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자연재해
성상고는 광천고와 가장 인접한 곳에 있는 고등학교 검도부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사이가 좋거나, 혹은 아예 안 좋거나 둘 중 하나이기 마련인데, 두 학교의 검도부는 전자였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더 자주 교류하고 연습 경기를 치르며 검도부끼리의 사이가 돈독했던 거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두 학교 검도부의 위상은 지금과는 달랐다.
성상고는 제법 자주 16강까지 올라가는, 그럭저럭 평범한 검도부였던 반면, 광천고는 32강도 아슬아슬한 약소부였기에.
연습 경기 결과도 그와 같아서, 보통 7 대 3 정도로 성상고가 유리했었다.
광천고가 겨우 1승을 따갈 때, 성상고는 3승을 쟁취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론, 어디까지나 그건 과거의─겨우 일 년도 채 되지 않긴 했지만─일일 뿐.
현재 두 학교 검도부의 위상은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었다.
예전에는 성상고가 더 많이 이겼었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광천고 검도부는 경중고를 쓰러뜨리며 회장기 검도 대회에서 우승해 고교 최강의 자리를 빼앗았지만, 성상고 검도부는 여전히 16강에서 허덕이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다만, 이걸 성상고가 발전하지 못한 탓이라며 몰아갈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상한 건 광천고였기 때문이다.
약소부로 악명이 자자할 때는 언제고, 한순간에 고교 최강의 검도부로 올라서다니.
괜히 검도 팬들이 광천고가 회장기 검도 대회에서 이룩한 업적을 기적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그 정도로 광천고가 해낸 건 놀라운 일이었다.
성상고는 그저 평범하게 성장했을 뿐이니, 광천고와 위치가 뒤바뀌었다 해서 그들을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쟤네가 이상한 거라고.’
성상고 검도부의 주장, 박지온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순간에 벌어진 두 검도부의 격차를 첫 시합에서 직접 느끼게 될 줄은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추계 전국 대회에서.
그랬다.
추계 전국 중·고등학교 검도 대회 첫 번째 시합의 주인공은, 성상고와 광천고였다!
‘썩을.’
박지온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던 욕지거리를 억지로 되삼켰다.
지금 무슨 욕을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검도부의 사기만 망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망칠 사기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축 처진 성상고 검도부 주전들의 얼굴에는 이미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머무르고 있었다.
예전에 광천고와 붙었을 때와는 영 딴판인 분위기다.
그때만 해도 연습 경기 때처럼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으면서.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상대의 실력이 늘었다고 승리를 향한 의욕을 잃어버린다는 게.
“으음.”
그러나 박지온은 그들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자신이 냉정할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우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장을 달고 있으니만큼, 그는 연습 경기 때마다 ‘소년 가장’ 정철을 상대하며 수없이 패배했었다.
그런즉, 광천고가 성상고보다 약할 때도 무시한 적 없었고, 더 강해진 지금도 비슷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정철이 그보다 약했더라면 아마 다른 부원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터.
강하게 뭐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어쨌든, 이대로는 안 돼.’
“자, 주목!”
박지온이 소리 높여 외침으로써 성상고 검도부 주전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모여든 여섯 쌍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 내며,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전국 대회 시작부터 말도 안 되는 강팀을 만난 게 아쉽지?”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박지온은 그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생각을 바꿔 봐. 지금 다들 광천고를 주목하고 있단 말이야. 만약 여기서 우리가 광천고에 한 방 제대로 먹이면 어떨까?”
“······!”
“이제야 깨달았나 보네. 이기지 않아도 돼. 그냥 가능성만 보여 주란 말이야. 여기에 온 스카우터들한테, 우리도 이만큼 할 수 있다! 그걸 보여 줘야 실업 선수 가는 길이 열리지!”
실업팀 소속 선수.
모든 학생 선수의 꿈이 언급되자, 성상고 검도부 주전들의 눈에 활기가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현재 광천고 검도부는 체육관 안에 모인 스카우터들이 전부 주목하고 있는 태풍의 눈이다.
