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스카우트 제의
추계 전국 중·고등학교 검도 대회 2일 차에 진행된 것은 여고부 단체전 경기였다.
규모가 큰 대회들이 대개 그러하듯, 추계 전국 대회도 날짜별로 남자 단체전?여자 단체전?남자 개인전?여자 개인전, 마지막으로 시상식을 진행하는 까닭이었다.
하루에 단체전과 개인전을 동시에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참가 인원이 적은 대회의 이야기.
추계 전국 대회는 그 이름처럼 전국에 있는 중·고등학교 검도부 대다수가 참가하는 만큼 그런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경기를 치른다 해도 모든 경기를 소화해 내지 못할 테니.
이는 대회에 참가하는 학생 선수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일정이기도 했다.
일정대로라면 선수들은 단체전을 치르고 난 뒤, 하루의 휴식 동안 최대한 피로를 풀고 개인전에 참가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특히나 결승전까지 총 다섯 경기를 연달아 치러야 했었던 광천고나 경중고의 경우에는 더더욱 꿀 같은 휴식이리라.
그런 것치곤, 성현을 비롯한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전들은 숙소에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것도 쉬는 거긴 하니까.’
다시금 사직 체육관을 찾은 성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지었다.
어제와 달리 그와 광천고 주전들은 경기장이 아닌 관객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상태였는데, 이는 오늘 사직 체육관을 찾은 이유가 여자 검도부를 응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딱히 그가 주전들을 이끌고 나온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침이 밝고 대회 시간이 다가오자 영준을 필두로 한 주전들은 당연하다는 듯 옷을 챙겨 입으며 응원 나갈 준비를 마쳤으니까.
첫째 날에 여자 검도부 인원들이 응원하러 와 줬으므로, 자신들도 응원하러 가는 게 맞다는 이야기를 내뱉으면서 말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얘네 경기 몇 번째라고 했지?”
“세 번째라고 했으니까 다다음 경기.”
“상대는?”
“나야 모르지. ···근데 나 왠지 이 대화 전에 했던 거 같은 기분이야.”
“···너도?”
영준과 대현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낄낄거리고 웃을 무렵.
“─안녕하십니까.”
서글서글한 표정의 남성이 광천고 주전들 근처로 슬그머니 다가섰다.
사복을 입고 있는 다른 관객들과는 달리, 검은색 정장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서류 가방까지 들고 있는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관객은 아니었다.
하기야, 애초에 일반적인 관객이었다면 광천고 주전들을 찾아 말을 걸 이유도 없었으리라.
“누구세요?”
“저는 경주시청에서 스카우터로 일하고 있는 김범수라고 합니다.”
“경주시청··· 스카우터요?”
“네. 여기 명함입니다.”
자신을 경주시청 스카우터라 소개한 남자, 김범수가 건넨 하얀색 종이에는 그가 말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경주시청 실업 검도팀 소속 스카우터 김범수’.
전날, 체육관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학생 선수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이가 성현과 광천고 주전들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명함을 한 차례 쓱 훑어본 정철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한테는 무슨 일이시죠?”
“그야 물론 스카우트 제의를 드리기 위해서지요.”
“으음···.”
“아, 선수분들이 여기 오신 이유가 광천고 여자 검도부 선수분들을 응원하기 위해서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 경기는 다다음 경기니, 그 경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딱 십 분! 십 분만 말씀드리고 물러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십 분이요?”
“네. 만약 그것도 껄끄럽다 하시면 그냥 가겠습니다. 혹시라도 차후에 관심이 생기시면 명함에 있는 번호로 부담 없이 연락 주십시오. 제가 찾아가서 따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김범수는 굉장히 저자세로 일관하며 답했다.
처음 질문을 던졌던 정철마저도 볼을 긁적일 정도로.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태도는 당연하였다.
일반적인 선수들에게는 제의를 건네는 스카우터가 더 높은 입장일지 모르지만, 성현과 정철이라면 이야기가 달랐으니까.
당장 어느 실업팀을 가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실력을 지닌 두 사람이다.
따라서 시청 실업팀이고 나발이고 ‘제발 우리 팀으로 와주십시오!’라며 사정해야 하는데 고자세로 나올 수 있을 리가.
“십 분이라. 너희는 어때?”
“저희야 뭐···.”
정철의 물음에 영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슬쩍 돌아보니 다른 2학년들도 그와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아무래도 아직 졸업까지 일 년가량 남아 있는 만큼, 당장 뭘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탓이리라.
반면 당장 내년에 대학, 혹은 실업 검도팀을 선택해야 하는 3학년들은 은근히 혹하는 표정이었고.
“···어떻게 할까?”
광천고 주전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건 다름 아닌 성현이었다.
올해 중순에 정철에게 주장 직위를 넘겨받은 이후, 성현은 연습에서도 실전에서도 주장다운 면모를 계속해서 보여 왔다.
그 때문에 광천고 주전들은 성현이 1학년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주장으로서 마음속 깊이 인정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이런 일에도 마지막 결정권을 넘겨준 것이다.
“들어봐도 괜찮을 것 같네요.”
잠시의 고민 끝에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범수의 말마따나 어차피 광천고 여자 검도부의 경기는 한참 남은 상황.
십 분 정도 내준다 한들 나쁠 건 없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내년에 3학년들에게 대학 진학 이외의 선택지를 만들어 주는 것도 썩 괜찮아 보이기도 했고.
“저희 경주시청 실업 검도팀은 실업팀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난 감독과 코치진을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 또한 지극히 훌륭하여──”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김범수는 청산유수로 경주시청 실업팀의 장점에 대해서 떠들었다.
뛰어난 감독과 유능한 코치진, 훌륭한 시설, 대회 성과에 따른 성과금 지급 등등.
