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86화 (86/150)

86화: 못 이겨, 지금은

“나도 알아. 자식아.”

친구, 김은우의 기운찬 재촉에 이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애초에 이처럼 늦은 원인이 무엇이었나.

바로 용변이 급하다며 화장실에 한참 동안 처박혀 있던 누구 씨 때문이 아닌가.

그래놓고 시합이 이미 시작했다느니, 잘못하면 다 놓친다느니 하며 호들갑 떠는 모습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오는 서준이었다.

“빨리~ 이러다 앞쪽 시합들 놓친다?!”

언제나 그랬듯 은우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십여 년 넘게 보아 온 소꿉친구의 여전한 모습에 서준은 재차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어휴- 그래. 가자, 가.”

“고고고-! 무브무브무브!”

호들갑스럽게 외치며 빠르게 달려가는 은우와 그 뒤를 못 이기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따라가는 서준.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사직체육관의 관객석이었다.

이제 막 시작하여, 한창 진행 중일 16강 A조 경기를 관람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이들이 경기를 보는 목적은 일반적인 관객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단순히 검도 경기를 즐기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향후 진로를 결정짓기 위한 정보를 얻으러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년에 어느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그게 무슨 뜻인지는 지금 대회의 명칭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짧게 줄여 부르기를 ‘추계 전국 대회’라 하지만, 본래 정식 명칭은 ‘추계 전국 중·고등학교 검도 대회’다.

즉,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중학생들도 이번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는 거다.

지금 이 두 소년, 김은우와 이서준처럼.

그랬다.

김은우와 이서준은 현재 재영중학교에 재학 중인 16살-중학교 3학년생이었다.

따라서 내년에 자신들이 진학할 고등학교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고등부 경기를 보러 온 것이다!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생각보다 늦어졌지만.

‘16강 첫 경기는 광천고라 늦으면 안 되는데.’

은우는 살짝 초조함을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광천고 시합─심지어 상대가 빅4인 시합이다!─만큼은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장기 대회를 정복함으로써 명실상부 현 고교 검도계 최강의 자리를 차지한 학교의 저력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중학생들에게, 특히나 내년에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중학교 3학년 학생 검도 선수들에게 광천고는 꽤 유명했다.

어느 정도냐면, 얼마 전부터 ‘내년에 진학하고 싶은 고등학교 1순위가 어디냐?’라는 질문에 광천고의 이름이 꽤 자주 오르내릴 정도였다.

현 고교 검도 최강이라는 거창한 호칭이 만들어 낸 여파였다.

사실 그 이면에는 지난 몇 년간 공인된 검도 강호였던 빅4보다 광천고의 입학 허들이 낮을 거라는 얄팍한 계산도 섞여 있었지만, 여하튼.

은우와 서준 또한 광천고 입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 중학교 3학년생들이었다.

하지만 이 두 명의 경우는 이야기가 약간 달랐는데, 중학교 검도부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재영중학교에서 선봉과 주장을 맡은 그들은 빅4라고 해도 얼마든지 진학하는 게 가능한 까닭이었다.

그들이 광천고에 가고자 하는 건 단지 고교 최강이라는 호칭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뿐, 입학 허들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는 뜻이다.

““광천고 파이팅-!””

““금제고 이겨라!””

운이 좋았는지, 은우와 서준이 관객석에 도착했을 때, 광천고와 금제고의 경기는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느라 시끌시끌한 관객석의 상황에 은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다행이다. 아직 안 시작했나 보네.”

“그러게. 곧 시작하나 보다. 타이밍 좋네.”

“이게 다 내 덕분인 거 알지?”

“그래, 니가 똥 싸러 간 덕분이다. 이 똥쟁아.”

“뭐, 똥쟁이?!”

티격태격하던 것도 잠시.

광천고의 선봉, 정철이 경기장에 오르자, 은우와 서준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삼 년간 광천고 남자 검도부를 홀로 지탱했던 소년 가장은 중학교 검도 선수들에게도 상당히 인지도가 높았다.

멋이 있지 않은가.

오직 자신의 실력으로 약소부를 유지했다는 게.

