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편수 머리
“아니.”
백성호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마 죽을힘을 다해도 안 될걸.”
아예 의욕을 꺾어 버리려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백성호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동생인 백지호가 성현에게 이길 수 있는 확률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아예 완전히 불가능이라 하지 않는 건, 단지 인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성현이 갑자기 배탈이 나는 바람에 기권할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갑자기 백지호에게 승리를 양보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분명 백 퍼센트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역시 그런가.”
단호한 형의 대답에도 백지호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또한 알고 있었기에.
이미 단체전 결승에서 성현을 보며 느낀 거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성현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정도로 성현과 백지호, 두 사람 사이에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격차가 존재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백지호는 아직 성현보다 한 수 아래인 백성호조차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상태.
그러니 고교 검도, 나아가서는 한국 검도의 정점에 설 것이 확실시되는 성현에게 승리를 점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포기할 생각 없으면서.”
백성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십수 년간 한 집에서 생활한 형제다.
그런 만큼 서로를 굉장히 잘 알았고, 백성호는 백지호가 무슨 말을 듣든 뜻을 세우면 포기하는 경우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초등학교 때 자신을 검도로 이기겠다는 목표를 내뱉은 뒤, 그것을 위해 온전히 한 길만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성현을 상대로도 마찬가지다.
백지호가 이미 성현을 쓰러뜨리겠다고 입 밖에 낸 이상, 그것을 철회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래, 맞아. 당연하지.”
‘전’의 백지호 또한 그러했다.
형의 그림자에 수도 없이 짓눌리면서도 단 한 번도 포기한 바 없었다.
재능은 형만 못할지언정,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투지만큼은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백지호란 검도인이었다.
백성호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만 죽지 않았다면 그를 쓰러뜨렸을 유일무이한 이라고까지 말해질 정도였으니까.
“···잘 지고 와라.”
“응, 갔다 올게.”
형제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준비를 마친 백지호는 담담히 걸어 나갔고, 경기장에 앞서 도착해 있는 성현을 보았다.
그가 저 괴물 앞에 선다면 이미 정해진 것과 같은 패배를 겪게 되리라.
그걸 모르지 않음에도 백지호의 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오늘의 패배 또한 언젠가 있을 그의 승리를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확고히 믿고 있었기에.
*
‘백지호라.’
성현에게 있어서 백지호는 의외로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는 상대였다.
매번 만나서 지기만 한 상대가 뭐가 기억에 남느냐, 하고 묻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성현에 대해 제대로 모르니까 하는 소리다.
어차피 경기 상대로 만난 이들 중 성현에게 이긴 상대는 지금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경기 승패와는 관계없이 강한 인상을 줄 무언가가 있어야 성현은 기억했다.
백지호에게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백성호의 동생이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온전히 백지호라는 소년이 혼자 힘으로 만들어 내는 종류의 것이었다.
‘사실 그것뿐만은 아니지.’
더해서 백지호는 일종의 시작점과 같았다.
과거로 돌아온 성현의 고등학교 생활이 가장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부분이 어디였던가.
바로 경중고와의 연습 경기다.
백지호와의 경기 때부터 비로소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성현이 유망주 대회를 거쳐 완전히 개화, 이후 약소부 광천고를 이끌고 우승을 차지했다─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고, 성현도 딱히 그걸 부정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
“······.”
주심을 사이에 둔 채 백지호와 마주 선 성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지호가 이전보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중심이 제대로 섰고, 그에 따라 자세가 견고해졌으며, 죽도의 검선은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전처럼 움직이기 전 타이밍을 읽어내 공세함으로써 막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훌륭하군.’
성현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초의 백지호와 현재의 백지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을 터!
가장 먼저 그에게 새싹 밟기를 당한 이가 이처럼 크게 성장한 모습을 보니 성현으로서는 퍽 만족스러웠다.
“···시작!”
시합 개시를 알리는 주심의 구령.
늘 그랬듯이 성현은 기세를 끌어 올렸다.
본래 상단세의 기본적인 전략은 기세에 의한 압박에서부터 시작된다.
거기서 상대가 밀려서 움츠러들거나, 혹은 압박을 이겨 내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순간을 노려 치는 것이 상단세의 승리 플랜이라는 뜻이다.
이는 사실 일방적인 공세라고도 할 수 있었다.
중단세끼리는 칼끝으로의 공세를 펼쳐 가며 서로의 뜻을 가늠해 보지만, 상단세는 높은 곳에서 고고히 강요함으로써 상대가 두 가지 중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물며 겨눔세 자체가 그러할진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성현이기까지 하다?
백지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먼저 치고 나오겠지.’
선공.
그것만이 백지호의 유일무이한 선택지였다.
성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기다렸다.
상대의 성장을 음미하고 싶기도 했으니.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백지호는 곧장 망설임 없이 치고 나왔다.
“으랴아앗-!”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죽도를 내지른다.
개시되는 자세가 깔끔하니 죽도의 궤적 또한 흔들림 없이 정갈하다.
더해서 축이 흔들리지 않는 만큼 칼끝의 위력 또한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성현은 쌓아 올린 수양이 보이는 일격에 흡족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가 노리는 부위를 파악했다.
‘노리는 건- 손목인가!’
상단세를 상대로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 찌르기인 건 맞지만, 손목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아무래도 찌르기는 충분히 갈고닦지 않고서는 훌륭한 위력을 보이기가 썩 쉽지 않으니.