무엇보다도 시청 소속 실업 검도팀에 입단할 경우 좋은 점은 공무원 신분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더키가 저변을 크게 늘려 놓긴 했으나, 아직까지 완전히 메이저 종목이라 하기 힘든 검도에서 이는 굉장한 장점이었다.
당장 정철을 포함한 3학년들의 표정에 혹하는 기색이 감돌 정도였으니까.
“──까지 있습니다. 더불어 이원영 선수를 비롯한 선수단의 쟁쟁한 선수들에게서 여러모로 지도를 받는 것도 가능──”
‘당장은 이 정도인가.’
다만, 그래 봐야 성현은 심드렁할 뿐이었다.
‘전’에 언더키 실업팀에서 생활했던 그에게는 경주시청 실업팀의 대우가 그다지 만족스러운 조건이 아닌 까닭이다.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그만한 메리트가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지 않은가.
정 시청 소속 실업팀을 가야 한다면 차라리 위대한 선수가 소속되어 있는 서울시청 실업팀에 가는 게 훨씬 더 나았고 말이다.
자신이 백이 되어 준다는 위대한의 말은 반은 농담이지만, 그건 다시 말해 반은 진담이라는 뜻.
차후 위대한이 서울시청 실업팀 코치로, 또 거기서 더 나아가 감독까지 되는 걸 생각해 보면 경주시청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었다···.
“──어떠십니까?”
“좋네요. 여러모로.”
하지만 그걸 굳이 보는 앞에 대고 말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성현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관적으로 봤을 때나 경주시청의 제안이 별로인 거지, 지금 광천고 주전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니.
괜히 정철까지 혹하는 표정을 지은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혹시나 관심이 생기신다면 명함에 있는 번호로 언제든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아, 네.”
마지막까지 저자세로 공손히 허리를 숙인 김범수는 조용히 떠나갔다.
자신이 앞서 말했던 대로 딱 십 분간 경주시청의 장점에 대해 늘어놓은 뒤, 질척대는 일 없이 깔끔한 태도로.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꺼내며 시간을 끄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인상이었다.
“경주시청이라···.”
“시청 실업팀 소속은 공무원으로 취급되지?”
“응. 그래서 명절에 떡값도 잘 나온다더라.”
“그 대신 성과 확인하는 거 엄청 빡세다던데. 2년 단위로 우승 기록 하나씩은 있어야 한대.”
광천고 주전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정철은 아무 말도 없이 명함을 만지작거렸고, 대현과 영준, 윤호는 건너 들은 정보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조금 의외인 것은 현성과 경진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김범수가 떠나고 난 뒤, 아무렇지도 않게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 버렸기 때문이다.
“형들은 경주시청이 별로라고 생각하세요?”
“응? 아. 아냐. 좋지. 좋긴 한데.”
현성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주시청 실업팀에서 이렇게까지 제안한 건 우리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닐 테니까.”
“아···.”
“뻔한 이야기지. 아마 저쪽이 간절히 바라는 건 성현이나, 아니면 정철이 연락일 거야. 우리는 뭐- 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
어쩌면 전화했을 때 사정이 바뀌었다며 깔 수도 있다고 덧붙인 현성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말을 들은 2학년 트리오는 은근히 들뜨려 했던 마음을 다잡았다.
확실히 그들이 듣기에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경주시청 실업팀 정도면 현재 국내 실업팀 중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인데, 거기서 이만큼 저자세로 나올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었으니.
2학년 트리오의 가슴에 한 가지 각오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성현이랑 정철 형이 대단한 거지, 내가 대단한 게 아니야. 잊지 말자.’
‘나중에는 날 모시고 가고 싶게.’
‘더 실력을 키운다면, 그때는···.’
“오, 시작한다.”
““광천고 파이팅-!””
이내 시작된 광천고 여자 검도부의 경기.
성현을 비롯한 주전들은 열심히 응원했다.
그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광천고 여자 검도부는 별 탈 없이 32강을 돌파했다.
16강, 8강, 4강도 마찬가지!
고전 따위는 없이 올라간 그녀들은 결승전에서조차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자랑하며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고야 말았다.
하기야, 예전부터 여고부 쪽에서 강호로 불리던 광천고 여자 검도부다.
그런 강호가 임하윤과 강수연이라는 마스터키를 얻으며 날개를 활짝 편 상황이니 우승은 떼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으리라.
사람들 또한 당연하게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받아들였다.
한낱 약소부에서 고교 최강에 오른 남자 쪽과는 꽤 많이 차이 나는 반응이었지만, 뭐 어쩌랴.
쌓아 온 시간이 다른 것을.
“우승-!”
짝짝짝짝!
회장기 검도 대회 남녀 단체전 정복에 이은 두 번째 광천고 남녀 단체전 정복이었다.
서로 껴안고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녀들을 바라보면서 성현이 떠올린 건 내일 진행될 남고부 개인전의 대진표였다.
오늘 아침에서야 전달된 대진표의 내용 말이다.
‘꽤 흥미로웠지.’
출전 선수들의 면면보다는 그들이 배치된 순서가 굉장히 재밌었다.
성현은 꽤 앞 순서였는데, 거기서부터 이기며 올라가다 보면 8강에서 백지호를, 다음 경기이자 준결승인 4강에서는 백성호를 만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형제를 연달아 만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보다 더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건 결승전 상대였다.
서로가 패배하는 일 없이 결승까지 올라설 경우, 만나게 되는 건 다름 아닌─
‘─정철 선배였으니까.’
문득, 성현은 정철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정철의 눈동자 속에서는 불꽃이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성현의 입가가 비스듬하게 올라갔고, 그건 정철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박수를 치며 서로를 보고 미소지었다.
추계 전국 검도 대회의 3일 차.
남고부 개인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매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