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귀신처럼
캐나다와 한국 유망주 대표팀의 주장전.
어제의 여파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 시합은 선수들 또한 주목하고 있었다.
성현에게 앞서 패배했던 미국 유망주 대표팀의 주장, 찰스 웨인도 그중 한 명이었다.
찰스는 난간에 몸을 걸친 채, 가라앉은 눈으로 경기의 향방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끔찍하네.”
짧게 중얼거린 찰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프레데릭이 지금 얼마나 참혹한 기분일지 쉬이 짐작되었기에.
한껏 상대를 몰아붙이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게 사실은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얼마나 지독한 느낌이겠는가.
주춤했던 프레데릭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굼떠진 것도 이해가 됐다.
지켜보기만 하는 찰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는데, 당사자인 프레데릭은 얼마나 정신이 아득해졌을지 뻔히 알 수 있었으니까.
‘만약 저게 나였다면-’
자신이 프레데릭 대신 저 경기장 위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본 찰스가 넌더리를 쳤다.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했던 까닭이다.
차라리 먼저 경기를 치러서 다행일 지경!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저걸 뚫어야만 이성현을 잡아낼 수 있다.’
어제의 경기 이후, 찰스는 내심 성현을 검도 생활의 목표로 둔 상태였다.
자신이 정말로 검도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현이라는 괴물을 잡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즉, 성현이 저런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여 줄수록 그 또한 숨통이 턱 막혀 올 수밖에.
그리고 그러한 감상을 느끼고 있는 건 그뿐만 아니라, 성현과 붙어서 패배를 겪게 된 대다수 유망주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됐든, 지금 당장 맞붙고 있는 프레데릭보다는 못할 테지만 말이다.
“······.”
‘이 정도로 괴물이었을 줄이야.’
프레데릭은 바싹 마른 입술을 훑었다.
자신의 공격에 취해 몰아붙이고 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야 뒤늦게 떠올려 보면, 그가 했던 공격 중에서 유효했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부터 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격은 전부 허무하게 막혔을 따름이다.
분명, 상대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건 그래서이리라.
물러나야 할 만큼 위협적인 공격이 없으니, 굳이 몸을 뺄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
“후우-”
하지만 이를 프레데릭의 실력 부족이라 말하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애초에 프레데릭이 약했다면 캐나다 유망주 대표팀에 합류하지도 못했을 테고, 거기서 주장을 맡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
차후에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일 또한 있을 수 없었을 테고 말이다.
‘대체 어떻게···.’
성현이 보인 방어가 최소한의 움직임과 최저한의 힘으로 이루어진 최적의 방어라는 것까지는 프레데릭도 이해했다.
한데 그게 어떤 식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제대로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말이 좋아 최소한의 움직임, 최저한의 힘이지, 자칫 조금만 잘못 판단해도 프레데릭에게 공격을 허무하게 허용하고 말았으리라.
프레데릭이 자신의 연격이 성현을 몰아붙이고 있다고, 그래서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아슬아슬하게 종이 한 장 차이로 막아 내고 있었으니까.
그런 정신 나간 묘기를 인위적으로 했다는 진실이 프레데릭의 안색을 희게 질리게 했던 것이고.
프레데릭은, 그리고 이 시합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몰랐다.
아니, 알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먼 훗날 ‘불패(不敗)’라 불렸던 검도인이 검도계에 던졌던 충격이라는 사실을.
어떤 누구도 부술 수도, 깨뜨릴 수도, 무너뜨릴 수조차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그저 불패라고 불렀다.
누구도 그를 패배시킬 수 없기에.
그 이름이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젠장.’
성현의 위압감에 짓눌린 프레데릭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호면 너머로 보이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시선에 등골을 타고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사실 상대는 자신의 속내를 모조리 읽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황당한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
‘진정하자.’
“스읍, 후우우-”
차분하게 숨을 고른 프레데릭이 죽도의 검선을 상대의 미간에 겨눴다.
상대가 강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첫날에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그래서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너무 놀라 안색이 희게 질렸었지만···.
여하튼, 상대방의 대단함은 진저리 날 만큼 재차 깨닫게 되었으니, 더는 당황할 이유도 없다.
뭘 해도 ‘이성현이니까’라고 가볍게 정리할 수 있을 테니.
“······.”
성현은 여전히 그대로 선 채로 맞은 편의 프레데릭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인 까닭이다.
아직 제 재능을 깨닫기 이전의 이성현.
그때의 그는 프레데릭이나 임하윤처럼 타승법- 계속해서 공격을 하여 승리를 거머쥐는 검도를 추구했었다.
물론, 어린 나이에 한 국가를 대표하게 된 저 두 명에 비하면 한참이나 낮은 수준이지만···.
그래도 당시에 쌓였던 경험은 훗날 상단세를 완성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줬었다.
‘타승법이라···.’
때마침 상대가 추구하는 것도 그러하니.
성현은 한때나마 자신이 추구했었던 검도를 프레데릭에게 보여 주고자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새싹 밟기는 단순히 상대를 박살 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저 양학이고, 폭력일 뿐이다.
그가 바라는 건 패배의 교훈을 통해 유망주들이 더욱 강하게 성장하는 것이었으니.
“스으으-”
성현은 깊숙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등학생 시절의 육체를 가졌기 때문일까.
떠올리려 하니, 젊었던 시절- 허무하게 보내 버렸던 이십 대의 기억이 마구 샘솟았다.
그때의 그를 아는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더랬다.