여하튼 백지호의 의도는 꿰뚫어 보았다.
남은 건 그것을 반격하는 것뿐!
찰나, 성현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타올랐다.
“하아아앗-!”
기부림과 함께 내디뎌지는 왼발.
그와 함께 휘둘러진 죽도는 마치 채찍처럼 휘어지며 흉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딱딱한 대나무로 만들어진 죽도가 단지 휘두르는 것만으로 휘어져 보인다는 건, 그만큼 빠르고 강하다는 의미다.
분명히 반 박자 늦게 반격에 나섰음에도 두 자루 죽도가 서로 교차할 정도였으니···.
성현은 편수 머리를 시도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다소 왼쪽으로 비틀었는데, 그의 왼쪽 손목을 노리던 백지호에게는 썩 좋지 못한 일이었다.
공격에 나서는 것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백지호의 손목치기는 옆으로 흘려 버렸으니까!
그야말로 공방일체(攻防一體)의 편수 머리.
상단세의 기본이자 완성을 보여 준 것이다.
타아악-!
누구의 죽도가 빗겨 나가고, 누구의 죽도가 유효한 격자를 성공시켰는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던 심판들은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일제히 백색의 깃발을 들어 올렸으니 말이다.
“백색, 머리!”
거기에, 주심의 확정적인 구령까지.
“후우우···.”
성현은 차분하게 심호흡하며 물러났다.
여전히 백지호는 투지에 불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판을 뺏긴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
일찍이 유망주 대회 대기실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하하.”
저도 모르게, 성현은 웃고 말았다.
자신의 새싹 밟기가 벌써 결과를 냈다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렇게 훌륭하게.
다른 이들도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백지호만큼만 더 강해져서 돌아왔으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판째!”
*
“먼저 끌어들이고, 상대의 칼을 흘려 내며 친다- 상단세가 보여 줄 수 있는 반격의 정석이네요.”
권도연의 감탄에 김동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기에.
방금 성현과 백지호가 보여 준 공방은 짧았지만, 그렇다 하여 그 안에 담겨 있는 기술의 수준이 낮은 건 절대 아니었다.
당장 백지호가 시도한 손목치기도 어지간한 실업 검도 선수의 그것보다 빠르고 강했으니.
성현의 편수 머리?
더 말해 무얼 하랴.
저건 실업 검도 선수 수준이 아니라, 오랜 수련을 바탕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대가들이나 보여 줄 수 있는 기본기의 극치였다.
본래라면 그걸 고작 고등학생이 해냈다는 것에 경악해야 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 ‘이성현이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게 김동안으로서는 두려울 따름이었다.
언젠가 무슨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러도 이성현이라는 세 글자만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괴물이네.’
“사실, 그냥 먼저 치고 나가도 이겼을 것 같지만요. 안 그런가요?”
“음- 네. 아무래도 그랬겠죠.”
선공이든, 아니면 후공이든 간에 성현이 패배하는 모습은 머릿속에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상단세를 사용하는 성현에게는 그만한 위엄이 있었던 까닭이다.
여태까지 쌓아 올린 업적이, 쓰러뜨린 적들의 면면이 일종의 권위가 되어 그를 보다 압도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 결과도 그랬다.
두 판째에서 성현은 첫판과는 다르게 먼저 치고 들어갔고, 백지호는 그걸 막아 내지 못했으니까.
권도연이 말했던 대로 성현이 승리를 거머쥐는 일에는 선공이나 후공 여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거다.
“8강도 돌파···. 이제 남은 건 딱 두 경기네요. 과연 이성현 선수가 이번에도 전 경기 일격 승리 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경기장을 내려다보던 권도연이 말했다.
사실 그건 비단 그녀만의 호기심은 아니었다.
현재 관객들 중 대다수는 성현이 기록을 달성하느냐, 마느냐를 주목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학생 검도, 아니 한국 검도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니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두 개 대회를 걸쳐서 이룩되는 신화이기도 했고.
“제 의견을 물으신다면- 네.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남은 게 백성호 선수와 정철 선수죠? 이성현 선수는 그 두 명을 전부 일격에 쓰러뜨리고 우승을 거머쥘 겁니다.”
“거의 확신하고 계시네요.”
“뭐,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김동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백성호 선수는 이미 한 번 회장기 대회에서 기록의 희생양이 됐었잖아요?”
“그렇죠. 그것도 결승에서.”
“한 번 있던 일이 두 번 있지 말란 법은 없죠. 남은 건 정철 선수인데, 이번 대회에서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건 맞지만, 기록을 깨뜨릴 정도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흐음, 그런가요.”
이야기를 듣던 권도연이 손에 든 노트에 무언가를 쓱쓱 써 내려갔다.
잘은 몰라도 검도라이프 매거진에 올릴 기사 내용에 대해서 필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그곳의 기자였고, 이곳에 온 것도 잡지에 실을 만한 내용을 찾기 위해서였으니.
빠르게 손을 놀리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그러고 보니 들으셨나요?”
“어떤 걸 말입니까.”
“이번에 한국 검도 협회에서 꽤 재밌는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더라구요.”
“재밌는 대회··· 요?”
“연승전 대회- 라고 하시면 아시려나요.”
김동안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옥룡기요?”
“네. 한국 버전 옥룡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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