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개화
“네. 말씀하세요.”
성현이 흔쾌히 대답했음에도 하윤은 머뭇거렸다.
선선한 밤공기에 취해 냅다 지르기는 했지만, 정말로 말해도 되는지 망설여진 까닭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저도 잠시.
이내 결심한 표정이 된 그녀는, 성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성현이 너는 이상형이 뭐야?”
“이상형··· 이요?”
“응. 뭐 이런 사람이 내 취향이다, 하는 거 있잖아. 연인이 되고 싶은 사람 같은 거-”
질문을 들은 성현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분명 검도에 관련된 질문일 줄 알았건만, 예상도 못 한 이야기가 튀어나왔으니까.
갑자기 이상형이라니?
“별건 아니고, 그냥 아까 방에서 이야기가 나왔었거든···. 그래서 문득 궁금해져서.”
하윤이 재빨리 변명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여자들끼리 했던 대화의 연장선일 뿐이며,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까지 덧붙여 가면서.
손을 휘휘 내젓는 그녀의 모습을 본 성현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상형이라···.’
굉장히 낯선 말이라고 성현은 생각했다.
아주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단어이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검도를 하며 단 한 번도 연애에 관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전’에 대학이 갈라지며 수연과 어영부영 멀어지게 된 이후, 서른 살까지는 그저 한결같이 검도에만 매달렸던 그다.
그리하여 재능을 발견하게 된 서른 이후로는 모든 것을 불태우듯 검도에만 매진했고.
‘연애할 시간 자체가 없었지.’
허망하게 흘려보냈던 시간을 되찾기 위해서는 남들의 열 배 이상을 더 노력해야만 했다.
그를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그렇게 성현이 내버린 것 중 하나가 바로 연애 같은 ‘부가적인’ 것들이었다.
잘라낼 수 있는 건 전부 잘라냈다.
필요한 것은 그저 검도뿐.
뒤늦게 깨달은 재능을 갈고닦아, 기량을 끌어올리고,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자신조차 장작 삼아 타오르기에 ‘맹화(猛火)’.
회장기 검도 대회 개인전 당시, 성현을 보며 미치광이의 불꽃이라 평했던 백성호의 말은 옳았다.
그것은 진정으로 검도에 미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고, 끝내 거기에 이르렀다는 건 성현이 진짜배기 미치광이였다는 뜻이었으므로.
‘더 나이를 먹어서도 마찬가지고.’
시간이 흐르며 육체의 노화로 인해 슬슬 힘이 빠졌을 때도 변하는 건 없었다.
검도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고, 연애 같은 사소한─성현이 보았을 때─일에 쓸 여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불패(不敗)’라는, 반쯤 사람의 영역을 벗어난 기술을 얻기 위해서는, 성현 스스로가 사람을 벗어나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검도에만 매진하며 보낸 시간이 무려 오십여 년.
강산이 다섯 번은 변할 시간 동안 연애에 관한 건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웠으니, 이상형이라는 단어조차 낯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또 저 표정이다···.’
아닌 척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성현의 얼굴을 보던 하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의 성현은 아까와 똑같은 얼굴임에도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 만들어진 석고상 같았다.
이전, 그녀가 성현과 함께 곰돌이 인형을 구경했던 그때와 같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서히 성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얼마 전, 유망주 대회가 끝났을 때 친구인 태준에게 들었던 충고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앞으로 검도 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일 년 남은 줄 알겠다!
‘그래, 그렇지.’
성현은 이제 시간을 허무하게 보냈던 서른 살도 아니고, 노화로 인해 쇠약해진 노인도 아니었다.
한참 팔팔해서 날아다닐 고등학교 1학년이다.
그 사실이 그에게 여유를 불어넣었다.
‘전’에는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던 그것을.
한 번쯤 연애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나저나, 이상형이라-’
“으음-”
문득 성현의 머릿속을 스친 건 첫사랑이었던 여인과 검도에만 매진하던 그를 헌신적으로 지탱해줬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흘러간 시간 속의 인물들을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들을 이상형이라 말하는 건 그녀들에 대한 실례일 테니.
“딱히 이상형 같은 건 없습니다. 그냥- 마음이 끌리는 사람?”
“그렇구나···.”
“네.”
잠시 이어진 침묵.
마지막으로 남은 레모네이드를 호쾌하게 털어 넣은 하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고 싶은 것도 들었고, 음료도 다 마셨으니.
슬슬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내일 훈련이 괴로워질 시간이기도 했고.
“나는 이만 자러 가야겠다-”
“좋은 밤 되십시오.”
“응. 성현 후배도. 내일도 같이 힘내자!”
자그마한 주먹을 꼬옥 쥐며 말하는 하윤.
슬며시 웃은 성현이 그녀를 배웅했다.
그렇게 하윤이 떠난 후.
“······.”
홀로 남은 성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전’과는 많이 달라진 상황.
광천고의 위상도 그러하였고, 그가 여태껏 쌓아 올린 인연 또한 마찬가지다.
그 말인즉.
‘연애라.’
