3위였다.
여기에 누구를 끼워 넣느냐······.
‘당장 현재 검도부 부원들로 채워 넣으려면 가능은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넣은 인원이 이겨낼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거다.
오랜 시간 동안 검도를 했고, 또 그러면서 많은 이들을 가르쳤던 성현은 다른 검도부 부원들에게서 그리 큰 가능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철을 비롯한 3학년 트리오가 졸업하며 생긴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단순히 노력만으로 가능할 만큼 쉬운 일은 아니니.
‘오늘 봤던 애 중에서 최소한 두 명은 와줬으면 좋겠는데.’
가장 처음으로 대련을 했던 김은우나, 이서준, 김진우, 신영범 등 성현이 눈여겨봤던 중학생 유망주들은 꽤 많았다.
그들 중 두 명만 광천고로 와준다면 잇는 순서를 누구로 채울지에 대한 고민은 그만할 수 있을 터.
이번에 있을 한일합작 대회처럼 연승전 방식이었다면 누가 지더라도 성현 본인이 멱살 잡고 이겨나갈 수 있을 테지만, 기본적으로 검도 대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으니.
‘이래저래 고민이 많이 되네.’
스윽.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응? 아, 수연이구나.”
“맞아, 나야!”
볼에 와닿는 차가운 감촉에 성현이 흘깃 뒤를 돌아보자, 스포츠음료를 손에 든 수연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으며 성현에게 스포츠음료를 내밀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걸 받아든 성현은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주전 멤버를 누구를 넣을지 고민하는 중이야.”
“벌써? 새로 1학년 들어오고 나서 정하는 게 낫지 않아?”
“일단 뼈대만 세워두는 거지.”
“흐응-”
수연이 눈을 반짝이며 성현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흥미진진하다는 시선이었다.
남자 검도부와는 달리 여자 검도부에는 서유나라는 제대로 된 감독이 있기에 주전 멤버를 주장이 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출전 순서는 주전 선수들도 함께 상의해서 결정하기는 했지만, 주전으로 뽑는 건 어디까지나 감독의 역할이니까.
“그렇구나~”
하지만 수연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재미 삼아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화제를 오늘 있었던 입부 체험으로 바꾸었다.
“이번에 입부 체험하러 온 애들은 어땠어?”
“다들 괜찮던데? 내년에 와줬으면 하는 애들도 꽤 있었고.”
“우리 쪽도 그랬어! 참, 그러고 보니 이번에 왔던 여자애 중에서 네 팬 있었던 거 알아?”
“···내 팬?”
성현이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었다.
“응! 서봄이라는 여자애가 네 팬이라고 한참 이야기하더라. 훈련 쉴 때 계속 네 쪽 보고 있던데. 혹시 눈치 못 챘어?”
“나야 뭐, 대련하느라 바빴으니까.”
그것도 일반적인 대련이 아니라, 상대의 실력과 장단점, 그리고 약점을 정확히 파악해서 거기를 찌르는 식의 대련이었다.
엄청나게 집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멀리서 전해지는 시선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성현이 너한테 싸인도 받았다던데.”
“싸인까지?”
“응, 네가 표지로 나왔던 검도라이프 매거진 잡지에다가. 기억 안 나?”
문득 성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추계 전국 대회 남고부 단체전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 모든 경기가 끝나고 난 뒤, 슬그머니 다가온 세 명의 여자아이 중 한 명이 그가 나온 잡지를 내밀며 싸인을 원했었다.
꽤 귀여운 애였기에 다른 주전들의 시선이 제법 따가웠었고······.
“음, 기억났어. 걔였구나.”
“나중에 우리 쪽에 와서 검도부 들어오면 아는 척 좀 해줘. 그게 다 팬 서비스잖아.”
“팬 서비스라······.”
못할 이유는 없었다.
‘전’에 한창 현역으로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에 자주 했었던 일이었으므로.
성현은 당시 팬 서비스가 굉장히 좋은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기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수연은 그 후로도 잠시동안 재잘거렸다.
검도라이프 사이트에서 성현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고, 그 대부분이 칭찬이라서 보기가 좋다든가.
아이튜브에서 하온이라는 검도 컨텐츠 아이튜버가 영상의 분량 중 절반 넘게 성현을 내보내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을.
성현은 방긋 웃는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하윤 선배가 올해 중순에 주장직을 나한테 주신다고 하셨어.”
“오, 그래?”
“응응! 그럼 이제 우리 둘이 광천고 남녀 검도부 주장인 거야!”
“강찬 아저씨가 기뻐하시겠네.”
대수롭지 않은 듯 넘기는 성현과 달리, 수연은 주장직을 받는 게 굉장히 달가웠다.
여태까지 그녀가 여러모로 쌓아 올린 게 있는바, 성현과 그녀 두 사람이 주장이 될 경우, 어떤 반응이 올지 뻔히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주장 커플. 히힛-’
유망주 대회 남녀부 커플 우승부터 국가 교류전 때의 커플 저지, 그리고 거기에 이은 광천고 커플 주장까지······.
바깥 해자부터 차근차근 메워간다는 수연의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현은 느긋한 태도로 수연에게 말했다.
“수연이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힘내.”
“응! 열심히 할게!”
2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