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화 : 전국 대회 개막
생각보다 학생선수 검도 대회는 대단히 많다.
거의 달에 한 번, 많게는 달에 두세 번도 열릴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전국 대회’라고 할 수 있는 건 단 두 개의 대회뿐이다.
춘계 전국 중 · 고등학교 검도 대회.
추계 전국 중 · 고등학교 검도 대회.
각각 봄과 가을 즈음에 열리는 두 개의 대회.
오직 이 두 대회만이 학생선수들에게 ‘전국 대회’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올해로 춘계 전국 대회는 62회, 추계 전국 대회는 37회를 맞이한 상태다.
학생선수 검도 대회 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회장기 검도 대회조차 이제 겨우 29회째 개최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보다 무려 열 번은 더 많이 열렸다는 뜻이다.
심지어 그건 어디까지나 추계 전국 대회와의 비교고, 춘계 전국 대회와는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일 지경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검도 대회에서 역사는 곧 권위다.
괜히 검도 팬들에게 전국 대회 트로피가 왕좌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포함한 학생 검도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대회가 바로 전국 대회인 까닭에 그런 명칭이 붙은 거다.
그런즉, 부산 동래구에 있는 사직체육관이 대회를 보러온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것도 썩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저 사람 경주시청 스카우터 맞지?”
“구미, 남양주, 광명···. 각 시청 실업팀 스카우터들은 다 온 거 같은데.”
“다른 실업팀 관계자들도 엄청 많아.”
“아예 감독이 직접 온 팀도 보이던데.”
“원래도 이렇게 많았나?”
“아니. 이번 대회가 유독 많은 거야.”
먼저 도착해 몸을 풀고 있던 학생선수들이 주위를 보며 수군거렸다.
그들은 회장기 검도 대회보다 몇 배는 많은 스카우트와 업계 관계자들의 숫자에 깜짝 놀랐다.
작년 추계 전국 대회나, 올해 있었던 춘계 전국 대회에 나갔던 이들조차 그때를 상회하는 관계자들의 숫자에 식겁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이번 추계 전국 대회가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토록 적나라한 증거를 마주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당황은 잠시.
‘혹시 나도···.’
‘이번 대회에서 활약한다면?’
‘실업 팀에 잘 보일 기회다!’
곧 학생선수들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학생선수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는 대개 실업팀 소속 선수이기 마련.
이번 추계 전국 대회에 이토록 많은 실업팀 관계자들이 있다는 건, 활약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다.
학생선수들이 의욕에 불타지 않으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일 터!
그렇게 학생선수들의 마음에 투지가 불타오를 때, 비로소 하나둘씩 명문 강호라고 불릴 만한 고교 검도부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
“······.”
가장 먼저 나타난 건 호군고와 금제고였다.
광천고의 등장으로 인해 급격히 퇴색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명색이 빅4인 두 고교 검도부의 등장에 체육관이 한 차례 술렁였다.
그러나 호군고와 금제고 주전들은 그러한 반응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각오로 딱딱히 굳은 표정만 짓고 있을 따름!
하기야, 회장기 검도 대회에서 그들이 당했던 수모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중고를 상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패배해버린 금제고나, 광천고에게 허무하게 져버린 호군고.
심지어 그 여파인지 두 고등학교 검도부는 한국 유망주 대표팀을 선별할 때 단 한 명도 뽑히지 않기까지 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치욕!
금제고와 호군고 모두 당시의 수치를 이겨내기 위해 악착같이 훈련했으리라.
“용암고다!”
“이제 용암고랑 광천고, 경중고까지 빅3 아니냐?”
“글쎄. 근데 이번 전국 대회에서 회장기랑 비슷하다면- 아마 그렇지 않을까.”
용암고는 주장인 김규호와 중견을 맡은 강찬울을 앞세워 체육관에 들어섰다.
앞선 호군고와 금제고에게는 다소 심드렁한 표정이었던 실업팀 관계자들도 용암고의 에이스 두 사람에게는 눈을 빛냈다.
현 고교 검도계에서 ‘괴물’ 이성현과 ‘천재’ 백성호의 뒤를 잇는 세 번째가 바로 김규호이며, 훗날이 가장 기대되는 인재가 강찬울인 까닭이다.
실업팀 관계자의 반응을 깨달은 금제고와 호군고 주전들은 또 한 번 이를 악물었지만, 어쩌랴.
모두 회장기 검도 대회의 업보인 것을.
술렁-
뒤이어 경중고가 입장했을 때는, 그야말로 사직체육관 전체가 그들에게 집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몸을 풀던 학생선수들은 물론이요, 스카우트들까지 대놓고 그들을 바라봤을 지경이니.
심지어 실업팀 스카우트들 사이에 섞여 있던 대학교 검도팀 스카우트들은 아예 목을 쭉 내밀며 경중고 쪽을 살폈다.
이제 일 년 뒤에 풀려날 현 고교 검도계 최고 매물, 백성호를 보기 위함이었다.
“내년에 졸업이니 슬슬 접근해볼 때긴 하죠?”
“아서라. 옆에 보면 모르겠냐? 다들 너랑 똑같은 생각 하고 있을걸.”
“쓰읍- 바로 실업으로 간대요? 아니면 대학?”
“몰라. 아직 결정 안 했다더라.”
“그런가요. 하긴, 저였어도 그랬을 거 같네요.”
선두에 선 백성호를 보며 실업팀과 대학 스카우트들이 쑥덕거렸다.
‘최대 매물’이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모든 실업팀과 대학은 백성호의 진로가 어찌 될지에 대해 주시하는 중이었다.
