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78화 (78/150)

78 화 : 지도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투기 종목에서 누군가 승리했다는 건 반대로 누군가는 패배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성현을 비롯한 한국 유망주 대표팀이 기뻐하는 사이, 일본 3대 유망주들과 일본 유망주 대표팀이 입을 꾹 다문 채 눅눅한 침묵을 지킨 건 퍽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 좋은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건 3대 유망주 쪽이고, 나머지는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여하튼 간에.

[스포츠 뉴스입니다. 유럽 축구 이적시장이 어제부터 열린 가운데···]

널찍한 호텔 방안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무의미하게 켜져 있는 TV 소리뿐.

사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일본 유망주 대표팀의 성적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훌륭하다고 하는 게 옳았다.

첫 경기 상대인 한국을 제외하고 다른 세 경기는 모두 7전 전승을 달성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단지 한국을 상대로 패배했다는 것.

그 하나만이 유일한 문제였다.

한국이 일본만은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일본도 한국에게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검도에서는 특히나 더 그랬다.

검도 종주국이자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은 일본 검도계의 자부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2위 자리에서 기회만 엿보는 한국이 거슬리는 판국에 차세대 싸움에서 졌다는 건, 훗날 세계 최강의 자리를 빼앗긴다는 뜻 아닌가?

[오늘 무도관에서 전 세계 각국의 대표팀이 모이는 검도 국가 교류전이 열렸는데요. 일본 대표팀은 유망주 대표팀이 한국에 패배한 것을 제외하면 전승을 달성했습니다. 사카모토 기자입니다]

TV에서 나오는 자신들의 뉴스에 일본 유망주 대표팀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오늘 있었던 경기 내용이 담긴 영상 자료와 함께 사카모토 기자의 설명이 쭉 이어졌다.

대체로 일본의 승리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는 세계가 인정하는 검도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냈다며 극찬할 정도였다.

그럴 만한 결과를 기록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다만 불안한 점도 있었습니다. 일본 유망주 대표팀은 한국을 상대로 1승 2무 4패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일본 대표팀이 기록한 유일한 패배입니다]

역시나 여기서도 한국을 상대로 기록한 1패는 발목을 잡았다.

자신들의 패배를 꼬집는 내용이 나오자, 일본 유망주 대표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방금까지 칭찬했다는 사실이 거짓말인 것처럼 사카모토 기자는 일본 유망주 대표팀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검도 관련 매체 ‘검도재팬’에서는 이 패배를 두고 일본 유망주들의 정신적 해이를 지적했습니다. 현재 일본이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에 유망주들이 과한 자부심을 느끼고 훈련을 게을리한 대가를 치른 것이라며─]

툭!

묵묵히 TV를 꺼버린 카츠히토가 미간을 찌푸린 채 리모컨을 내던졌다.

들을 가치도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정신적 해이? 훈련을 게을리 해?

저 멍청한 말과는 달리, 일본 유망주 대표팀 선수들이 늘 느끼고 있던 건 자부심이 아니라, 허리가 휠듯한 부담감이었다.

오랫동안 세계 최강의 자리에서 군림한 지금.

일본 검도 팬들은 자국의 대표팀이 다른 곳에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검도 대표팀은 무적이며,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그게 유망주 대표팀일지라도.

하여 유망주 대표팀의 일원들은 매일같이 피땀을 흘려가며 수련하였는데, 단지 한국에게 패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런 소리를 지껄여대다니.

“웃기지도 않아.”

신지가 이죽거리듯 말했다.

그는 백성호를 직접 상대해보고,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벌어진 실력 차이를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저처럼 실력이 늘었는지 의아해질 정도의 발전!

그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저리 떠들어대다니.

“저 말이 헛소리라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한국을 상대로 너무 부진했던 것도 맞지 않아?”

아츠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본 3대 유망주가 겨우 1무 2패. 사람들이 실망할 만도 해. 그동안 그렇게 강하다고 했는데, 결과가 이러니.”

“닥쳐!”

“나한테 욕한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신지.”

얼굴을 구긴 신지가 이를 바드득 갈았지만, 더는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그 또한 내심 아츠시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일본 3대 유망주니 뭐니 하며 떠받들어진 그들이 낸 성적은 지나치게 초라했다.

상대가 강했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그들 또한 강했기에 검도 종주국 일본의 3대 유망주라며 칭송받았던 것이니까.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들만큼은- 아츠시, 신지, 그리고 카츠히토만큼은 무조건 이겼어야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 무조건.

그러지 못한 이상, 그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백성호는 예전에 만났던 그 녀석이 아니야.”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신지가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었어. 빌어먹게도, 지금의 나는 그 녀석의 상대가 안 돼.”

“그런- 신지.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고?”

“아니었다면 내가 그 놈을 작살냈겠지. 젠장.”

성격은 사나울지언정, 검도에는 진지한 신지다.

그의 말은 제법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츠히토, 너는? 네 상대는 어땠어?”

“······.”

카츠히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풍림화산(風林火山).”

“풍림화산?”

“갑자기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꿈에 다케다 신겐이라도 나왔냐?”

“······이성현의 검도를 보고 떠올린 거다.”

일본에서는 다케다 신겐이라는 옛 무장이 깃발에 사용했다며 널리 알려진 ‘풍림화산’이라는 문장은, 본래 손자병법의 일부다.

기질여풍(其疾如風), 기서여림(其徐如林), 침략여화(侵掠如火), 부동여산(不動如山).

뒤에 난지여음(難知如陰)과 동여뢰정(動如雷霆) 두 가지가 더 있으나, 기본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앞서 언급한 네 구절의 마지막 한 글자를 딴 풍림화산이었다.

카츠히토는 성현의 검도를 보고 이것을 떠올린 것이다.

