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이게 광천고인가
‘이게 광천고인가?’
괜히 현 고교 최강의 검도부가 아니라고 포효하는 것 같은 모습!
가장 약하다는 잇는 순서마저 빅4의 선봉과 붙어서 비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으니.
은우는 빅4와 광천고를 두고 어디로 진학할 것인지를 재던 마음속 저울이 조금이나마 더 후자 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본래 보려 했던 이, 광천고의 주장이자 ‘괴물’ 이성현이 아닌 광천고 주전에 의해서.
“3위전이다.”
“응.”
무승부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낸 2위전이 끝나고, 곧바로 이어진 3위전.
광천고의 3위로 나온 건 이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조윤호였고, 반면 금제고의 3위는 본래 중견이었던 김성찬이었다.
아까의 격렬했던 시합은 거짓말이라는 듯, 3위전은 고요하면서도 날카롭게 진행되었다.
사실 이는 선수 스타일의 차이기도 했다.
서로가 공격적이었던 2위전과는 달리, 3위전을 치르는 두 고등학생은 한쪽은 공세로 흔드는 운영을 선호하고, 한쪽은 기다렸다 반격하기를 특기로 삼은 이였으니까.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긴장감만큼은 이전 경기 못지않았다.
2위전이 마구 휘몰아치는 태풍 같았다면, 3위전은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폭탄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생 선수들에게는 이쪽이 더 배울 게 많은 경기이기도 했다.
공세라든지, 상대를 살피는 기술 같은 것들을.
선봉전은 너무 실력 차이가 컸고, 2위전은 미친 듯이 치고받느라 생각할 틈도 없이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
“······.”
일족일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상대를 똑바로 노려보는 조윤호와 김성찬.
두 선수는 누구 한 명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짧은 공세로도 서로의 실력을 깨달았기에 혹여나 무리수가 될지 모를 행동을 꺼린 것이다.
이 또한 금제고에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선봉, 중견 싸움을 포기하고 2위, 3위 싸움에 전부 쏟아부었는데, 거기서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는 꼴이잖은가.
꾸욱!
치열하게 이어진 공세에서 조윤호의 죽도가 김성찬의 죽도 끝머리를 제대로 내리눌렀다.
그것을 받아 내기 위해 김성찬이 팔에 힘을 주는 순간, 조윤호의 두 눈에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기회를 노리던 사냥꾼의 눈빛!
“우랴아앗-!”
평소의 냉정한 성격과는 달리 화끈한 기부림을 토해 내며 조윤호가 달려들었다.
노리는 것은 김성찬의 손목!
내디디는 발 구름과 함께 죽도가 필요 최소한으로 간결히 휘둘러졌다.
그저 되는 대로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만큼 적절하게 힘을 실어 내지르는, 완성도 높은 기술이었다.
일반적인 고교 검도부의 3위였다면 여지없이 점수를 빼앗겼으리라.
“흡-!”
하나 상대는 본래 중견의 순서를 맡았던 이.
김성찬은 조윤호의 공격을 재빠르게 팔을 비틀어 막아 내고야 말았다.
첫 공격에 실패한 뒤 조윤호가 혀를 차며 기민한 머리치기가 이어나갔지만, 김성찬은 그조차 예상했다는 듯 몸을 틀어 흘려내 버렸다.
앞서 두 번의 공격에 실패한 이상, 기회는 김성찬에게 넘어간 셈!
본래 반격에 치중하는 스타일인 김성찬이 이 좋은 기회를 그저 넘겨 버릴 리가 없다.
“흐아압-!”
발을 스치듯 내미는 것과 동시에, 양팔을 안쪽으로 짜듯이 하는 찌르기!
몸의 무게 중심이 앞쪽으로 쏠려 있던 조윤호가 쉬이 피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절레.
죽도가 제대로 목 보호대를 찔렀음에도 주심이 고개를 저었다.
점수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저걸 반응해?”
“···미쳤네.”
은우와 서준이 혀를 내둘렀다.
죽도가 목 바로 앞까지 도달한 아찔한 상황에서 조윤호는 재빨리 칼을 다시 세웠다.
김성찬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칼끝을 살려 점수를 빼앗기는 것을 막은 거다.
상대의 찌르기가 목에 도달하기 전, 그 짧은 순간에 그걸 결정하고 죽도를 세울 수 있다는 건 정말 냉철한 판단력이었다.
“이게 광천고 2위랑 3위.”
“만약 우리가 광천고에 입학한다면··· 3학년 형들은 졸업했더라도, 저 형들은 그대로 있다는 거잖아. 으음···.”
서준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2위전을 보고 광천고 입학에 마음이 기울었던 은우처럼 3위전을 본 서준 또한 빅4보다는 광천고가 괜찮게 느껴졌기에.
본래에도 광천고가 강호임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으로 주전에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아 매력적이었는데, 거기에 저런 선배들까지 있다면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저들은 2위와 3위일 뿐.