곧장 실업 검도에 뛰어들 예정이면 실업팀에서 채가기 위해, 대학 진학 예정이면 대학팀에서 자기네 대학으로 데려가기 위함이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지만, 어디 백성호가 보통의 인물이던가?
비록 올해에는 갑자기 나타난 성현에게 밀려나기는 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검도계 인사들에게 주목받던, 명실상부한 최고의 유망주다.
데려가기만 하면 최소 중박은 확실한 상황이니 스카우트들이 조급해질 수밖에.
“광천고···!”
“광천고다!”
하지만 경중고가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의 반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광천고가 나타났을 때와 비교하면 말이다.
학생선수들이나 스카우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애써 다른 학교의 입장에 관심을 끄고 있던 금제고와 호군고마저 시선을 돌렸을 정도니.
떠드느라 시끄러웠던 사직체육관이 한순간 정적에 빠진 것 같은 착각이 들기까지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급격히 소리가 줄어든 탓으로, 완전히 침묵에 빠지는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말도 안 되는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
선두에 서서 걸음을 옮기는 성현.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당당히 걷는 정철을 비롯한 광천고 주전들!
제일 마지막에 있는 건 김만석 감독이었다.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명감독.
물론, 너무 아는 사람만 아는 탓에 주목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여하튼.
그렇게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광천고 검도부 주전들에게서는 ‘하나의 팀’이라는 인상이 엄청나게 강하게 느껴졌다.
광천고가 얼마나 강하게 뭉쳐있는지 짐작 가능한 대목이었다.
“이성현, 쟤는 뭔가, 뭔가야.”
“분위기 말하는 거지?”
“어. 제대로 표현은 못 하겠는데···.”
홀린 듯 광천고 검도부가 지나가는 걸 보고 있던 어느 학생선수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의 말마따나 성현에게는 쉽게 설명하기 힘든,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아우라 같은 게 있었다.
그것이 단순히 그가 단 일 년 만에 쌓아 올린 신화적인 경력 때문인지, 아니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으로 광천고마저 입장하자, 몇몇 이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용암고에서는 강찬울과 김규호가, 경중고에서는 백성호와 백지호가 슬쩍 광천고가 자리를 잡은 곳으로 온 것이다.
모두 국가 교류전 한국 유망주 대표팀에 참가했던 이들이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이길 겁니다.”
모인 이들 중 가장 먼저 말한 건 강찬울이었다.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어조였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진 그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추계 전국 대회의 승자는 용암고가 되리라고.
“전에 졌던 거 벌써 잊어버렸어?”
“언제적 일이에요, 그게.”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광천고에서는 최영준이 앞으로 나서 강찬울과 신경전을 벌였다.
다만 진지하게 서로를 노려보는 일은 없었다.
회장기 검도 대회 때만 해도 적대적이던 두 사람은 국가 교류전을 거치며 상당한 친분을 쌓은 상태였기에.
눈을 빛내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김규호가 성현과 백성호를 보며 말했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둬. 너희 둘 다, 이번 대회에서 내가 잡아낼 테니까.”
“기대할게.”
김규호의 말에 대답한 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백성호였다.
그 때.
“미안하지만.”
정철이 나직하게 말하며 끼어들었다.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이런 신경전이 벌어지면 그저 가볍게 웃어넘기곤 하던 정철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 대회 주인공은 내가 될 거야. 후배들아. 나는 대학 입시가 달려 있거든.”
“-앗.”
백성호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대학 입시 버프!
사실상 3학년 마지막 대회인 이번 추계 전국 대회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인다면 대학 입시에 많은 도움이 될 터.
지금의 정철은 그 어느 때의 그보다도 강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다들 의욕이 넘치시네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던 성현이 빙긋 웃었다.
그러나 곧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마치 ‘왜 이렇게 의욕이 넘치는 거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어차피 우승은 광천고가 할 건데.”
그리고 말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정말이지, 도발적인 말이었으므로 자연스레 다른 이들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오- 말하는 거 봐라.”
“일본 도발하듯이 우리도 도발하시겠다?”
“아뇨. 그럴 리가요. 도발 아니에요. 그냥, 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건데.”
누가 봐도 변명을 빙자한 도발이었다.
“···두고 보자고.”
“이번에는, 다를 거야.”
한 마디씩을 남기고 돌아서는 김규호와 백성호.
강찬울과 백지호도 씩 웃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낸 뒤 돌아섰다.
성현의 도발에 너무 화가 나서 떠난 건 아니다.
그저 슬슬 개회식 시간이 다가왔기에, 갈 시간이 되었을 뿐.
‘이런 것도 꽤 재밌네.’
떠나가는 그들을 보며 성현이 피식 웃었다.
고등학생 때로 돌아온 지 어언 반년이 넘어간 탓인지는 몰라도, 이런 도발에 은근한 재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악랄함을 느낀 것일까.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대현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인터뷰 때 느끼고, 일본 때 알아본 거지만, 너 도발 되게 잘한다.”
“그런가요?”
“응. 너랑 같은 학교인 게 다행이다 싶어.”
아마 다른 고등학교였으면 꽤 휘둘렀을 거라며 대현은 웃었다.
다른 주전들도 동감이라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도발을 당했는데도 실력으로 응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악질적이었다···.
“-자, 이제 다들 개회식 준비하자!”
““네, 선배!””
정철이 짝짝 박수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제37회 추계 전국 중 · 고등학교 검도 대회의 개회식이 곧 시작되는 만큼, 준비를 서두를 필요가 있었기에.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성현도 곧 광천고 주전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아아- 지금부터 제37회 추계 전국 중 · 고등학교 검도 대회 개회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추계 전국 대회의 막이 올랐다!
< 자연재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