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어떨 것 같아?
“천수아 팀장님.”
놀라운 일도 반복되면 더는 놀랍지 않은 법.
성현은 합숙 훈련에 이어, 두 번째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수아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에.
‘전’에도 똑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국가대표로 출전할 때면, 항상 찾아와 배웅해 주던 천수아였으니까.
국가 교류전 또한 어엿한 국제적인 검도 행사!
비록 국제 대회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찾아올 이유로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할 수 있었다.
‘치마···.’
반면, 수연이 집중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복장을 발견한 것이다.
합숙 훈련 당시에 찾아왔을 때만 해도 천수아는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한데 오늘, 그녀가 입은 건 다리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검은색 정장 치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수연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깃들었다.
‘역시, 맞는 거 같아.’
겨우 복장 하나만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겼던 의심이 복장을 계기로 폭발하였을 뿐.
첫 만남 이후 여러모로 천수아에 대해 알아봤던 수연은 그녀가 늘 똑같은 정장 차림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게 천수아의 상징처럼 되어 있던 까닭이다.
한데 성현을 만나러 올 때만 치마를 입었다는 것이었으니···.
‘호구 전달할 때도 만났다고 했고.’
더 이상 말해서 무얼 하랴.
수연은 이미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타시죠.”
그런 수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수아는 자연스럽게 자동차의 뒷문을 열며 손짓했다.
성현은 별말 없이 익숙하게 차에 올랐다.
‘전’에 이미 많이 겪었던 일이었으니까.
잠시 천수아의 냉정한 얼굴을 바라보던 수연도 곧 차에 올랐다.
여기서 괜히 타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그녀였다.
천수아가 조수석에 오르자, 이내 자동차는 소리 없이 출발했다.
“······.”
“······.”
꿉꿉한 침묵이 감도는 차 안.
분명 에어컨은 적당하게 켜져 있는데도 까닭 모를 서늘함이 감돌고 있었다.
딱히 서로를 노려보거나, 혹은 뭔가 다른 행동을 취하는 건 절대로 아니건만, 그저 분위기만으로도 차 안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것이다.
정작 그 사이에 있는 성현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이성현 선수, 그리고 강수연 선수.”
먼저 입을 연 건 천수아였다.
그녀는 자신을 흘깃거리는 수연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두 분 모두 국가 교류전처럼 국제적인 대회는 처음으로 출전하시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성현과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가 교류전은 물론이요, 검도 세계 선수권 대회까지도 휩쓸었던 성현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의 이야기.
당장 누리는 유명세와는 별개로, 지금 그는 이제 겨우 국내에서 두 개의 대회를 우승했을 뿐이다.
국제적인 대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혹시 기억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두 분께서 저희와 맺은 후원 계약에 따르면 국내 대회에서는 별다른 제한이 없으나, 국제 대회에서는 철저히 저희 제품만 쓰게 되어 있습니다.”
확실히 계약서에는 그러한 내용이 있었다.
국내 대회에서는 티셔츠나 손목 밴드 등 언더키 제품을 하나씩 사용하기만 하면 다른 제품을 사용해도 무관하나, 국제 대회에서는 무조건 언더키 제품만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아무리 유망주를 키우기 위해 후한 후원을 해 주는 언더키일지라도, 그런 기본적인 조항은 넣어 뒀으니 말이다.
‘게다가 국제 대회까지 나갔는데도 마냥 유망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유망주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느냐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여하튼 후원해 준 상대가 국제 대회에까지 나간 이상, 언더키도 챙겨 가는 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네,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 언더키 걸로 가져왔거든요. 그치, 성현아?”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폈던 두 사람은 이미 국제 대회에 관한 조항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짐을 챙길 때 이미 다른 브랜드 제품을 최대한 제외했었다.
사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 모두 과거부터 언더키 제품을 애용하는 타입이라, 따로 크게 덜어내야 할 물건은 없었으니까.
“다행이군요.”
“그걸 말씀하러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반쯤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바로 이걸 드리기 위해섭니다.”
천수아가 건넨 것은 가슴팍에 언더키의 마크가 박혀 있는 반팔 저지였다.
얇고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저지.
쥐고 있기만 해도 서늘함이 감도는 게, 여름에 입기에 딱 적당해 보였다.
“이건···.”
“이번에 저희 측에서 내는 신상품입니다. 지금 같은 여름철에 가볍게 입기 좋은 저지죠.”
지금 시점에 이걸 건네주는 의미는 명확했다.
신상품 출시와 국제 대회를 엮어, 대중들에게 제대로 선을 보이겠다는 것일 터.
성현과 수연이 언더키와 맺은 후원 계약의 내용 중에는 언더키 측에서 제공하는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있었다.
따라서 이것을 주는 것 자체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굳이 우리한테?’
‘신상품’이라 한 것을 보면, 이제 출시를 준비하는 제품일 터.
그걸 유망주에게 입혀서 처음으로 대중에 선보인다는 것은 언더키 측으로서도 상당한 모험이다.
만약 성현과 수연이 국가 교류전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신상품의 홍보가 시작부터 삐끗할 가능성도 있었으니.
물론 두 사람이 끝내주게 활약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더불어, 두 분께서 국가 교류전 이후 광고 촬영을 할 제품이기도 합니다.”
“오호.”
“드디어 광고를···!”
광고라는 단어에 수연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처음 주말에 성현과 함께 훈련했을 당시 들렀던 언더키 스포츠용품점.
그곳에서 두 사람이 함께 광고를 찍자고 했던 대화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니까.
몇 달간 벼르던 그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이 저지의 좋은 점은 또 하나 있었다.