아직 중견, 그리고 현재 고교 검도계를 뒤흔들고 있는 ‘괴물’ 주장까지 있으니.
‘광천고로 진학한다는 거.’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선택인 거 같은데.’
“···시합 끝!”
3위전의 결과는 금제고의 승리였다.
그러나 금제고로서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던 까닭이다.
그것도 자칫 잘못했다가는 역으로 패배, 내지는 무승부까지 했을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게.
“금제고 완전 망했는데? 지금 중견전을 앞에 두고 1승 1무 1패잖아.”
“심지어 중견전은 광천고가 무조건 가져갈 테니까 1승 1무 2패지.”
“5위랑 부장전에서 무조건 한 번 이기거나, 아니면 두 번 다 비겨야 주장전에서 이기고 대표전까지 가서 이길 수 있다는 거네.”
두 사람이 추측해 보건대, 금제고는 2위, 3위, 5위의 ‘잇는 순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장전을 승리하여 주장전 전에 결판을 낼 계획이었으리라.
한데 가장 약하다 평가받던 광천고의 2위, 3위가 놀라운 저력을 발휘한 거다.
거기서 이미 계획이 어그러졌는데, 남은 이들도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는 상황.
심지어 마지막에 남은 건 ‘괴물’ 이성현이기까지 했다.
그를 두 번 연속으로 이기며 승리를 가져간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옛날 옛적에 금제고가 경중고를 넘어서서 고교 검도부 최강의 자리를 차지했을 터!
“···사실상 그냥 진 거 아닐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경기는 은우와 서준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중견으로 나선 최영준은 금제고의 중견을 박살 내며 승리를 거머쥐었고, 5위전은 금제고가 겨우 승리하며 숨통이 트이는 듯했으나, 부장전에서 불의의 일격을 맞고 패배하고 만 것이다.
그로써 주장전을 앞둔 상태에서 금제고가 손에 쥔 결과는 2승 1무 3패!
그들이 이번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주장전에서 1승을 더 쌓은 뒤, 이어진 대표전에서까지 연달아 승리해야만 했다.
그것도 한국을 넘어 세계를 두들겨 패고 다니던 ‘괴물’에게서.
“이번 차례가 바로 그···.”
“32강 경기 봤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유망주 대표팀 주장으로 나갔다는···.”
웅성웅성.
승부가 이미 결정된 맥빠진 상황.
그런데도 은우와 서준이 느끼기에, 관객석은 전보다 훨씬 더 소란스럽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다들 이번 주장전에 나올 이를 기대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리고 그건 은우와 서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기대에 찬 눈으로 경기장을 보았다.
사실, 단지 경기를 보기 위해서라면 차후에 검도라이프에 올라올 영상으로도 충분했다.
한데도 두 사람은 굳이 중학부 경기가 개최되기 전날인 오늘 사직체육관에 왔다.
그 이유?
“나왔다!”
“오오-!”
지금 두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붉게 상기된 은우와 서준의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동경의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두 소년은 국가 교류전에서 ‘이성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된 이후, 단숨에 성현의 팬이 되어 버렸던 거다.
거침없는 언행과 그를 뒷받침하는 실력은 아직 어린 소년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만했으니까.
하기야,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성인들조차 성현에게 환호했는데, 그보다 어린 중학생들이야 말해서 무얼 하랴.
그랬다.
두 사람이 부모님을 졸라 하루빨리 내려온 건, 성현을 직접 보기 위함이었다!
“저게 이성현···.”
“야, 이서준! 형이라 불러! 성현이 형!”
“무슨 쌉소리를- 아니, 알았어. 그렇게 부르면 되잖아. 성현이 형. 됐지?”
“그래!”
이처럼 국가 교류전의 여파는 직접 참가했던 이들의 생각보다 몇 배는 더 크고 거셌다.
생각해 보면,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많은 일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입국 인터뷰에서의 도발부터, 각국의 유망주들을 박살 내고,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모든 경기에서 이기는 전승의 위업까지.
그리고 그 대부분은 성현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그가 이처럼 유명해질 수밖에.
“시작!”
은우와 서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시작된 마침내 시작된 주장전!
두 사람이 자세를 잡은 걸 확인한 주심이 구령을 외친 직후, 경기장으로부터 무시무시한 기세가 서릿발처럼 뻗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시합을 치르는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상승효과 따위가 아니었다.
이렇듯 엄청난 압박감을 뿜어내고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성현이었으니까!
“와- 진짜 장난 아니다···.”
“멀리 있는데도 이 정도라고?”
어린 선수인 두 사람조차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하고 뚜렷한 기백.
단순히 지켜보고 있을 뿐인데도 이럴진대, 직접 상대하는 이가 얼마나 큰 위압을 느끼고 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죽도가 아니라 진검이 눈앞에 들이밀어진 것처럼 느껴질 터.
“으야아압-!”
금제고 주장, 권진혁은 억센 기부림을 내질러 자신을 북돋웠다.
하지만 그 자신도, 지켜보는 모두가 알았다.
