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화 : 우리가 이길 겁니다
“으음-”
영준의 질문에 성현이 볼을 긁적였다.
뭐라 대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이미 세계의 여러 유망주가 미래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 알고 있었다.
그들 중 누가 특출나게 강해질 것인지 또한.
왜냐하면,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일이었으니까.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의 경험일 뿐.
현재의 그가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하여 성현은 이번 교류전에 관해 무어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내가 좀 알아보니까 장난 아니더라.”
그러나 영준은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 보였다.
아직 성현은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간 것이다.
영준의 입에서 다양한 유망주들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미국에서는 찰스 웨인이랑 로건 비터드, 이 두 명이 주목할 만하고, 캐나다에서는 제임스 필리언이랑 레오나드 빈, 참 프레데릭 피어슨도.”
여러 이름들 중 몇몇은 성현에게도 익숙했다.
대표적으로는 찰스 웨인이나 레오나드 빈.
그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훗날까지도 계속해서 검도계에 남아 활약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자주 부딪쳤던 일본인들이 아니라 미국인, 캐나다인이라는 것까지 고려해보면, 저들의 가능성은 정말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었다.
단 몇 번의 경기만으로 성현의 기억에 뚜렷하게 자신을 남겼다는 것이었으니.
몇몇은 아예 처음 듣는 이름인 걸 보면 가능성이 딱 거기까지였다거나,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검도를 그만두었을 듯했다.
‘이번에는 부디 끝까지 해줬으면 좋겠는데.’
문득 성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수민이었다.
‘전’에는 자신이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검도를 접었던 소년.
그러나 이번에 성현에게 집중 훈련을 받은 수민은 자신의 재능을 일깨우는 것은 물론, 확실한 가능성까지 드러냈다.
다른 나라라고 그런 이가 없을까?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다양한 사정으로 인해 검도를 그만둔 이들이 있을 터.
수민처럼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깨닫지 못했거나, 혹은 백성호처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거나 하는 이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국가 교류전에 참가하는 유망주 중 성현이 기억 못 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주목해야 할 대상들인지도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니까.’
일단 한 국가를 대표하는 유망주로서 국가 교류전에 나온 이들이니만큼 실력은 확실하다.
자격 없는 이들을 데리고 나오지는 않았을 테니.
거기에 더해, ‘전’에 겪어본 적 없으니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는지 모른다.
더 강한 이와 겨룸으로써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성현에게 이들은 아직 긁지 않은 복권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도 심지어 당첨일 가능성이 높은 복권!
‘생각보다 알찬 교류전이 될 수도 있겠는데?’
개중 한 명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국가 교류전에 참가한 의의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성현의 마음이 기대로 부풀었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강하다는 평이 많아. 그중에서도 히사츠네 아츠시랑 히라와타 신지, 가토 카츠히토가 탑3고.”
‘야규의 후예’ 히사츠네 아츠시.
‘무사시의 환생’ 히라와타 신지.
‘진정한 사무라이’ 가토 카츠히토.
영준이 차례로 입에 담은 세 명 모두 성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들이었다.
지금도 검도 종주국 일본에서 특급 유망주로 분류되는 이들은 훗날 일본 검도를 대표하는 선수로도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성현 이전의 한국 선수들을 번번히 검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좌절시켰던 게 바로 이들이기도 했다.
“신지는 성질이 급하고, 아츠시는 음흉해. 그리고 제일 강한 건, 카츠히토야.”
돌연 끼어든 툭툭 끊기는 어조의 목소리.
대화하고 있던 영준과 성현의 시선이 향한 곳은 목소리의 주인이 앉아 있는 방향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백성호가 흐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예전에, 상대해 본 기억에 따르면, 그렇다는 얘기야.”
“세 명 전부 상대해봤어?”
“응. 세 명 모두. 신지는 이도 사용자치고 성격이 꽤 급하더라. 보통 이도는 막고 치는 쪽인데, 걔는 반대야. 굉장히 공격적으로 나오더라.”
성현의 머릿속에 있는 히라와타 신지에 대한 기억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대개 역이도는 반격 위주의 경기 운영을 함에도, 신지만큼은 그것을 뒤엎고 치고 나오는 식으로 상대를 위압했었다.
나중에 인터뷰 등으로 접한 신지의 모습을 본 성현은 ‘성격이 이래서 그렇구나.’하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이어진 아츠시와 카츠히토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정확한 평가에 성현은 내심 고개를 끄덕거렸다.
“히라와타 그 새끼, 재수 없는 새끼입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끼어든 건 강찬울이었다.
아닌 척 해도 결국 다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대기실에서 멀뚱멀뚱 기다리는 것밖에 하지 않는 상황에서, 앞으로 만날 상대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들을 수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굳이 귀를 막고 안 듣겠다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재수가 없다니, 어떤 식으로?”
“공격적인 건 좋은데, 도가 지나칩니다. 일부러 목을 쑤시는 것도 그렇고, 몸받음도 거의 들이 받는 식이구요.”
“보통 그런 건 경고하지 않나?”
“경고 한두 개쯤은 신경도 안 써요. 더러운 새-”
“-강찬울.”
“아, 알았어요, 주장. 말조심 할게요.”
옆에 있던 김규호의 나직한 부름에 강찬울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렇게 잠시 일본의 유망주들 관련 내용으로 이야기를 꽃피우고 난 다음, 영준이 새삼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나씩 세어 보니 엄청 많네. 괜히 다음 세대가 황금 세대일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구나.”
차세대는 황금 세대가 될 것이다.