‘신상품이니 우리만 입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커플 룩처럼 보이겠지? 좋다~’
실상이 어떻든, 중요한 건 어떻게 보이는가다.
현재 성현의 바깥 해자부터 차근차근 메워 나가고 있는 수연에게 이건 기쁜 소식이었다.
이런 소식을 알리기 위해 찾아온 거라면 천수아가 온 것 또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줄···.
‘···아니, 그건 아니지.’
수연이 냉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빠르게 달리던 자동차가 멈춰 섰을 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국가 교류전에 참가하는 인원들은 잠실 학생 체육관에서 짧은 출정식 이후에 버스를 타고 이동, 이후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제1회 국가 교류전의 개최지가 일본이었기에.
따라서 현재 자동차가 도착한 곳은 잠실 학생 체육관 앞이었다.
“여기에 온 건 거의 두 달만인가.”
잠실 학생 체육관을 올려다본 성현이 중얼거렸다.
“검도 유망주 대회 이후 처음이니까- 응, 두 달 정도 됐어.”
“생각보다 별로 안 됐네.”
“그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수연을 보며 성현이 피식 웃었다.
“이성현 선수, 강수연 선수.”
주섬주섬 짐을 들어 올리던 성현과 수연을 부른 건 마찬가지로 차에서 내린 천수아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오늘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 손을 모은 채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두 분 모두, 건투를 빕니다.”
“···기대에 보답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열심히 할게요!”
이내 다시 차에 오른 천수아가 떠나갔다.
그 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성현과 수연은, 곧 잠실 학생 체육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전에 한 번 왔던 곳이기에 헤매는 일은 없었다.
유망주들이 출정식 전까지 잠시 사용할 대기실이 이전에 대회 때 썼던 곳이라는 이유도 있었고.
검도 유망주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도착한 곳은 여자부 대기실이었다.
“이따 보자.”
“응. 이따 봐!”
대회 때처럼, 눈을 맞추며 씩 웃은 성현과 수연.
수연이 여자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 본 성현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부 대기실의 위치는 정반대 편.
제법 오랫동안 걸은 끝에 도착한 그곳에는 ‘유망주 대기실’이라는 명패가 걸려 있었다.
“······.”
성현은 이전 대회 때 그랬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쥐고 돌렸다.
벌컥.
──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대기실에 앉아 있던 이들의 시선이 성현을 향해 날카롭게 꽂혀 든다.
그러나 검도 유망주 대회 때와는 달랐다.
시선에 실린 무게감이.
지금이 더 무겁고, 날카롭고, 힘이 있었다.
하기야, 현재 이 대기실에 모인 이들은 내로라하는 유망주 중에서도 거르고 거른 끝에 모은 일곱 명이니···.
“······.”
모인 이들의 면면을 본 성현의 입가가 살며시 끌어 올려졌다.
하나같이 기억에 제대로 남은 이들이었기에.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건, 그만큼의 실력과 가능성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왔구나.”
“좀 늦었네.”
가장 먼저 성현에게 인사를 건네 온 건, 역시나 같은 광천고등학교의 두 사람이었다.
선봉 순서를 맡은 정철과 3위를 맡은 최영준!
먼저 도착해 있던 두 사람은 대기실에 들어오는 성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흥!”
“···왔네.”
“······.”
다른 세 명의 반응은 다양했다.
코웃음 치는 이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이, 그리고 침묵 속에서 투지를 불태우는 이까지.
각자의 성격이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강찬울과 백지호, 김규호가 바로 그 주인공으로, 이들은 유망주 단체전에서 각각 2위와 5위, 중견을 맡은 바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
“······.”
옅은 미소를 띤 채 성현을 보는 소년이 있었다.
유망주 단체전에서 주장 다음가는 순서인 부장을 맡은 이였으며, 일찍이 학생 검도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자.
‘천재’ 백성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미소로 성현의 등장을 맞이했다.
이렇듯 여섯 명의 각기 다른 반응을 본 성현은 더욱 진하게 웃었다.
“다들 모여 있다니. 제가 좀 늦었나요?”
유망주 단체전의 주장.
‘천재’라 불리던 이를 꺾은 괴물.
학생 검도계에 전무후무한 신화를 쌓아 올린 이.
이 안에 있는 누구보다도 높은 금자탑 위에 올라선 성현이 담담히 말했다.
마침내, 국가 교류전 유망주 단체전에 나갈 일곱 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선봉 정철, 2위 강찬울, 3위 최영준, 중견 김규호, 5위 백지호, 부장 백성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장 이성현까지.
‘광천고 셋, 용암고 둘, 경중고 둘인가.’
딱히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회장기 대회에서 겪었던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나더 레벨이었던 경중고는 제쳐 두고, 4강에서 만났던 호군고는 8강에서 만난 용암고보다 특출난 점이 없었으니.
아직 만나지 못한 금제고도 일단 멀리서 볼 때, 확고한 빛을 품은 이가 없었고 말이다.
물론 국가 교류전에 가는 인원은 이 일곱 명을 제외하고도 더 많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치르는 국가 교류 기념 단체전에 나서는 출전 선수는 이들 일곱 명으로 확정이 된 상태였다.
즉, 사실상 이들이 현 한국 유망주를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냐. 우리도 방금 왔어.”
“시간도 아직 이십 분 가까이 남았고.”
“다행이네요.”
성현은 정철과 영준 옆으로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침묵.
딱히 이들 사이에 웃고 떠들 만한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닌지라, 서로 입만 꾹 다문 채 있었다.
그것을 견디다 못한 영준이 슬쩍 성현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성현이 네가 생각하기에는 이번 국가 교류전, 어떨 것 같아?”
< 우리가 이길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