심지어 그대로 허망하게 끝나는 게 아니라, 기어코 고교 최강의 자리에 올려 두기까지 했으니···.

“근데 상대는 누구야?”

“박지원? 누구지?”

정철의 상대로 나온 금제고의 선봉, 박지원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

하지만 학생 검도 선수인 그들은 금방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설마··· 출전 순서를 꼬아 놓은 거야?”

“금제고는 빅4잖아. 그런 곳이 광천고를 상대로 출전 순서까지 바꿨다고?”

“출전 명단 보니까 맞네! 와- 미쳤다!”

은우가 감탄과 함께 몸을 뒤로 젖혔다.

설마 금제고가 출전 순서까지 바꾸는 강수를 둘 줄은 예상도 못 했기에.

보아하니 금제고 선봉은 첫 출전의 1학년!

승부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리고 실제로도 선봉 시합은 일방적인 정철의 우세로 흘러갔다.

“──!”

빠른 속도로 진행된 칼끝으로 하는 공세.

죽도가 죽도를 내리누르고, 빈틈이 보였다고 생각되는 순간, 정철의 입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압-!”

강렬한 기부림.

동시에 빠른 속도로 내리쳐 오는 죽도!

묵직한 기세가 담긴 정면 머리치기에 박지원이 속절없이 물러났다.

죽도를 세워 겨우 받아 내기는 했으나, 그뿐.

반격은 생각도 못 하는 모양새였다.

실로 당연한 결과였다.

안 그래도 근래 들어 빅4, 즉 명문 강호의 주장급으로 강하다 평가받는 정철이다.

하물며 그런 그에게 대학 입시라는 엄청난 버프까지 걸린 상황!

겨우 1학년이 넘어설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정철을 상대로 지금까지 어찌어찌 버틴 걸 칭찬해야 하리라.

안타깝게도, 그것도 딱 여기까지였지만.

“크아압!”

후웅-!

기부림과 함께 휘둘러진 죽도가 날카롭게 박지원의 허리를 노렸다.

공격하기 전, 죽도를 들어 올리려 하는 속임수에 속아 박지원의 허리는 훤히 드러나 있는 상태였고, 정철은 그것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박지원이 팔을 끌어 내리려 했으나.

타아악-!

정철은 그보다 한 박자 더 빨랐다.

그가 휘두른 죽도는 박지원이 제대로 대처를 하기도 전에 허리를 두들겼다.

두말할 것도 없는 득점이었다.

“백색, 허리! 시합 끝!”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던 주심이 구령을 외치며 정철을 의미하는 하얀 깃발을 들어 올렸고, 부심들도 마찬가지.

첫 번째 판 우측 머리치기에 이은 두 번째 판 허리치기로 선봉전은 허무하게 끝났다.

박지원은 과연 미래에 성현이 기억할 만한 강자가 되는 만큼 생각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버텼지만, 정철이라는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누가 그를 탓할 수 있으랴?

주장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대학 입시 버프를 받은 정철은 ‘성현을 만나기 전의 백성호’와도 비벼 볼 수 있는 강자일진대.

“···쩔어!”

은우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감탄을 내질렀다.

그만큼 이번 시합에서 정철이 보여 준 역량이 인상 깊었던 까닭이다.

공세로 상대를 흔들고, 틈이 보이면 치고 나간다.

말로는 정말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정작 해보면 힘든 그것을 정철은 너무나 당연하게 해내 보였다.

저 정도는 되어야 고교 최강 검도부의 선봉 자리를 맡을 수 있다는 의미일 터!

“춘계 때 봤던 것보다 훨씬 강해. 기술 하나하나가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졌어.”

서준의 반응은 은우와는 또 달랐다.

그는 냉정한 눈으로 정철의 실력을 가늠했다.

감탄하기보다 이전에 봤을 때와 비교해서 얼마나 더 발전했는지를 먼저 확인한 것이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드러내 주는 모습이라 하겠다.

“어차피 우리가 입학했을 때는 졸업했을 테니까 아무 의미 없지만.”

“그래도 가끔 찾아오지 않을까?”