저들에게 제대로 한칼만 먹여 준다면, 혹은 운이 따라 줘서 이기기만 한다면 스카우터에게 강력하게 자신의 실력을 어필할 수 있다는 뜻!
“그래, 주장 말이 맞아!”
“업셋? 우리라고 못 할 게 뭐 있어?”
“맞는 말이야. 전에 연습 경기할 때처럼 이기면 되는 거잖아. 간단하네.”
기운을 되찾은 성상고 검도부 주전들이 저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 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광천고를 상대로 이기는 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절대 아니다.
말하는 당사자들도 다들 그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입에 담지 않는 건 굳이 진실을 말해 끌어올리던 사기를 망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아자-!”
““아자─!””
강렬한 기합과 함께 시작된 첫 번째 경기.
성상고에는 실로 끔찍하게도, 광천고의 선봉으로 나온 건 홀로 고교 검도부 하나를 지탱했던 무관의 제왕, 정철이었다.
심지어 대학 입시라는 말도 안 되는 버프를 두른 그에게 패배란 있을 수 없었으니-
“크아아압-!”
타아악!
“으억!”
“백색, 머리! 시합 끝!”
선봉으로 당당히 나섰던 이진웅은 정철의 폭거 앞에 어찌할 도리가 없이 두 판을 내리 빼앗기며 패배하고 말았다.
한칼이라도 제대로 먹여 스카우터들의 눈에 든다는 계획은 실행조차 하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격차 앞에 허덕이기만 했을 뿐.
일방적인 것을 넘어, 압도적인 시합이었다.
원래도 강호 검도부의 주장급 실력이라던 정철이 대입 버프까지 받은 이상,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괜찮아! 정철이 강한 건 다들 알고 있었잖아! 다음은 너희도 자주 상대했던 애들이야!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마, 맞아. 정철 선배는 전에도 엄청 셌다고.”
“괜히 소년 가장이겠어?”
그래서인지 선봉전까지는 성상고도 그다지 벽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정철은 광천고가 약할 때도 빛나던 인물!
그의 강함은 잦은 연습 경기를 통해 알고 있었던지라, 광천고 자체의 성장을 느낄 만한 인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잇는 순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분명 그들은 강해진 게 맞지만, 회장기 검도 대회 때도 상포고와 무승부를 낸 만큼, 우리들에게도 기회는 있다!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의 일이다.
“······허?”
“아니, 무슨-”
광천고의 2위 손대현과 3위 조윤호.
중견인 최영준과 함께 광천고 2학년 트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이 두 명은 성상고 검도부 주전들에게는 매우 익숙했다.
연습 경기 때면 대부분 이기거나, 아주 적은 확률로 비기던 상대로.
실제로 몇 달 전에 있었던 마지막 연습 경기에서도 성상고 2위와 3위는 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었으니 말 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성상고와 만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광천고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발전을 했는지.
-별 볼 일 없던 약소부의 2위가 이토록 강해질 줄 누가 알았으랴.
-죽마고우인 친구와 함께 성장 중인 그 기세는 매섭기 그지없다.
검도라이프의 어느 글에서 나왔던 내용처럼 현재 광천고에서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건 대현과 윤호였다.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즉당괄목상대(卽當刮目相對)’라.
선비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면 마땅히 눈을 비비고 상대를 다시 봐야 한다는 그 문장이야말로 대현과 윤호, 두 사람을 잘 표현하는 말이었다.
성현의 가르침과 포고문이라는 채찍 겸 동기를 받아들인 두 사람의 성장세는 실로 가파르다.
광천고가 약소부일 수밖에 없는 원인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명문 강호의 ‘잇는 순서’와도 비등할 정도였으니─
성상고의 패배는 정해진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백색 손목! 시합 끝!”
“백색 머리! 시합 끝-!”
완전히 박살이 났다.
그렇게 말해도 다르지 않을 결과!
성상고에서 2위와 3위로 나간 이들은 단 한 점도 빼앗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다 패배했다.
상상도 못 했던 완패에 성상고 주전들의 표정에 아연함이 감돌았다.
‘저게 그 약했던 대현과 윤호라고?’
