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설계
고교 검도계의 왕좌라 불리는 전국 대회 트로피를 두고 펼쳐지는 결승전!
새롭게 왕이 되고자 하는 광천고와 다시금 패권을 거머쥐려 하는 경중고의 싸움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은 쪽은 광천고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광천고에서 선봉으로 출전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정철이었으니까.
어느 의미에서 정철은 성현 이상의 치트키였다.
그나마 성현에게 대적할 수 있다고 말해지는─어디까지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도에 불과했지만, 아무튼─주장 순서와는 달리, 선봉 순서에서 정철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기에.
지금의 그를 막아 세우기 위해서는 빅4의 주장급이 나서야만 하는데, 선봉에서 주장급 실력을 발휘할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거기에 대학 입시라는 역대급 버프를 포함해,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하는 의지까지 더해졌으니.
“백색, 머리! 시합 끝!”
“우오오오-!”
사실상 선봉 순서에서 정철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중고의 선봉, 김호준은 분발하여 정철에게서 1점을 빼앗았지만, 아쉽게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정철은 무자비하게 몰아치며 승리에 필요한 2점을 손에 넣었고, 선봉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선봉 경기 결과.
정 철 (승) vs 김 호 준 (패)
‘주전 경쟁에서 이긴 이유가 있네···!’
2위 순서로 나서 안정철과 맞부딪친 손대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작하자마자 그의 자랑이자 특기인 타돌로 1점을 뽑아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이상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리하게 타돌을 시도하다가 ‘받아 허리’에 제대로 당해 점수를 빼앗기기까지 했다.
자신의 차례에서 흐름을 굳히려 했던 손대현으로서는 영 껄끄러울 수밖에.
‘여기서 주도권을 되찾아야 했는데!’
그러나 안정철 또한 표정이 안 좋기는 손대현과 마찬가지였다.
현재 승부의 저울은 광천고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황!
경중고의 2위인 안정철은 그것을 자신의 차례에 다시 원래대로 만들고자 했었다.
한데 손대현은 날카로운 타돌로 그에게서 선제점을 뺏어갔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쉽게 기회를 내주지 않았으니까.
승리해서 흐름을 되찾아와야 하는 안정철에게 있어 그건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만! 시합 끝!”
그렇기에 심판의 구령에 맞춰 물러난 두 고교의 2위들 모두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경기 시간을 늘릴 수는 없는 노릇.
결국 그들은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2위 경기 결과.
손 대 현 (무) vs 안 정 철 (무)
“그만! 시합 끝!”
이어진 3위 경기에서도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조윤호와 한철수 또한 승부를 가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윤호는 공세에서 이어지는 ‘밑 손목치기’로 선제 1점 득점에 성공했으나, 아쉽게도 한철수의 과감한 ‘한 손 찌름’에 의해 점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앞선 2위 경기처럼, 서로 1점을 나눠 가진 상태에서 경기 시간은 끝.
결국 무승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는 이들은 다 알았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는 무승부지만, 실상은 윤호의 승리에 가깝다는 것을.
선봉의 승리로 인해 승부의 무게추는 광천고 측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고, 경중고는 2위와 3위 순서를 거쳤음에도 그것을 되돌리지 못했으니.
3위 경기 결과.
조 윤 호 (무) vs 한 철 수 (무)
“청색, 목! 시합 끝!”
“···큭, 젠장···!”
두 번 연속으로 이어지던 무승부의 행진이 끊어진 건 중견 순서에서였다.
백지호가 영준을 상대로 ‘퇴격 머리’와 ‘퇴격 허리’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2점을 얻어 당당히 승리를 차지한 것이다.
분명 영준이 특기인 ‘작은 머리치기’로 1점을 얻어 내며 기분 좋게 시작했는데, 그것을 뒤집어낸 역전승이었다.
‘아직 부족해. 아직-’
그런데도 백지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목표로 삼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곳에서 발목을 잡혀 있다간, 언제가 돼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괴물의 영역에 들어서야 하는 법!
때문에 백지호는 괴물이 되고자 했다.
만족을 모르는 괴물이.
중견 경기 결과.
최 영 준 (패) vs 백 지 호 (승)
“그만! 시합 끝!”
마지막 ‘잇는 순서’인 5위 경기는 무승부였다.
다만 앞선 경기들과는 조금 다른 무승부였는데, 1점씩 나눠 가지며 끝났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장현성과 김민재는 서로 유효 득점을 아예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두 사람이 어설프게 다투었느냐,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치열하기는 이전 시합보다 더했다.
중견 순서에서 승부가 원점으로 돌아간 이상, 여기서 이기는 쪽이 다시 기세를 가져갈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서로 맹렬하게 달려들 수밖에!
