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잠재력만 본다면
-광천고가 금제고를 이겼다!
추계 전국 대회 8강에서 벌어진 사건은 은은한 충격이 되어 고교 검도 팬들을 휩쓸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용암고를 시작으로 빅4 중 최강이라는 경중고까지 광천고에게 패배한 상황.
단지 빅4 중 하나일 뿐인 금제고가 패배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한데도 이게 충격으로 느껴진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금제고가 출전 순서까지 바꿔 가며 이기려 했고, 그런데도 졌다는 거다.
고교 검도계에서 출전 순서를 바꾸는 건 암묵적으로 지양하고 있는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학생 검도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결과를 내야만 하는 실업 검도와는 달리, 학생 검도는 설령 패배할지언정 거기서 더 많은 걸 배우고 발전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는 게 옳기에.
금제고는 이런 암묵적인 지양을 어기고, 순서를 뒤바꿈으로써 승리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금제고가 그리함으로써 검도 팬들이 알게 된 건 광천고의 강함이었다.
광천고는 어느 순서의 선수도 빅4의 주전을 상대로 밀리지 않으며 실력을 뽐냈다.
몇몇 순서에서는─선봉이라든지, 중견이라든지, 혹은 주장 같은─아예 금제고를 압도하여 현 고교 최강의 이름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까지 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초에 있었던 춘계 전국 대회에서 그들이 거뒀던 초라한 결과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두 번째 이유는 금제고의 패배로 인해 드디어 지난 몇 년간 빅4로 대표되는 고교 검도계의 구도가 무너졌다는 점이었다.
경중고가 가장 위에서 패권을 지키고, 그 아래를 용암고, 호군고, 금제고가 바싹 쫓는다.
이건 지난 삼 년간 변함없이 유지되던 구도다.
그것도 다른 고등학교는 감히 깨뜨릴 수도, 심지어 넘볼 수조차 없이 견고한.
삼 년이면 한 사람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의 시간!
고교 검도에서는 ‘한 세대’라고 불러도 무방한 시간인데, 그동안 굳건하게 지켜졌던 구도가 마침내 붕괴한 것이다.
막연히 빅4 구도가 계속될 거라 생각했던 이들에게 이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앞으로 고교 검도계가 어떻게 재편될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관객석에서 남녀 한 쌍이 느긋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광천고가 당연하다는 듯 A조 진출자가 됐네요.”
“B조에서는 용암고가 호군고를 이기고 4강에 올랐죠. 빅4 내의 두 번째 서열 정리··· 군요.”
“지난 회장기에서 경중고가 금제고를 상대로 이겼던 것처럼요?”
“네, 맞아요.”
‘검맨’ 김동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이내 픽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이제 빅4라는 단어도 우습지만 말이죠.”
“그것도 그렇네요.”
키득거리며 대답한 건 권도연이었다.
회장기 대회에서 김동안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던 검도 매거진의 기자!
성현을 비롯한 광천고에게 우승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선전 포고를 잡지에 실었던 그녀가 김동안과 함께 관중석에 있었던 거다.
“4강에 진출한 건 A조 광천고, B조 용암고, C조 상포고, D조 경중고까지 네 학교네요.”
“으음, 그럼 광천고랑 용암고, 상포고랑 경중고가 붙는다는 건데···.”
“상포고는 대진 운이 좋아 4강까지 올라온 거지, 경중고를 이길 만한 실력이 있진 않아요. 결승전 중 한 자리는 이미 정해졌네요.”
“중요한 건 광천고와 용암고의 경기라는 말씀이시군요.”
“당장은 그렇죠.”
김동안이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막 경중고의 경기가 끝나고, 정리하고 있는 그곳을 보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광천고와 용암고.
회장기 대회 8강에서 한 번 맞부딪쳤던 두 학교가 다시금 싸운다는 건 그에게도 썩 흥미로웠다.
당시 광천고가 기록한 성적은 4승 1무 2패.
일개 약소부가 빅4를 상대로 냈다고는 믿기 힘든 성적이었다.
그게 과연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광천고가 더 강해졌을지, 그도 아니면 용암고가 역습을 시작할는지···.
“용암고는 주장전까지 가기 전에 승부를 가리고 싶어 하겠죠. 금제고가 그랬듯이.”
권도연의 말에 김동안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암고가 출전 순서를 바꿀 거라는 말씀입니까? 금제고가 광천고를 상대로 그랬듯이?”
“어쩌면요. 작은 가능성일 뿐이지만.”
“글쎄요. 과연 용암고가 그런 선택을 할지는 의문이군요.”
용암고의 두 유망주, 김규호와 강찬울에 대한 분석 글을 썼던 김동안은 출전 순서를 바꿀 거라는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그가 본 그들은 설령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출전 순서를 바꿔 가며 억지로 승리를 하느니, 차라리 정면에서 맞부딪쳐서 패배하는 것을 택할 이들이라는 뜻이다.
“제가 용암고 감독 생각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권도연은 저 멀리서 나오고 있는 광천고 선수들 쪽에 시선을 던졌다.
담담한 태도로 웃으며 나오는 이들.
모든 고등학교를 상대로 거침없이 선전 포고를 한 현 고교 최강의 검도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저들은 비로소 고교 검도계 끝판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 기적 같은 성과에는.
이성현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중심에 있었다.
“···공식전에서 전승을 거둔 괴물한테 승부를 걸고 싶지는 않을 텐데요.”
공식전 전승.
시합에 나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경악스러운 기록.
본래에는 격이 다른 재능으로 ‘천재’라 불린 백성호만이 가지고 있던 기록이었지만, 그것을 정면에서 깨뜨리며 강탈해 간 건 ‘괴물’ 이성현이었다.