‘몇 달 전만 해도 분명 내가 이겼었는데-’
‘말도 안 돼!’
단숨에 3패를 끌어안게 된 성상고 주전들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다음으로 나설 광천고의 중견은 최영준.
정철과 더불어 약소부였던 광천고 검도부를 지탱하던 기둥이다.
훗날 정철에게서 주장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확실시되던 이인만큼 실력 또한 확실!
즉, 성상고의 패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광천고의 중견 최영준에게서 성상고의 중견 오민우는 앞선 경기들처럼 두 점을 연달아 빼앗기며 패배했으니까.
이 시점에서 이미 성상고는 4패를 스트레이트로 당했으므로, 탈락은 확정!
그러나 대개 단체전은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주장전까지 하는 게 기본적인 규칙이기에 시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6전 0승 6패!
하물며 성상고는 모든 시합에서 단 한 점도 빼앗지 못했다.
광천고는 정말로 고교 최강의 이름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만 재확인했을 뿐.
‘얼마 전까지의 광천고가 아냐.’
운이 좋았든, 아니면 성현이라는 괴물이 캐리했든 간에 상관없이.
패권을 거머쥔 광천고는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고, 성현의 도움에 힘입어 엄청나게 강해졌던 거다.
박지온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더는 광천고가 성상고 같은 평범한 검도부와 같은 선상에 설 수 없으리라는 사실까지도.
“후···.”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숨을 고른 박지온이 앞을 바라봤다.
그가 주장전을 치를 상대, ‘괴물’ 이성현을.
이미 성상고의 탈락이 결정된 상태지만, 그렇다 해도 이 시합의 가치가 퇴색되는 건 아니다.
다른 주전들에게 했던 말은 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으니까.
현재 수많은 스카우터가 주목하고 있는 성현을 상대로 분전을 펼칠 수만 있다면, 그의 이름 석 자를 그들에게 알리는 것도 퍽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가능할 거 같지가 않지만.’
“-젠장.”
투기 종목은 옆에서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한번 권투를 생각해 보라.
영상으로 보면 선수들이 뻗는 주먹은 느리고 툭툭 건드는 것처럼 약해 보이기도 한다.
‘별거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러나 정작 실제로 상대해 보면 너무 빨라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검도 또한 그랬다.
성현에게서 시합 상대가 느끼는 위압감은 영상으로는 절반도 채 전해지지 않는다.
호면으로 인해 좁아진 시야로 비로소 상대를 보면, 거기에 있는 건─
‘─괴물.’
소름 끼치는 괴물이다.
단순히 중단세를 취하고 있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이 말도 안 되는 압박감!
숨 쉬는 것마저 버겁게 느껴질 지경이었으니.
박지온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든 한칼만 먹여서 모두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린다는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새하얀 백지처럼, 상대를 마주한 순간, 완전히 표백되어 버린 까닭이다.
“시합 끝!”
정신을 차렸을 때.
박지온은 자신이 패배했음을 깨달았다.
뭔가 이리저리 휘둘렸다 싶은 순간, 이미 경기는 끝나 있던 거다.
이렇다 할 공격조차 하지 못했는데.
상대의 공세조차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터벅터벅 경기장에서 걸어 나오며,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괴물이라 불리는지 알겠네.’
저건, 그냥 자연재해다.
그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닿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재앙.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는 무언가란 말이다.
오히려 박지온은 백씨 형제나 김규호, 강찬울이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투지에 불타는 눈으로 성현을 바라보던 그들이.
‘어떻게 저런 녀석을 상대로 이길 생각을 하지?’
가망이 없다는 건 한 번만 상대해 보면 알 텐데···.
슬쩍 고개를 돌린 박지온은 꺾여 버린 눈으로 성현을 바라보았다.
투지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박지온이라는 소년은 성현이라는 절대 넘지 못할 벽 앞에 완벽히 ‘부러져 버린’ 거다.
하지만 누가 그를 욕할 수 있으랴.
괴물에게 마음이 꺾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전’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성현을 보고 검이 꺾였으니까.
박지온을 비롯한 그들은 그저 불행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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