이 말은 현재 전세계 검도계에 똑같이 흘러나오고 있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물론이요, 미국, 캐나다, 대만 같은 여러 나라가 전부 한 세대 한 명 나오면 많은 수준인 유망주를 최소 두 명, 많게는 세, 네 명까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다음 세대, 그러니까 현재 유망주인 이들이 다 크고 나서 검도의 황금기를 구가한다는 사실을 성현은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를 종횡무진하며 검도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겼던 게 본인이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
“응?”
“황금 세대인 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아- 하하!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리고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검도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진짜배기 천재, 백성호부터 정철, 김규호, 백지호, 강찬울 등 실력 있는 유망주들이 많았으니까.
비록 ‘전’에는 교통 사고로 백성호를 잃은 뒤 잠시 침체기가 오며 다른 나라에 밀리다가, 성현의 등장 후에야 패권을 잡았지만···.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성현이 날뛰고, 그 뒤를 백성호를 비롯한 유망주들이 쫓고 있으니 확연히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터.
“우리가 이길 겁니다.”
확신에 찬 어조.
성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승리를 거두는 건 한국이 될 것이라고.
단지 자신이 한국 소속으로 국가 교류전에 가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곳에 있는 이들의 면면이 그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고 있던 까닭이 컸다.
“그래, 당연하지!”
“맞는 말이야.”
영준과 백성호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들 또한 두 사람과 같은 표정이었다.
회장기 검도 대회를 통해 서로의 실력을 질릴 만큼 알게 된 이들은 든든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그때는 조금 화나긴 했는데, 결국 생각해보면 제가 부족해서 진 거잖아요. 그래서─”
벌컥!
“-이제 곧 출정식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슬슬 여러분들도 나와주세요!”
슬슬 대기실에 가득했던 침묵이 사라지고,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질 무렵.
문을 열고 들어온 스태프가 소리쳤다.
그 말에 ‘드디어!’라는 표정이 된 일곱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태프의 인도에 따라─딱히 필요는 없었지만─ 향한 곳은 이전에 유망주 검도 대회 경기가 펼쳐졌었던 바로 그 코트였다.
그곳에는 이제 막 다른 스태프가 부르러 갔던 이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
꾸벅.
그중 하윤을 발견한 성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하윤 또한 성현을 발견하여 손을 들어올림으로써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윤의 옆에는 먼저 여자 유망주들이 모여있던 대기실로 향했던 수연이 있었는데, 그녀는 성현을 보자마자 방긋 웃어 보였다.
“······!”
붕붕!
파닥거리듯이 앞쪽에서 손을 흔들어대는 수연.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성현이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으니까.
이런 새로운 수연의 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자신의 마음을 숨기겠답시고 툴툴거렸던 게 은근히 후회될 정도였다.
“쟤··· 남친······?”
“···직은 ······지만, 조만간···!”
살짝 떨어져 있는 탓에 수연과 옆에 있던 다른 참가자가 떠드는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성현은 느긋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참가자들이 오와 열에 맞춰 서고 나자, 앞쪽에 마련된 단상 위로 한 사람이 올라오며 성현도 수연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국가 교류전 출정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이크를 잡고 말한 것은 한국 검도 협회의 이사, 곽해수였다.
그는 대개의 출정식이 그러하듯, 참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고 목표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딱딱한 목소리로 연설했다.
한국의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라며 이야기했고, 그건 대다수의 학생선수들에게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국가 대표 선수!
운동 선수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꿈꾸는 목표였으니까.
[······이번 국가 교류전을 통해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짝짝짝짝!
길지도 짧지도 않은 곽해수의 연설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출정식이 시작되었다.
물론 거창하게 출정식이니 어쩌니 해도, 대개는 선수들끼리 모여 사진을 찍는 것밖에는 없었지만 말이다.
성현을 비롯한 남자 유망주 단체전 참가 인원들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 와중에 성현은 이전에 합숙 훈련을 찾아왔던 위대한 선수도 만나기도 했다.
“전에 했던 제안은 생각해봤어?”
“제안? 무슨 제안? 설마 영입 제안은 아니겠지?”
“뭐? 대한이 형이 얘한테 서울시청 팀으로 오라고 했다고? 양심도 없이?
“위대한이 너 치사하게 그러기냐!”
“잠깐, 으악! 야, 아니-!”
다만 제대로 된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한국 대표 선수로 참가하는 이들 중에는 서울시청팀 소속이 아닌 이들도 있었고, 그들은 위대한이 성현을 자기 팀으로 꼬드기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이들이 아닌 까닭이었다.
반강제로 끌려가며 사라지는 위대한을 보며 키득거리던 성현의 앞에 나타난 건, 아까 단상 위에서 연설했던 곽해수였다.
“반갑습니다, 이성현 선수.”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검도 협회에서 이사를 맡은 곽해수라고 해요. 이렇게 직접 만나게 돼서 기쁘군요.”
단상 위에서 보였던 딱딱한 표정과는 달리,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네오는 곽해수.
성현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게 느껴지는 어조와 행동이었다.
손을 맞답고 악수하던 중,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번에 꽤 재밌는 대회를 하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거예요.”
“대회라 하심은···?”
“당장 말해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군요. ‘옥룡기’를 기억하세요.”
성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일본의 검도 대회 중 하나인 옥룡기에 대한 정보를 떠올린 까닭이다.
그가 이번에 준비하는 대회가 어떤 형식이 될 지 눈치챈 듯 보이자, 곽해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를 위해서는 이번 국가 교류전을 통해 한국의 위상을 드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한국 내부에서 권위 있는 대회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부디 좋은 성적 부탁드립니다. 이성현 선수.”
“···네. 걱정 마세요.”
성현이 빙긋 웃었다.
곽해수의 말 덕에 방금 국가 교류전을 정복해야 할 이유 하나가 늘어났으니까.
“기대에 보답해드리겠습니다.”
< 도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