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고교 검도계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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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중고의 코치, 신명철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회장기 검도 대회에서 준우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백성호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그를 찾아왔던 일을.
이성현을 이기려면 이것밖에 없다며 가져온 방법을 듣고, 그는 십 년이 넘는 코치 경력이 무색하게도 아연한 표정으로 “···진심이냐.” 하고 되묻고 말았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방법이었기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에게 백성호는 웃는 얼굴로 진심이라 말했다.
그러더니 덧붙이기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해도 이길 확률은 높지 않아요. 기껏 해 봐야 저와의 차이를 가늠해 보는 정도겠죠.”
──라고.
솔직히 말해서, 신명철 코치는 백성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물론 이성현이라는 소년이 대단한 건 안다.
백지호와의 연습 경기 때 직접 보기도 했고, 이후로도 전력 조사를 겸해서 활약 장면들을 모조리 챙겨 봤었으니까.
확실히 이성현은 현 국내 최고의 유망주,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건 백성호도 마찬가지다.
지난 몇 년간 백성호의 재능을 직접 봐 왔던 신명철 코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천재’의 이름은 절대 가볍지 않노라고.
‘뭐, 그래 봤자 본인이 하겠다는 걸 말릴 수는 없었지만 말이지.’
어쨌든, 가르침을 바라는 선수에게 딱 잘라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신명철 코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진짜 쓰겠냐는 일말의 의구심을 가진 채로.
그리고 지금 백성호는 그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정말로 쓰지 않을 거였다면, 애초에 배우지도 않았으리라는 걸.
웅성웅성.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분명 청색이 백성호 맞는데.”
“허어어···.”
시작 선에 서서 두 판째를 준비하는 성현과 백성호를 본 관객석이 소란스러워졌다.
의아해하거나, 당황하거나, 그도 아니면 어처구니없어하거나.
다양한 반응이 튀어나온 것이다.
심지어는 시작 구령을 외쳐야 할 심판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장면이었으니까.
원인은 백성호였다.
정확히는, 그가 갖추고 있는 겨눔세가 문제였다.
곧게 편 허리와 당겨진 턱.
머리 위로 들어 올려진 두 팔, 그에 따라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죽도.
반보 앞서 있는 왼발과 반쯤 세운 오른발까지.
“···저건, 아무리 봐도 상단세(上段勢)잖아!”
성현이 아닌, 백성호가 사용하는 상단세.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성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공식 대회 경기에서 상단세를 사용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거의 몇 년을 그래 왔던 그가 뜬금없이 상단세를, 그것도 전국 대회 단체전 결승에서 꺼내 들었으니 이런 반응이 돌아올 수밖에.
“기어코 저걸 사용하는구나.”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린 건 백지호였다.
형인 백성호가 이성현을 대비해서 상단세를 수련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걸 진짜로 꺼냈다는 사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른 대회도 아니고 추계 전국 대회, 그것도 결승전에서 저런 시도를 할 수 있다니.
형이지만 그 정신력이 감탄스러울 지경!
다만 백지호의 옆에 있는 우중한 감독은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껄껄 웃을 따름이었다.
‘상단세라.’
백성호의 상단세라는, 모두를 당혹케 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 성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분명 천재라 불리는 백성호라면 특별한 무언가를 준비해 왔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판에 보여 준 공세 말고도 다른 것을.
그게 공식 경기 최초의 상단세라는 건 확실히 꽤 놀랍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상대가 무슨 겨눔세를 사용하든 간에 그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기면 그만이니.’
상대를 꺾고 승리를 얻는다.
그게 전부였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성현이기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백성호와 대치했다.
“······.”
“······.”
그렇게 성현과 백성호, 두 사람 모두 일말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일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수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주심도 이내 평소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상단세가 놀랍기는 해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임을 주심도 깨달은 것이다.
곧 주심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두 판째!”
그와 동시에.
백성호의 기세가 변했다.
분명 시합 개시를 알리기 전과 똑같은 자세, 똑같은 모습이었건만, 휘감은 분위기만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일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찍이 성현이 한 번 보여 줬던 변화와 같았다.
‘사람’에서 ‘불꽃’으로의 변화.
불의 자세라는 상단세의 별명에 걸맞은 압도적인 기백의 표출!
“······!”
백성호의 변화를 정면에서 본 성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상단세를 취했을 때만 해도 어렴풋하게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지금 백성호가 취하고 있는 상단세.
그것의 근본에 있는 건 바로 본인의 상단세였다!
그러니 당연히 익숙할 수밖에.
물론 완벽하게 그의 수준에 도달한 건 아니다.
애초부터 백성호가 상단세를 주력으로 사용했고, 또 몇 년의 추가적인 단련 시간이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 그런 건 절대 불가능할 테니.
그렇다 해서 엄청나게 부족하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성현이 백성호의 상단세 근간에 자신의 상단세가 있다는 걸 알아봤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
“──.”
중단세를 취한 성현과 상단세를 취한 백성호.
사용하는 겨눔세가 뒤바뀐 두 사람은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바라만 봤다는 뜻은 아니다.
되레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간의 간극을 가늠하면서,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로 심리전을 걸었다.
틀어진 어깨, 조금씩 내미는 발, 팔의 각도, 시선이 향하는 방향, 그 모든 것으로 공격 의도를 드러내고 또 읽어 내며 으르렁댔으니.
아주 작은 동작에서도 상대방의 뜻을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었기에 할 수 있는 대치!
관객들은 그걸 완벽히 파악할 능력은 없었다.
하나, 그들이 만들어 내는 긴박함은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었기에, 백성호의 상단세로 인해 일어났던 소란은 어느새 사그라든 뒤였다.