‘전승의 괴물’이라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별명인지.
“학생 검도가 아니었다면 그랬겠죠.”
“유망한 학생 선수가 벽을 마주하고 꺾이는 걸 막는 것도 감독의 역할 아닐까요?”
“김규호 선수가 그렇게 꺾일 만큼 약하지 않을 겁니다.”
“흐흥- 그런가요?”
“······.”
“······.”
김동안과 권도연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추계 전국 대회 4강 첫 번째 경기.
광천고 대 용암고의 시합이 이제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기에.
*
‘용암고.’
성현은 가늘게 뜬 눈으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용암고등학교와의 시합은 그의 기억 속에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오히려 더 높은 4강에서 만났던 호군고와의 시합보다도 더, 어쩌면 경중고와의 시합만큼이나.
그 정도로 김규호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의미다.
단순히 과거로 돌아와 처음으로 만난 진짜 실력 있는 유망주였기 때문은 아니다.
김규호는 ‘전’에 성현이 겪었던 이들을 모두 합쳐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수 있을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십 년에 가까운 성현의 검도 인생에서 열 손가락 내라는 건 정말 엄청난 극찬이었다.
그게 지금의 김규호였다.
그래서 더욱 성현은 기대를 하는 것이고.
‘얼마나 더 발전했으려나.’
학생 선수의 시간은 실업 선수의 시간과 전혀 다른 밀도를 지닌다.
본래 고등학생 시기란 그렇다.
이때야말로 아직 성인이 되기 전,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니까.
당장 광천고 주전들만 봐도 그러했다.
누가 지금의 그들을 보고 연초까지만 해도 32강에서 빌빌댔던 약소부라고 생각할 것인가?
그들이 빅4의 주전들을 제치는 것에 필요한 건 겨우 몇 달의 시간뿐이었다.
바로 그게 학생 선수의 시간 밀도였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또 다르다.
김규호 또한 그 학생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런즉, 회장기 대회부터 발전했을 그의 실력은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망주 대회 때보다 더 늘었겠지.’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성현의 상념을 깨뜨린 건 옆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대현이 그를 향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냥, 상대 좀 보고 있었습니다.”
“용암고라. 참, 그랬지. 김규호가 만난 상대 중 제일 강했다고 했었나?”
-지금까지 만난 상대 중에서 제일 강했어요.
-그 정도야?
-네.
-검도 유망주 대회 포함?
-네. 전부 다 합쳐서.
이전, 용암고와의 경기 때 대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흐음, 그럼 백성호랑 비교하면 어때? 넌 두 사람이랑 다 겨뤄 봤잖아.”
“둘 다 이기기도 했고.”
라고 덧붙인 대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하다 보니 썩 우스웠기 때문이다.
누가 강하니, 어쩌니 해도 결국 성현이라는 절대자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도토리 키재기일 뿐임을 새삼 깨달았기에.
광천고 검도부 내에서 우스갯소리로 성현이 소년 만화 전개를 따라가는 최종 보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대현은 그게 정말 딱 들어맞는 비유라고 생각했다.
약소부를 이끌고 차근차근 최강의 자리에 도전하는 최종 보스라니.
누가 봐도 성현을 말하는 내용이 아닌가?
“성호 형이랑 비교한다면···. 음-”
대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성현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김규호와 백성호.
두 사람 모두 성현이 과거로 오며 새롭게 알게 된 재능 있는 이들이었다.
사실 김규호는 ‘전’에도 만나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그는 지금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어떨까.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슬쩍 옆에서 끼어든 건 윤호였다.
대현과 성현이 나누는 대화가 퍽 흥미로웠는지, 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주전들도 경기를 준비하며 은근히 성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
하기야,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백성호와 김규호라는 학생 검도계의 천상계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끝판왕의 입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만약 고교 검도 관계자라면 돈을 내고서라도 듣고 싶을 터.
피식 웃은 성현이 말했다.
“일단, 재능 자체만 보면 성호 형이 우위입니다. 아무래도 별명이 별명이니까.”
“하긴, 괜히 ‘천재’라 불리겠어?”
“김규호도 만만찮을 텐데.”
“그랬으면 옛날에 이겼었겠지.”
대현과 윤호는 자신들이 단짝 친구라는 것을 증명하듯 죽이 척척 맞았다.
성현이 재능에 관해 짧게 이야기하자마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더니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것이다.
“하지만 잠재력만 본다면, 저는 규호 형도 만만치 않다고 봅니다.”
“잠재력?”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느냐를 따지는 거죠.”
성현이 떠올린 건 김규호의 두 모습이었다.
백성호가 교통사고로 죽었던 ‘전’의 김규호.
아직 백성호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고등학생 김규호.
분명 똑같은 인물일진대, 아예 다른 두 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성현과 백성호라는 두 목표가 있는 지금의 김규호 또한 그러했다.
“규호 형은 목표가 있으면 절대 멈추지 않는 타입이에요. 성호 형을 목표로 잡았을 때도 그랬죠. 한데 지금은-”
“너까지 있으니까.”
“진짜 미친 듯이 달린다 이거구나.”
고개를 끄덕거리는 대현과 윤호에게서 시선을 돌린 성현은 맞은편을 바라봤다.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뜨거운 투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불타오르는 것 같은 시선.
김규호가 정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국가 교류전 때 몇 번이나 느꼈던 시선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투지로 가득 찬.
그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김규호는 그를 노리고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았으리라.
‘재밌구나.’
성현은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벌써 주장전이 기대된다는 듯이.
< 근간 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