그저 그러고서도 한 번의 유효 격자도 내주지 않은 채 무승부를 낸 것이 대단할 따름.
5위 경기 결과.
장 현 성 (무) vs 김 민 재 (무)
“─그만! 시합 끝!”
“또 무승부! 이걸로 네 번째다.”
“와, 진짜 치열하네.”
“광천고랑 경중고, 둘 다 장난 아닌데···?”
놀랍게도, 부장 순서 경기 또한 무승부였다.
일곱 번의 경기 중에서─대표전을 포함하면 여덟 번이다─무려 네 번의 경기가 무승부라는 결과를 얻게 된 거다.
이는 광천고와 경중고 주전 사이의 격차가 정말 종이 한 장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누가 이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부장 경기 결과.
김 경 진 (무) vs 김 우 비 (무)
─용호상박(龍虎相搏)!
마지막 경기인 주장전만을 남긴 지금.
광천고와 경중고의 결승전을 간단히 평가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승부의 무게추는 어느 한쪽으로 쉽게 기울어지지 않았고, 두 고교의 검도부는 정말 박 터지듯 치열하게 싸웠으니까.
1승 4무 1패라는 보기 드문 경기 결과는 그들이 얼마나 격하게 맞붙었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보여 주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주장전뿐이야.’
‘과연 백성호가 이성현을 꺾을 수 있을까?’
막상막하의 결승전 전개에 감탄하면서도, 관객들은 속으로 승부를 가늠해 보았다.
이제 주장 순서만이 남은 상황.
광천고와 경중고 모두 1승 1패를 나눠 가졌으므로, 주장전 결과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된다.
즉, 누가 이기느냐가 곧 그 학교의 승리가 된다는 뜻이다.
과연 둘 중 누가 왕이 될 것인가?
‘상대 전적만 보면 무조건 이성현 선수잖아.’
‘하지만 천재라 불리는 백성호라면···.’
‘그 말도 안 되는 재능이라면 몇 달 만에 뭘 해 왔을지 모른다고.’
단순히 전적만 본다면 성현이 압승하리라.
이미 그는 백성호를 상대로 회장기 검도 대회에서 단체전 결승과 개인전 결승을 연달아 승리하며 상대 전적에서 우위에 섰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백성호의 승리를 점치는 건 그가 여태까지 고교 검도에서 보여 준 업적 때문이었다.
보여 준 게 있다 보니, ‘백성호라면 아직 모른다···.’라고, 무심코 생각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백성호는 말도 안 되는 재능으로 겨우 몇 달밖에 되지 않는 시간을 통해 엄청난 실력 향상을 이루어 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게 한국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공공연히 천재라 불리는 백성호의 힘이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한 기대를 품은 게 그들뿐만이 아님을.
오히려 관객들보다도 더 많이, 더 열렬하게 백성호가 강해졌음을 바라는 이가 있었으니.
‘과연···.’
성현은 가늘게 뜬 눈으로 백성호를 보았다.
중단세를 취하고 있는 그에게서는 이전보다 더한 위압감이 깃들어 있었다.
한눈에 간파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성장한 거다.
과연 불합리의 결정체라고 할까.
물론, 그 사실에 그가 분노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또한 바라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더 강해져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를 말이다.
“─시작!”
심판의 구령과 함께, 마침내 시작된 주장전!
성현은 천천히 백성호를 향해 나아갔고, 그건 백성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며 죽도가 맞닿는다.
일족일도의 거리!
‘가장 치열한 거리’라고 불리는 그곳에 성현과 백성호 두 사람이 들어선 것이다.
한층 더 고조된 긴장감 속에서.
먼저 이를 드러낸 건 백성호였다.
스윽-
백성호는 자신의 죽도로 성현의 죽도를 내리누르려 시도했다.
그로써 위치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중심 싸움에서 이득을 취해 상대를 흔들기 위함이었다.
여차하면 그대로 치고 들어가도 됐다.
‘죽도 눌러 머리’나 ‘죽도 눌러 손목’ 등이 바로 그런 식의 기술이었으니까.
‘호오?’
당연하게도 이를 가만히 지켜볼 성현이 아니다.
그는 비스듬하게 손목을 틀어 백성호의 죽도를 오히려 끌어내리려 했다.
내리누르는 걸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역으로 그걸 이용해 다시금 자신의 중심을 지키고 상대가 과하게 움직이게 하려는 수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백성호가 조용히 물러났다.
짧은 순간에 노려 봐야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해, 과감히 손을 거둔 거다.