‘일합 승부다.’
백성호는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확신컨대 이 시합은 단 한 번의 검격으로 결판이 날 터였다.
애초에 그가 지난 몇 달간 상단세를 단련하고, 이번 시합에서 그것을 꺼내 든 것부터가 일 합 승부를 위해서였으니···.
아무리 백성호가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고작 몇 달 만에 하나의 겨눔세를 완벽히 터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렇기에 백성호는 상단세에서 내지르는 첫 일격만을 갈고 닦았다.
전부 버리고 오직 그것만을.
따라서, 뒤는 없다.
‘첫 일격. 거기에 모든 걸 건다!’
빗나가거나 막히면 패배한다.
정말로 첫 일격에 모든 걸 건다는 뜻이다.
어디 이보다 더 상단세가 잘 어울리는 경우가 또 있으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정신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
하나의 점으로 모여드는 정신.
고조된 집중력으로 인해 주위가 고요해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체육관 공기도,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란도, 이쪽을 주시하는 심판의 눈빛도 모조리 지워 버렸다.
그 끝에 남은 건 오직 자신과 상대, 둘뿐.
필요 없는 것을 모조리 불살라 버림으로써 얻은 극한의 집중!
백성호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하아아앗!”
“···하아아압!”
이성현과 백성호.
두 사람이 공격에 나선 건 동시였다.
일 초의 오차도 없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순간에 기부림을 내지른 것이다.
백성호가 택한 기술은 당연하게도 머리치기였다.
죽도를 높이 들어 올린 상단세에서 발해지는 머리치기는 검도의 어떤 공격보다 빠르고 강하다.
심지어 그것을 지른 것이 백성호이기까지 하니!
죽도는 마치 번개처럼 떨어져 내렸다.
반면, 성현이 시도한 기술은 한 손 찌르기였다.
상단세는 자세의 여건상 목의 방어가 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그것을 제대로 노렸다.
질풍처럼 나아가 송곳처럼 찌른다.
한 손 찌르기의 정석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기묘하게도 닮은 두 사람의 죽도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노렸고─
타아아악-!
─곧, 겹쳐진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소리만 들어서는 누구도 알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겹쳐진 타격음이었다.
비단 타격음만이 겹친 게 아니었다.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로 성현과 백성호의 죽도는 동시에 서로를 두들기고 찔렀으니까.
“······.”
“······.”
잠깐의 침묵.
이내, 백성호가 흐릿하게 웃었다.
‘아주 약간, 모자랐네···!’
“백색, 목! 시합 끝!”
아슬아슬하게 빨랐던 건 성현의 찌르기였다.
거의 동시였으나, 아주 근소하게나마 차이가 있었고, 심판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따라서, 주심을 비롯한 심판들이 번쩍 들어 올린 깃발의 색깔은 광천고를 의미하는 하얀색이었다!
“우와아아-!”
“전국 대회 우승이다-!”
주심의 선언에 광천고 주전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들은 성현을 얼싸안은 채 방방 뛰었다.
회장기 검도 대회에 이은 두 번째 단체전 우승!
심지어 왕좌로 취급되는 전국 대회의 우승이다.
그 말인즉슨, 이제 그 누구도 고교 최강의 검도부가 광천고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내년의 전국 대회까지는.
“···후우.”
백성호는 씁쓸한 얼굴로 우승에 기뻐하는 광천고 주전들과 성현을 바라보았다.
회장기 검도 대회에 이어, 전국 대회의 우승까지 빼앗기고 나니, 비로소 ‘패배했다’라는 감정이 실감이 된 까닭이다.
최강이라는 이름에 딱히 집착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걸 빼앗긴 걸 좋아할 만큼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지 않았으니.
더불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힌 건 이번 경기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 성현과의 격차였다.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이, 겨우 비슷한 수준인가.’
상단세까지 사용해 가며 시도한 일격이 중단세의 성현이 내지른 한 손 찌르기와 엇비슷했다는 사실에 백성호는 입맛이 썼다.
그건 두 사람의 기본적인 검격 자체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뜻이었기에.
이 틈을 메우기 위해서는 분명 피땀 어린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백성호의 생각과는 달리, 그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이 성현의 일격과 맞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단 한 번의 검격만큼은 수십 년의 단련을 거친 성현의 검격을 따라잡았다는 뜻이므로.
비록 그게 뒤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첫 일격에만 집중하여 겨우 비등한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이라도─
“결국, 광천고 우승 엔딩이네.”
“이럴 것 같기는 했어. 얘네 실력 늘어난 게 딱 눈에 보였으니까.”
“이제 빅4 시대도 완전히 갔구만···.”
짝짝짝짝-
지켜보던 관객들 또한 박수갈채를 보내며 광천고의 우승을 축하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광천고 남자 검도부는 전국 대회 우승팀이 될 자격이 충분했으니까.
8강에서 금제고를, 4강에서는 용암고를, 마지막으로 결승에서 경중고를 연달아 꺾으며 우승했는데, 누가 그들의 업적을 부정할 수 있으랴!
그렇게 모든 경기가 끝나고.
심판 세 명을 중심으로 하여, 광천고와 경중고 두 학교의 주전들이 쭉 늘어섰다.
일찍이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인사했던 그대로 다시 선 두 학교의 분위기는 대조되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의 광천고 주전들과 패배의 씁쓸함 앞에 침울해진 경중고 주전.
승자와 패자를 명확히 보여 주는 표정이었다.
“인사!”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37회 추계 전국 중·고등학교 검도 대회 남고부 우승.
광천고등학교.
마침내, 광천고가 왕좌를 손에 넣고 확고부동한 고교 검도계의 제왕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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