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99화 (99/150)

99화: 더 높은 영역

*

한국 검도의 희망!

이는 한때 백성호를 의미했던 별명이었다.

국제 검도 대회에서 세계 최강 일본과 정면으로 맞붙어 승리하는 걸 오랫동안 염원해 온 한국이 찾아낸 답이라는 이유에서.

한 종목의 스포츠 업계가 간절히 바라던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될 만큼 그의 재능이 엄청났다는 뜻이다.

이번에 성현이 국가 교류전에서 모조리 박살 내고 다닌 뒤에는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백성호의 재능까지 퇴색되는 건 아니다.

그는 한 나라의 희망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했다.

오직 가진 바 재능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백성호 본인도 자신에게 사람들이 거는 기대를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어린 천재들이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가 부담감을 이겨 내지 못해서라지만, 그에게 한해서는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였기에.

부담감을 느끼는 건 자신이 다른 이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즉, 마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걸 느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랬기에 백성호는 사람들이 한국 검도의 희망이니, 미래니, 대들보니 하는 말들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하던 대로만 하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해낼 수 있는데 중압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당연하게도, 그로 인해 무너질 일도 없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란 그런 것이니까.

대신, 그를 힘들게 만든 건 권태로움이었다.

너무나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권태감.

한국을 넘어선 재능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해 한국 내에서 그의 적수가 될 만한 유망주가 아무도 없다는 거다.

그나마 김규호 정도가 그에게 때때로 자극이 될 만한 실력을 보여 줬지만, 그뿐.

다른 이들은 그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경쟁이 될 만한 상대가 없으니 자연히 그의 발전은 더뎌질 수밖에.

뛰어난 재능으로 그런 상황에서조차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게 언제 멈출지는 몰랐다.

실력이 빠르게 성장해 감에 따라 다른 이들과의 격차가 분명하게 나고, 시합에 점점 긴장감이 사라져, 이윽고 무뎌져 버리게 되었으니까.

이대로는 안 된다고 느낀 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해답이 필요했다.

지금의 제자리걸음을 타파할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동생을 박살 내 버린 성현에게 흥미를 느낀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딘가 자신과 같은 냄새가 났기에.

성현이라면- 어쩌면 자신을 좀먹어 가고 있는 이 권태감을 날려버려 줄지도 몰랐으니까.

설마하니 자신조차 한참 넘어서는 괴물일 줄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지만 말이다···.

“하아아-···.”

백성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한가롭게 예전의 일을 떠올리는 건 여기까지.

이제는 그의 눈앞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대처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상대의 죽도가 그의 머리를 단숨에 두들겨 버릴 테니까.

다른 생각을 하다가 한판을 빼앗기다니.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마지막까지도 치열하게 맞서 싸웠던 동생, 백지호에게 부끄러운 일이리라.

그럴 수는 없다.

마음을 다스린 백성호가 성현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 고고히 상단세를 취하고 있는 상대를.

‘맹화(猛火)라.’

사람들이 성현의 상단세를 부르는 별명을 떠올린 백성호가 피식 웃었다.

참으로 가당찮은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저건 그런 귀여운 게 아니었다.

차라리 부를 거라면 미치광이의 불꽃이라 하는 게 더 적절하리라.

주위에 있는 모든 걸 불태우고, 끝내는 스스로조차 장작으로 삼아 타오르는 불길을 그 외에 대체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별명이야 아무래도 좋다.

지금 떠올려야 하는 건 저것을 파훼할 방법이니.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금 저 괴물이 세우고 있는 기록은 막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백성호는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상단세는 안 돼.’

이미 한 번 보여 준 무기이기도 하거니와, 상단세 자체가 급조된 것이다 보니 중단세를 상대로 한 연습밖에 한 적 없었다.

서로 상단세를 사용해 겨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몇 번 해 보다 보면 그럭저럭 감을 잡을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검도는 두 판을 내리 지면 그대로 패배하는 경기니.

따라서 지금은 중단세로 맞서야 했다.

그리고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기도 했다.

겨우 몇 달 갈고닦은 상단세로 덤벼들 수 있으리라 생각할 만큼 성현은 만만하지 않았으니까.

꽈아악-

백성호는 죽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성현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하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가가 좌우로 스산하게 찢어졌다.

지금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즐거웠기에.

그를 잠식하고 좀먹던 권태로움은 더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런 괴물이 바로 눈앞에서 으르렁대고 있는데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을 느낄 여유가 대체 어디 있으랴.

그럴 시간에 어떻게든 한칼이라도 먹여 줄 방법을 찾는 게 더 나았다─

‘아-’

비로소 백성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미치광이를 이겨 내기 위해서는 이쪽도 미쳐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단 한 번의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면, 온몸의 근육이 전부 찢어져도 상관없다는 각오를 다져야 했다.

이번에 이길 수만 있다면 가진 걸 전부 버려도 괜찮다는 결의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절대 이길 수 없으니.

‘그럼, 그렇게 하면 그만이지.’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그게 ‘천재’ 백성호라는 인물이었으니까.

백성호는 자연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정신보다 빠르게 몸이 움직이는 감각으로.