‘공세 쪽을 단련해 온 건가.’
‘어설프게 들어가면 당한다.’
성현과 백성호는 찰나의 공세를 통해 서로를 읽어 냈고, 더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이는 회장기 검도 대회와는 사뭇 다른 전개였다.
당시에는 일 합 싸움으로 단숨에 결판이 났었다.
반면, 지금은 공세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중심 싸움으로 경기가 이어지고 있었으니.
그러나 경기의 치열함만큼은 그때보다 더했다.
첫 만남이었던 회장기 때와는 달리, 지금은 서로의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애초에, ‘가장 치열한 거리’라 불리는 일족일도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공세 싸움이기도 했으니 더 말해서 무얼 하랴.
‘그 짧은 사이에 여기까지···!’
공세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는 백성호를 보며 성현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말이지, 만족스러웠던 까닭이다.
상대가 보여 주는 강함이.
겨우 몇 달 만에 이 정도까지 따라올 수 있다는 사실도 그가 느끼는 만족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밟고 올라갈 발판이 든든할수록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어설퍼!’
“흐읍!”
성현이 짤막한 기합과 함께 한 걸음 내디뎠다.
동시에 백성호의 죽도를 3분의 2 지점에서 옆으로 엮듯이 꺾었는데, 상대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공세였다.
물러서서 태세를 정비할 것이냐, 아니면 마찬가지로 공격적으로 나설 것이냐.
백성호가 택한 것은 후자였다.
‘여기서 흐름을 잡는다···!’
이어지는 공세 싸움에서 백성호는 서서히 자신이 불리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가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지녔고, 공세를 꾸준히 단련해 왔다고 해도, ‘불패’라 불렸던 괴물을 넘어설 수준은 아니었기에.
그렇기에 지금이다.
상대가 먼저 치고 나온 지금.
이 순간에 역으로 흐름을 거머쥐지 못하면, 공세에서 말려 먹혀들 뿐이니.
타악!
이를 악문 백성호가 걸음을 내디뎠다.
성현이 한 발 앞으로 나선 것처럼.
과감하게 공격적으로!
일족일도의 거리에서 서로가 한 발씩 앞으로 나섰으니, 자연히 둘 사이의 거리는 바싹 좁혀졌다.
어느 한쪽이 격자를 시도해도 될 만큼.
백성호의 눈동자가 사납게 타오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금!’
“하아아앗-!”
꺾이려는 죽도를 힘껏 쳐들며 시도하는 격자!
백성호는 자신을 옆으로 꺾으려는 성현의 죽도를 역으로 넘겨 버리며 머리를 노렸다.
공세에 대한 방어와 반격을 한꺼번에 이루어 내는 한 수였다.
그러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건 그만이 아니었으니···.
“하아압-!”
성현이 기부림을 내지르며 오른발을 박차 몸을 뒤로 휙 빼냈고, 왼발이 땅에 닿기 전에 다시금 오른발을 굴렀다.
그와 더불어 상대가 머리치기를 시도하며 드러낸 허리를 향해 옆으로 넘겨졌던 죽도를 휘두른다.
완벽한 기세의 ‘퇴격 허리’!
타다악!
거의 동시에 두 개의 타격음이 울렸다.
하나는 백성호의 죽도가 성현의 머리를 내려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현의 죽도가 백성호의 허리를 두들기는 소리였다.
하지만 백성호는 심판이 결과를 외치기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백색, 허리!”
백성호의 생각대로 심판이 들어 올린 것은 광천고가 쓰고 있는 백색의 깃발이었다.
‘설계에 제대로 당해 버렸네.’
아마도 양자택일을 강요했을 때부터 이후의 전개를 설계했으리라.
백성호가 어떤 식으로 나가든 자신이 원하는 흐름으로 이끌어 올 수 있도록.
그에 대해 짐작했기에 무리했다 싶을 만큼 과감하게 앞으로 나선 것이었는데, 그것조차 성현의 설계 안에 있던 거다.
이건 단순한 예상일 뿐이지만, 어쩌면 공세 싸움에서부터 전부 성현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후우우-”
백성호는 두 판째를 준비하는 성현을 바라보았다.
알면 알수록 말도 안 되는 괴물이지 않은가.
대체 어떤 부분이 약한지 짐작도 가지 않을 지경!
하지만, 그래서 더욱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산이 높을수록 올라갈 때의 쾌감이 큰 법이므로.
‘준비해 온 방법을 쓸 차례다.’
지난 몇 달간 공세만을 단련해 온 게 아니다.
백성호가 준비해 온 무기는 또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을 이제부터 보여 줄 생각이었다.
< 고교 검도계의 제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