“대학 생활 때문에 바쁠걸.”

“그런가아···.”

떠들던 은우와 서준은 곧 입을 다물었다.

선봉 시합 정리가 끝나고 곧바로 2위 시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금제고가 출전 순서를 바꾸는 강수를 둔 지금, 이번 2위 경기는 굉장히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선봉을 버린 금제고는 반드시 이번 시합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했고, 반대로 광천고는 여기서 금제고의 경기 계획을 시작부터 망쳐놓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물론 여기서 광천고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었다.

그건 은우와 서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광천고 2위 손대현이 성장했다고는 해도, 상대는 지난 이 년간 빅4 금제고의 선봉을 지켰던 박조영이다.

약소부의 2위였던 이가 이길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서준이 너는 어떻게 될 거 같아?”

“당연히 금제고가 박살 내겠지.”

“금제고가?”

“응. 3위전도 마찬가지야. 원래 금제고 선봉-중견이 거기로 간 거잖아. 광천고 2위랑 3위가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그럼 중견은 어때.”

“중견은 광천고가 이길 거고. 5위랑 부장전은 반반? 근데 그럼 주장전을 이겨야 할 텐데. 흠-”

서준의 예상은 이번 시합을 지켜보는 이들 대부분의 예측과 같았다.

결국 3 대 3으로 주장전까지 이어지는 것.

광천고와 금제고의 시합은 거기서 승패가 결정될 것이며, 2위 시합은 금제고가 압승하리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야아압-!”

“으아아압-!”

타아악!

죽도와 죽도가 격렬하게 부딪친다.

손대현과 박조영은 정말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상대에게 맞섰다.

그 탓에 경기는 검도 시합에서는 드물게도 과격하게 느껴질 만큼 거세게 이어졌는데, 이는 두 사람의 스타일이 비슷한 까닭도 있었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혀 치는 타돌을 장기로 삼는 손대현과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것을 즐기는 박조영.

두 명이 만난 이상, 지금과 같은 격렬함은 어찌 보면 지당한 일이었던 거다.

여기까지는 광천고와 금제고의 선수들에 대해 안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모두를 놀라게 한 건, 이 시합이 너무나도 치열하다는 데 있었다.

선봉전처럼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게 아니라, 누가 이길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맹렬한 시합이었다!

꿀꺽.

은우와 서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경기장 안에서 맞부딪치는 두 고등학생 선수를 보았다.

정말이지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승부였다.

공격적인 검도를 추구하는 학생 선수라면 더더욱.

“그러고 보니까. 전에 서준이 너, 광천고 2위는 너도 이길 수 있을 거 같다며.”

“그래, 그랬었지.”

춘계 전국 대회 당시, 광천고의 32강 경기를 보며 서준이 했던 말이었다.

그때 서준은 저 정도라면 고등학생이고 나발이고, 광천고 2위쯤은 지금의 자기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렇게 말할 만큼 광천고 2위의 실력은 형편이 없었으니까.

“지금도 같은 생각이야?”

“···아니.”

은우의 질문에 서준이 쓰게 웃었다.

지금 저걸 보고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빅4, 금제고의 선봉─원래라면 말이다─과 정면으로 맞붙고 있는 사람인데.

“못 이겨. 지금은.”

아직 더, 성장하지 않으면─

“─시합 끝! 무승부!”

2위전의 결과는 무승부!

첫 득점은 박조영의 손목치기였지만, 손대현이 머리치기로 한판을 따내며 동점을 이루고, 이후 득점 없이 시간이 지나며 비기게 된 것이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감탄사를 토하는 은우의 눈에 분주히 움직이는 금제고 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긴, 순서까지 바꿨는데 비겼으니까.’

그것도 심지어 선봉을 버리고 가장 약하다는 2위와 붙어서 나온 무승부였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금제고로서는 이 결과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3위전까지 지면···.’

그럼 정말 벼랑 끝까지 몰리는 셈이다.

광천고의 약점이라 지목되곤 했던 ‘잇는 순서’에 의해서, 빅4라 불리는 금제고가!

은우는 짜르르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 이게 광천고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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