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근간 싸움
‘용암고도 8강 상대였던 금제고처럼 출전 순서를 바꿀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건 비단 검도라이프 매거진의 기자 권도연만이 아니었다.
꽤 많은 관객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추측했고, 그들 중에는 단순한 팬이 아닌 업계 관계자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출전 순서 변경이라는 수를 쓰지 않고 꽝 붙었을 때, 용암고가 이길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철이 버티고 있는 선봉은 물론이고, 차기 에이스였던 영준이 버티고 있는 중견 또한 든든하다.
거기에 주장을 맡은 건 ‘괴물’ 이성현!
이미 광천고로서는 3승을 확보했다고 봐도 좋은 상황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나마 약하다고 알려진─금제고와의 경기를 보면 또 그것도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는 그랬다─잇는 순서를 노리는 게 아니라면 승리하기는 쉽지 않을 터.
광천고 용암고
선봉 정 철 김 현 우
2위 손 대 현 정 재 일
3위 조 윤 호 하 성 우
중견 최 영 준 강 찬 울
5위 장 현 성 이 도 찬
부장 김 경 진 김 지 운
주장 이 성 현 김 규 호
웅성웅성.
“출전 순서가 그대로네?”
“정면 승부를 해 보겠다는 건가.”
“사실 학생 검도라면 저게 맞죠. 괜히 순서를 바꿔서 이긴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질 걸 알면서 그대로 가는 건 좀···.”
아마도 그래서였으리라.
출전 선수 명단이 설치된 TV 모니터에 비쳤을 때, 지켜보던 관객들이 웅성거린 것은.
애초에 출전 순서를 바꾸는 건 여러모로 의견이 갈리는 방법이었다.
전략적으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고, 그렇게 강한 상대를 피하면서 얻은 승리가 과연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각각 존재했으니까.
그런즉, 어느 쪽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용암고는 어찌 되었든 맞서는 걸 택했다.
어떤 결과를 얻든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게 용기 있는 선택이라는 거다.
“···의외라는 반응이네요.”
“흥.”
코치의 말에 용암고 감독을 맡은 구영철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가당찮다는 반응이었다.
실제로 구영철 감독은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단 한 번도 출전 순서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주장인 김규호를 비롯한 주전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그게 용암고의 검도부였다.
“다들 순서를 바꿀 거라 생각했나 봐요.”
“금제고가 먼저 한 번 바꿨으니 우리도 바꿀 때 부담이 없겠다 생각한 거지.”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웃기는 소리지. 학생 선수가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해서 뭐가 남는다는 건지.”
“결과를 내야만 하는 건 어른이 된 후의 이야기인데.”
하고 구시렁거리듯 덧붙이는 구영철 감독을 보며 코치가 작게 웃었다.
뭔지 모를 이유로 웃는 코치를 한 차례 쏘아본 구영철 감독이 주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열의로 불타는 그들의 모습에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서 한 방 먹여 주고 와라!”
““알겠습니다!””
““용암고 파이팅-!””
우렁찬 외침과 함께 시작된 4강 경기.
용암고는 광천고를 상대로 자신들이 갈아 온 칼을 거침없이 내보였다.
지난 회장기 대회 이후, 이를 악물고 추계 전국 대회를 준비한 건 비단 광천고나 금제고, 호군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언더독의 반란’의 시작을 알리는 제물이 된 용암고 또한 이때만을 기다리며 실력을 키워 왔다.
8강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는 그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기에.
“청색, 머리!”
“아자아─!”
그 노력은 실로 대단해서, 정철을 상대로 나선 용암고의 선봉, 김현우가 한 번의 득점을 성공시키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번 추계 대회에서 세 번의 경기를 치르며 한 번도 점수를 빼앗긴 적 없는 정철에게 말이다!
“백색, 허리! 시합 끝-!”
다만 용암고에는 안타깝게도, 선봉 순서의 시합에서 승리를 거머쥔 건 정철이었다.
점수를 빼앗기기 무섭게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정철은 무자비한 기백으로 승리에 필요한 나머지 1점을 뜯어 갔다.
이전보다 흉포해진 그의 공격을 김현우는 더 견뎌 내지 못한 것이다.
“청색, 손목! 시합 끝-!”
“으아아아아-!”
광천고와 용암고의 2위 시합 결과는, 놀랍게도 광천고의 패배였다.
8강에서 상대를 얕보다가 연장전에서 패배했던 용암고 2위 정재일은 이번에는 시작부터 치열하게 대현을 밀어붙였고, 기어코 승리를 쟁취해 내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지난번 시합과 같으리라 생각했던 많은 이의 예측을 뒤엎는 결과였다.
‘이게 빅4의 저력인가.’
금제고 선봉을 상대로 무승부를 내며 자신감을 가졌던 대현은 패배 앞에서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 실력을 갈고닦아서, 확실한 1승을 보장하는 순서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 가르쳐준 성현에게 체면이 설 테니···.
이어진 3위 순서의 시합 결과는 무승부!
과거 회장기 검도 대회 8강에서 0:1로 패배했던 윤호가 복수를 성공한 거다.
물론 그가 만족했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무승부는 완벽한 복수라고 할 수 없었으므로.
‘내가 이겼어야 했는데.’
무승부.
서로 한 개의 점수만을 상대에게 빼앗아 만들어진 이 결과를 윤호는 달갑잖게 받아들였다.
이미 한 번 패배라는 쓴맛을 본 뒤였으니, 상대에게도 똑같은 맛을 먹여 줘야 진짜 복수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의 두 눈은 다음을 노리며 불타올랐다.
패배에서 무승부까지 끌어올렸으니, 이제 남은 건 승리밖에 없지 않은가?
“시합이 이렇게 되네.”
“출전 순서를 안 바꾼 이유가 있구만.”