나아감과 함께 부드럽게 들어 올린 죽도가 성현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쳐졌다.

쐐액-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소름이 끼칠 만큼 강렬하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그의 뜻에 따라 이상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낸 결과였다.

감히 장담컨대.

지금 행하고 있는 머리치기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고 날카로우리라!

‘이거라면─’

탁!

···한순간이었다.

정말 한순간, 찰나.

성현은 언뜻 무성의해 보일 정도로 가볍게 죽도를 내밀었고, 백성호가 내지른 ‘최고의 일격’은 그것만으로도 파훼되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백성호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기도 전에 타악! 하는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호면 우측에서 느껴지는 충격을 보면 맞은 건 분명한데, 정작 맞은 백성호조차 잠시간 무엇에 맞았는지 알 수 없는 일격이었다.

성현의 죽도가 툭 들려졌다 싶더니, 머리 옆쪽에 타격이 온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으니까!

“백색, 머리!”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백성호가 내지른 최고의 일격은 가볍게 파훼당했고, 그는 다시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거다.

주심을 비롯한 심판 세 명이 높이 든 백색 깃발이 그것을 준엄하게 선언하고 있었다···.

‘돌려 머리··· 인가?’

특유의 재능 덕분인지 백성호는 금방 자신이 무엇을 당했는지 깨달았다.

성현은 자신의 머리치기를 가볍게 쳐낸 직후, 죽도를 바깥으로 돌리며 그의 우측 머리를 정확하게 두들긴 것이다.

그게 너무나도 신속하고 부드럽게 이어진 나머지, 격자를 당하고 나서야 깨달은 거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백성호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무언가,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가 당한 일격은 이전과는 달랐다.

물론 성현의 상단세를 상대해 본 건 겨우 두 번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재능 또한 그리 속삭였다.

방금 그건 명백하게 ‘더 높은 영역’에 있던 기술이었노라고.

‘거기서 더 성장했다고? 그 짧은 사이에?’

기가 찼다.

어이가 없기도 했다.

백성호는 자신이 성현을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든 비비는 것도 찰나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일 뿐, 경기가 길어지면 곧바로 말려들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그나마도 승리를 차지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더욱 성장했다고?

‘괴물···.’

백성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성현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괴물.

아주 탐욕스럽고, 포악한.

한순간도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나아가는 성현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별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드디어 성공했나.’

성현은 가만히 죽도를 내려다보았다.

익숙했던 무게가 오늘따라 색다르게 느껴졌다.

아마도, 새로운 경지에 겨우 발을 들인 탓이리라.

회장기 검도 대회에서 우승한 뒤, 그는 자신이 올라야 할 다음 경지에 대해서 생각한 적 있었다.

그때 그가 떠올린 건 사용하고 있는 두 가지 겨눔세의 장점만을 섞는 방법이었다.

막아 세울 때는 물처럼 고요하게.

치고 들어갈 때는 불처럼 맹렬하게.

어떤 겨눔세를 사용하느냐와는 상관없이 두 가지 면모를 아우르고자 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단세와 중단세는 각각 불과 물로 표현될 만큼 상반된 면모를 가진 겨눔세다.

극과 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들의 장점만을 섞는다는 건 실로 터무니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늘, 그는 기어코 해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결과가 저것이다.

천재라 불리는 백성호조차 혼란에 빠뜨리는 압도적인 일격!

처음에 죽도를 쳐낼 때는 마치 중단세의 방어를 보는 것 같다가, 돌려칠 때는 상단세 특유의 강렬한 위력을 담았다.

괜히 백성호 정도 되는 천재가 반응조차 못 하고 공격을 허용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원했던 것에 비하면 조악한 수준이지만.’

물론 이것만으로 그토록 바라던 다음 경지에 완벽하게 도달했다고는 할 수 없다.

아직 연결 고리도 약했고, 각각의 요소도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성공은 성공이다.

이를 꾸준히 발전시키다 보면 언젠가 완숙해져 성현이 바라던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더 높은 경지에···.’

성현은 당황스러워하는 백성호를 보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아무리 백성호가 하늘이 내린 재능의 소유자라 한들, 이것만큼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테지.

승리는 이미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2연속 득점으로 결승 진출을 확정한 뒤.

대기실로 돌아온 성현을 맞이한 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의 정철이었다.

시합 준비를 마친 그는 표정과는 달리, 매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물론이죠.”

개인전 대진표가 확정된 어제.

정철은 성현에게 말했었다.

만약 결승전에서 그들끼리 붙게 된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전부 제쳐 두고, 그저 모든 힘을 다해서 겨뤄 보자고.

그에 대한 성현의 대답은 ‘바라던 바’였다.

언제고 그도 단순한 대련이 아니라, 진심 어린 승부를 정철과 벌이고 싶었던 까닭이다.

굳이 새싹 밟기까지 해 가며 국내·해외 유망주들의 실력을 강하게 만든 그가 정철이라는 보기 좋은 먹잇감을 그냥 놔둘 리가 없잖은가.

“결승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성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가 올라설 차례였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결승전을 위해서.

< 공략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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