그가 휘두르는 검에는, 마치 귀신(鬼神)의 형상이 붙어있는 것 같다고.
재능을 깨닫고, 상단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윽고 불꽃이 되어 버린 귀신이─
“하아아앗-!”
무도관 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기부림.
땅을 박차 한순간에 거리를 좁힌 성현이 죽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건 이전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다.
본래 중단세의 그가 이기는 방식은 상대의 공격을 막고 반격을 취하는 것이었다.
먼저 공격을 시도한 건 그것이 가장 효과적일 때나 그렇고, 보통은 공세로 상대를 압박하거나 하는 식으로 밀어붙였던 거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후웅-! 타아악!
‘무슨 공격이···!’
갑작스럽게 시도된 공격을 겨우 막아 낸 프레데릭이 당황하는 사이.
“하아아압-!”
타악, 탁! 타다닥!
매섭게 밀려드는 파도처럼 연격이 이어졌다.
모든 공격이 지독히도 날카로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끊어짐 없이 계속되니.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치 거대한 흐름을 억지로 막아 세울 수 없듯이 성현의 연속된 공격 또한 그러했다.
‘젠, 장! 이게 무슨!’
프레데릭이 내심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 손목, 허리, 손목, 다시 허리, 그리고 머리!
드물게 쑥 찔러 드는 찌르기는 섬뜩할 지경.
여태까지 막아 낸 게 기적이라 생각될 만큼 성현의 공격은 거세고 예리했다.
‘이대로는 안 돼!’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주도권은 명백히 성현의 것이었다.
어떻게든 반격의 기회를 엿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을 뿐이다.
수십 번의 공격을 이어 가면서도 아주 작은, 실낱같은 틈조차 드러내지 않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아까의 구도를 인물만 다르게 하여 반대로 한 듯도 보였지만, 그렇게만 정의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얼마나 여유로운가?’라는 차이가.
성현은 프레데릭의 맹공에 맞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을 만큼 여유로웠던 반면, 프레데릭은 몸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고만 있었으니까.
‘이렇게 휘둘리기만 해서는-’
“아···.”
비로소 프레데릭은 깨달았다.
지금 이 경기, 그가 처한 상황이야말로.
‘이거다.’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검도임을.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으로 상대를 뒤흔들고, 절대로 주도권을 내주지 않은 채, 밀어붙여서 승리를 거머쥐어야 한다.
그걸 간단히 표현하자면, 아마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많이 휘두르라’가 되리라.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승리를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
프레데릭에게 있어 검도란 무예보다는 스포츠, 운동 경기에 가까웠다.
애초에 운동으로 시작하였으니까.
그래서 그는 투기 종목 스포츠가 대개 그러하듯 승리를 최고 가치로 치고 그것을 추구했다.
이길 수 있다면 무슨 수단이든 써도 좋다는 수준으로 극단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검도와 다른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한 자세보다는 더 빠른 몸놀림을.
확실한 일격보다는 더 많은 휘두름을.
그가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렸던 검도의 완성형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한 번이라도-’
더 많이 봐야 했다.
이 모든 걸 보고 느낌으로써, 자신의 검도에 더해야 했다!
프레데릭은 어떻게든 성현의 공세를 막았다.
필사적으로, 그가 내지르는 검격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그러나 결사적인 각오로 달려든다 해서 견뎌 낼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가 확실한 승리의 수단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으리라.
“하아앗-!”
타아악!
머리로 떨어져 내리는 죽도를 막은 프레데릭.
그걸 기다렸다는 것처럼, 성현이 성큼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벌려 걷기.
죽도가 치워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앞에서 사라져 버린 성현의 모습에 프레데릭이 흔들렸다.
그에게는 자신의 머리를 노리던 죽도를 막아 내니, 상대가 갑자기 없어진 셈이었으니까.
귀신처럼.
‘어디지?!’
프레데릭은 다급히 고개를 돌려 성현을 찾으려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훗날 검도여제라 불릴 임하윤조차 처음 봤을 때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벌려 걷기다.
이미 주도권을 빼앗긴 채 휘둘리고 있던 프레데릭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타아악-!
죽도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드러난 빈틈을 꿰뚫듯이 성현의 허리 치기가 프레데릭에게 작렬했기 때문이다.
“백색, 허리!”
“···하.”
높이 들어 올려진 깃발과 주심의 구령.
첫판이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는 사실에 프레데릭이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두 번째 판이 있음에도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건, 어제오늘 성현이 보여 준 경기 운영 방식 때문이었다.
첫판은 중단세, 그리고 두 번째 판은 상단세!
그런즉, 지금의 연격을 다시 경험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으니.
‘차라리 두 판째도 중단세로 해 달라고 해 볼까?’
프레데릭의 머릿속에 허무맹랑한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본인도 어이없다는 것을 알기에 웃고 말았지만.
이어 진행된 두 판째는 프레데릭이 생각했던 그대로 흘러갔다.
상단세를 취한 성현은 그가 뭔가 대처를 하기도 전에 벼락같이 죽도를 휘둘러 점수를 뜯어갔다는 이야기다.
그건 ‘득점’이라기보다는, 억지로 뜯어갔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한판이었다.
“······.”
허무하리만치 간단한 패배.
하지만 프레데릭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경기는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합의 승패를 떠나,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보았다는 건 무엇과도 바꿔서는 안 되는 성과였으니 말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수련을 거듭하다 보면, 그는 분명 강해질 수 있으리라···.
성현의 목적이었던 새싹 밟기.
그게 더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 전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