겨우 저런 외침으로는 어깨를 짓누르는 강압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본래에도 압도적이었던 성현의 기세다.
거기에 그가 지난 반년간 쌓아 올린 업적이라는 후광까지 덧입혀졌으니, 어지간한 학생 선수라면 오금이 저리는 것도 당연했다.
단순히 몇 개의 대회를 우승하고, 뭐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잖은가.
한국까지 알려질 만큼 유명한 외국 유망주들이 저 앞에서 줄줄이 무너졌는데, 어찌 쉽게 발을 떼어 달려들까.
빠득.
“으야아압─!”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빅4는 빅4.
권진혁은 재차 기부림을 토해 내며 발을 굴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훅 좁혀지고, 깨끗한 궤적을 그린 죽도가 성현의 머리를 노렸다.
놀라우리만치 완성도 높은 머리치기였다.
자신을 향해 세워진 성현의 죽도를 빗겨 내면서도 속도는 죽이지 않는.
타아악-!
그러나 그 모든 게 무의미하다.
비스듬히 세운 성현의 죽도는 권진혁의 죽도를 가볍게 막아 세웠다.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잘 완성된 동작도, 깨끗하고 날카로운 죽도의 궤적도, 제대로 실린 기백마저,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건 ‘전’에 질리도록 봤었으니까.
지금의 그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필요했다.
‘천재’ 백성호나, 김규호 같은 이에게 있는.
그런 특별함 말이다.
“······.”
“으압! 으야압-!”
타악, 탁! 타아악-!
나름대로 자신이 있던 첫 일격이 막혔음에도 권진혁은 굴하지 않고 죽도를 휘둘렀다.
괜히 빅4 금제고의 주장이 된 게 아니라고 포효하는 것처럼 그의 연격은 굉장히 매서웠다.
상대가 일반적인 고등학생이었다면 얼마 버티지 못했을 만큼.
하나 권진혁에게는 안타깝게도.
그의 앞에 있는 건 일반적인 고등학생이 아니다.
일평생을 검도에 미쳐 살았고, 다시 되돌아온 지금마저 검도에 미쳐 있는 괴물이었다.
오싹.
단 한 번의 검격도 흘리지 않고 막아내는 모습에 은우와 서준은 소름이 끼쳤다.
앞서 영상으로 확인했던 것이지만, 직접 보니 다시금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방어였으니까.
너무 완벽한 나머지 성현이 내미는 죽도에 권진혁이 자신의 죽도를 가져다 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라면?’’
은우와 서준은 권진혁에게 자신을 대입해 보았다.
저곳에서 맞서는 게 본인이라면 성현의 중단세를 뚫어낼 수 있는가─답은 정말 간단히 도출되었다.
‘절대 못 뚫어.’
‘방법이 안 보인다고.’
뚫을 수 없다.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방법을 써도 절대로.
그렇게 두 중학생이 절망과도 같은 격차를 깨닫는 사이, 시합은 끝을 향해 달려갔다.
“······.”
연격 사이에 드러난 아주 작은 빈틈.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노출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성현은 놓치지 않았다.
“하아아압-!”
상대를 위압하는 강렬한 기부림.
오른발이 스치듯 나아가고 양손이 그에 맞춰 앞으로 쭉 내뻗어진다.
타악, 하고 발바닥이 지면에 닿는 그 순간.
이미 성현의 죽도 선혁은 권진혁의 호면 목 보호대에 정확히 맞닿고 있었다.
신속의 찌르기!
“커헉-!”
반응조차 못 하고 일격을 허용한 권진혁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연격의 사이, 호흡을 들이마시는 그 찰나를 꿰뚫는 찌르기가 그의 숨통을 막아 버린 까닭이다.
그가 비척대며 물러나기도 전에, 주심이 백색 깃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백색, 목!”
이제 겨우 첫 번째 득점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승기를 가늠하기에는 너무나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권진혁이 가한 수십 번의 공격은 무의미하게 막혔고, 성현은 단 한 번의 반격으로 점수를 뜯어갔는데 더 말해 무얼 하랴.
두 사람 사이에는 감히 넘지 못할 통곡의 벽이 존재했다.
이어진 두 판째는 단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무대였을 따름.
주장전에서 광천고는 ‘괴물’ 이성현을 앞세워 깨끗하게 2득점 승리를 거두었고, 그대로 16강 경기는 끝났다.
출전 순서 변경이라는 강수를 두었음에도 끝내 금제고는 광천고라는 고교 검도계의 새로운 왕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빅4로 대표되던 고교 검도계의 구도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 결정했어.”
“뭔지 알 거 같은데- 일단 말해 봐.”
“내년에 광천고로 진학할 거야!”
“역시나.”
“서준이 너는 어쩔 거야?”
“···뭘 물어? 당연히 나도 갈 거야.”
그리고 또한.
두 사람의 중학생 유망주들이 광천고에 입학하고자 마음을 먹는 순간이기도 했다.
< 잠재력만 본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