움직일 때는 바람처럼 빠르게.

나아가지 않을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공격할 때는 불처럼 거세게.

지킬 때는 산처럼 묵직하게.

만약 저 네 가지가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검도라고 말할 수 있었으니···.

극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정도라고, 그 녀석이?”

“그래. 아마 백성호가 그토록 빠르게 성장한 이유이기도 할 거다.”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듯.

검을 직접 겨뤄봐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법.

성현과 직접 맞붙어본 카츠히토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백성호가 발전했다면 그 이유는 무조건 성현 때문일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나도 길을 봤으니까.’

본인 또한 그러하였던 까닭이다.

중단세를 통해 성현이 보여준 확고한 ‘길’.

따라가는 뒷사람을 배려하듯, 하나하나 짚어가며 해주는 지도(地圖)이며 지도(指導)다.

성현이 보여준 길을 따른다면 아마 그도 백성호 못지않은 발전을 이룰 수 있으리라.

그래서 더욱 무시무시했다.

상대에게 이토록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 건,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아차렸기에.

‘정말 고등학교 1학년이 맞나?’

카츠히토는 가만히 눈을 감고 떠올렸다.

승리를 따낸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성현을.

그가 풍기는 기백은 오히려 카츠히토의 아버지, 가토 타츠야 이상이었다.

절대 고등학생이라고 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현대 일본 검도의 정화라 불리며 수두룩한 고단자들을 만나본 그조차, 처음으로 보는 것 같은 완숙하고 위엄 있는 기백이었으니!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오기라도 한 건지.’

잠시 그렇게 생각했던 카츠히토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며 금방 털어버렸지만,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와 검도를 하는 이가 있을 거라고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다시금.

진실은 어둠에 묻히고 말았다.

*

국가 교류전 2일 차.

한국은 차례대로 하와이, 멕시코, 말레이시아를 만나며 연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최근 검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딱히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던 세 나라였기에 지극히 무난한 경기였다.

유망주 대표팀 팀원들은 한층 더 가까워진 목표에 기뻐했지만, 오직 한 명- 성현만큼은 다소 아쉬움을 느꼈다.

본래 그가 국가 교류전에 참가했던 이유가 뭔가.

바로 훗날 검도계의 강자가 될 이들을 미리 새싹 밟기 하여 더 강하게 성장하게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무난하고, 기억에도 남지 않는 이들을 위해 쓸 시간은 그에게 없었다.

“다음 상대가 캐나다라고?”

“어제는 일본, 미국. 오늘은 캐나다. 끝내주네.”

“뭐,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할 상대였잖아.”

‘드디어.’

그렇기에 네 번째 상대로 캐나다가 걸렸을 때, 성현은 비로소 미소지을 수 있었다.

캐나다는 현재 일본, 한국의 2강 구도를 깨려고 벼르고 있는 미국 못지않은 검도 강국이었다.

2회와 3회 검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 그리고 6회, 7회, 8회, 9회, 11회 대회에서는 3위를 차지하는 등, 실로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기까지 했다.

비록 근래에 들어서는 미국에 밀려나며 주춤하고 있다지만, 언제든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국가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이 언제 위협적으로 변하는지 성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앞으로 팔 년 뒤.’

2028년에 있을 LA 하계 올림픽.

그곳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일본도, 한국도, 미국도 아닌 캐나다였다.

프레데릭 피어슨이 이끄는 캐나다 대표팀은 제임스 필리언과 레오나드 빈이라는 든든한 지원을 힘입어 단체전을 제패했다.

올림픽에 등재되고 겨우 두 번째에 일본이 정상 자리를 빼앗긴 거다.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고, 바로 그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 당시 캐나다 대표팀의 주장, 프레데릭 피어슨이었다.

‘스포츠화 된 검도에 누구보다 완벽하게 잘 적응한 인물이지.’

본래 검도는 자기 수양을 위한 무도(武道)다.

하지만 현대 검도는 신체의 정해진 장소를 죽도의 정해진 부분으로 정해진 동작을 취해 때려야 득점이 되는 스포츠(Sports)였다.

둘 중 어느 시점으로 검도를 대하느냐는 개개인에 따라 달랐다.

무도로 보는 이, 혹은 스포츠로 보는 이.

캐나다의 프레데릭 피어슨은 후자의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였다.

‘더 많이, 더 빠르게. 그게 신조라고 했었나.’

더 많이 휘두르고.

더 빠르게 움직여라.

그것이야말로 프레데릭 피어슨이 말한 검도에서 승리하는 방법이었다.

기본적인 이치는 타승법(打勝法)과 같았으나, 다른 점은 예의 같은 가치야 어찌 되었건 점수만 따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프레데릭 피어슨을 싫어하는 검도 팬들도 많았으니까.

그러나 숱한 나라들을 쓰러뜨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프레데릭 피어슨의 강함은 확실했다.

실제로 올림픽 경기에서 전승을 거두고, 개인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으니까.

‘흥미롭군.’

성현은 프레데릭과 겨뤄본 적이 없었다.

그가 활약할 시기에 프레데릭은 이미 검도계에서 은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더 많이 휘두르고, 더 빠르게 움직인다는 건, 상당한 체력 소모를 동반했다.

즉, 육체적 전성기가 끝나면 써먹을 수 없게 되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던 프레데릭은 자신의 육체적 전성기가 끝나는 시기- 삼십 대에 들어서는 해에 곧장 검도계에서 은퇴했다.

하여 한 번도 붙어본 적이 없었는데, 과거로 돌아오며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

시합을 준비하는 캐나다 대표팀.

그 뒤에 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의 프레데릭을 보며 성현이 흐릿하게 웃었다.

과연 어떤 검도를 보여줄 것인가.

무척이나 기대되었기에.

< 단 한 걸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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