“이거, 금제고보다 용암고가 더 강하다는 거 이걸로 증명된 거 아니야?”
“음- 확실히···.”
그렇게 시합이 중반부로 들어갔을 때 기록된 결과는 각각 1승 1무 1패!
승부의 저울추는 완벽하게 평행을 이루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저울추는 중견 순서의 시합으로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중견 시합의 결과 또한 무승부였다는 뜻이다.
“내가 이번엔 다를 거라고 했잖아요, 영준이 형!”
“강찬울, 너 이 자식-”
처음에는 안 좋은 인상으로 얽혔다가 국가 교류전을 통해 친해졌던 두 사람, 영준과 강찬울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진심 어린 분노라기보다는 상대를 향한 호승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표현이었다.
지난번에는 허점을 찌르고 도발로 심기를 흔들며 승부를 가져갔던 영준은 칼을 갈고 나온 강찬울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강찬울도 마찬가지로, 끝내 그들은 1점씩을 사이좋게 나눠 가지며 무승부라는 결과를 얻어냈을 뿐이다.
“청색, 머리! 시합 끝!”
이윽고.
5위 순서에서 용암고로 기울었던 저울추는.
“백색, 손목! 시합 끝!”
부장 순서에서 다시금 광천고 쪽으로 기울며 평행을 이루었다.
추계 전국 대회 4강 경기 광천고 대 용암고.
주장 순서 경기만을 남겨 둔 채, 현재 2승 2무 2패─
이제 남은 건 주장 순서뿐이었다.
“주장···.”
김규호는 자신을 향해 모이는 부원들의 시선에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2승 2무 2패라는 성적에 담긴 의지를 읽어 낼 수 있었으니까.
그건 어떻게든 그의 순서까지 이어 주기 위해, 부원들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악착같이 매달려서 만들어 낸 결과였다.
패배가 결정된 상태로 주장을 시합에 내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의미다.
“걱정하지 마.”
그렇기에 더더욱 김규호는 무덤덤한 태도를 고수했다.
자신이 흔들릴수록 부원들 또한 흔들린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디 주장이란 건 그런 위치였다.
부원을 생각해서라도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이기고 올 테니까.”
설령 불가능한 일에 도전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힘내십쇼, 주장.”
“응원하겠습니다!”
“제대로 한 방 먹여 주세요!”
강찬울을 비롯한 부원들의 응원을 등에 입은 김규호가 시합장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느릿한 걸음으로 시합장에 들어서는 성현에게서는 불길하고도 음울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림자 진 면금 속, 고요히 가라앉은 두 눈동자를 마주한 김규호는 쓰게 웃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런 걸지도.’
솔직히 말해서, 김규호는 본인이 이길 확률을 그리 높게 보고 있지 않았다.
상대는 ‘천재’마저 꺾은 ‘괴물’.
고작 몇 달 바짝 피 말리는 훈련을 해서 이길 수 있었다면, 이미 옛날 옛적에 그가 백성호를 이겼었으리라.
그러니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신이 궁구한 ‘답’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후우우···.”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중단세를 취한 김규호.
성현 또한 죽도를 들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단지 그것뿐인데도 김규호에게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누군가 심장을 손으로 움켜쥐기라도 한 듯이.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주심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짧고 굵게 소리쳤다.
“시작!”
“······.”
“······.”
시합 시작을 알리는 구령이 떨어졌음에도, 두 사람은 마주 선 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응시하며 중단세를 유지할 뿐.
처음에는 이 기묘한 정적 앞에서 수군거리던 관객들은, 이내 하나둘씩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성현과 김규호, 두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압박감이 흘러넘치듯 관객석까지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회장기 결승전에서 성현과 백성호가 만들어 냈던 그 분위기와 같았다.
꿀꺽.
‘서로에게 진검을 겨누고 있는 것 같군.’
‘이성현과 백성호의 경기가 딱 이랬지!’
‘고등학생 선수의 경기에서 또 이런 분위기를 느낄 줄은 몰랐는데.’
겨루고 있는 사람이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똑같이 놀라운 압박감이 든다는 것에서 당황한 관객은 그다지 없었다.
이전에도 한 번 이런 모습을 보였던 성현은 말할 것도 없고, ‘김규호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라는 생각이 있었던 까닭이다.
성현이 나타나기 전, 고교 검도 학생 선수 중 당장 실업 검도에 나가서 활약할 수 있는 이를 꼽으라면 김규호가 빠짐없이 들어갔었으니까.
학생 선수계의 어나더 레벨.
김규호는 그런 이였다.
물론 관객들의 반응은 겨루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는 터라, 주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에.
“──후.”
영원토록 이어질 것 같았던 대치.
정적 속에 계속되던 상황을 깨부수며 성큼 걸음을 내디딘 건 다름 아닌 김규호였다.
그는 대담하면서도 세심한 움직임으로 두 사람이 유지하고 있던 먼 거리, 즉 원간(遠間)에서 더욱 안으로 파고들었다.
한 걸음 뛰어들면 타격할 수 있고, 반대로 물러서면 피할 수 있는 간격인 일족일도(一足一刀)의 거리까지 말이다.
죽도의 선혁이 스치며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확 늘어난 그 순간, 김규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리하여 다시금 성큼 내디딘 한 걸음.
김규호는 일족일도의 거리마저 넘어, 서로가 서로의 칼끝에 서는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섰다.
찰나보다도 더 짧은 시간에 결판이 나는 거리.
한순간의 방심이 승패를 결정짓는─
‘─근간(近間) 싸움!’
호면 속 성현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방금까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사납고 맹렬한 시선으로 그는 바로 앞까지 다가선 김규호를 노려보았다.
‘이게 규호 형이 찾아낸 답인가?’
< 가장 위험한 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