이번 생에는 한 번쯤 연인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아직 열일곱 밖에 되지 않은 나이.
평생을 오롯이 검도에만 매진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있으니.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건 하나였다.
연애라는 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상대가 있어야 연애라는 것도 가능한 법.
‘그럼 상대는-’
가장 먼저 성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수연의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그의 첫사랑이었던 상대.
그리고 아마도, 고등학생이 된 후로 가장 깊은 인연을 쌓은 소녀.
뒤이어 떠오른 건 작게 미소 짓는 천수아였다.
‘전’의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던 그녀.
이번 생에도 그녀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하윤이었다.
분명히 ‘전’과 가장 많이 다른 관계가 된 이를 꼽으라면 첫손가락으로 택할 소녀.
검도에 열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성현마저 때때로 ‘아름답다’라고 느끼고는 했으니까─그게 연애 감정인지는 둘째 치더라도─.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하하-”
문득, 성현은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라는 말이 돌연 생각난 까닭이다.
그가 상대를 고른다고 해서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모르겠고.
칠십 살 넘게 연애 한 번 안 해 본 이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
첫째 날 이후로도 광천고의 합숙 훈련은 훌륭하게 진행되었다.
대개 운동부 합숙 훈련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는 두 가지, 바로 장소와 분위기였다.
그런 면에서 광천고의 합숙 훈련은 더할 나위 없이 합격점이었는데, 언더키에서 제공해 준 만큼 숙소나 체육관 모두 굉장히 수준이 높았고, 모두가 주전을 노리고 열의에 차 임했기 때문이다.
“자, 다시 한번!”
“으랴아앗-!”
좋은 장소와 좋은 분위기.
두 가지 요소가 잘 모인 이상, 합숙 훈련이 실패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겨우 3박 4일 만에 어마어마하게 강해지지는 않았다.
운동이란 건 꾸준한 노력만이 실력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훈련한다 해서 대단한 성과를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4일간의 합숙 훈련은 검도부원들에게 분명한 뼈대를 세웠다.
강해질 여건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했다는 뜻이다.
이들이 지금의 훈련을 잊지 않고 꾸준하게 단련하다 보면 광천고는 일반부원들까지 강한 진짜 명문 강호의 모습을 갖추게 되리라.
그리고 성과를 본 건, 수민의 훈련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억, 헉! 헉!”
합숙 훈련의 마지막 날.
성현에 의해 한계까지 몰린 수민은 죽도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벌써 몇 시간째 이어진 대련의 결과였다.
지난 합숙 훈련 동안, 성현은 자신이 했던 말─수민을 가르쳐 준다는─을 철저히 지켰다.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붙어서 대련을 해 줬으니.
다만 그것이 행운이라 해야 할지는 지켜보던 1학년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했다.
현 고교 검도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성현이가 직접 가르쳐 주는 거니까 행운이 맞다는 의견과 저런 건 합숙 훈련이 아니라 지옥 훈련이라는 의견이 대립했으니까.
“······.”
그것을 뻔히 알고 있는 성현이지만, 마지막까지 그는 훈련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슬슬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민의 재능이 개화할 가능성을.
“다시 간다.”
“흐으-”
제대로 대답조차 내뱉지 못하는 수민.
그러나 그의 눈만큼은 빛나고 있음을 성현은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너무나도 고되고 힘든 나머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음에도 수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죽도를 곧추세우며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낼 뿐.
‘나는, 할 수 있어-!’
실로 역설적이게도, 그건 성현의 덕분이었다.
현재 수민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성현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난 합숙 훈련 동안 계속해서 그를 붙잡고 대련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성현이 그를 몰아붙일수록, 오히려 자신에게 재능이 있으므로 이토록 열심히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린 거다.
‘나는!’
수민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번쩍였다.
지난 훈련으로 피로에 찌든 몸도,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죽도도, 그에게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현이 채 팔을 내뻗기도 전에, 이미 어디로 올지를 ‘예측했으니까’.
두려움은 무지함에서 오는 법.
이미 알고 있는 공격은, 두렵지 않다.
‘-할 수 있어!’
힘없이 들어 올려진 수민의 죽도에 뒤늦게 성현의 죽도가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마치 빨려 들어와서 부딪치는 것처럼.
그것을 깨달은 수민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자신이 먼저 죽도를 들어 올렸고, 그 뒤에 성현의 죽도가 휘둘러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그제야 수민은 성현이 계속해 왔던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전조를 봐라.”
,
“한발 앞서서 움직여야 한다.”
,
“육체 능력은 둘째.”
,
“필요한 건 보는 것뿐.”
같은, 대련 중 성현이 했던 말들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모두 사실이었다.
방금 그는 성현의 일격을 막을 힘 따위는 없었다.
실제로 그의 죽도는 성현의 죽도가 두들기는 순간 휙 밀려났으니까.
‘이제 조금은 알겠어.’
그러나 중요한 건 얼마나 힘이 있는가가 아니다.
성현의 말처럼, 필요한 건 ‘보는 것’뿐이었다.
상대를 보면 어떻게 움직일지 간파할 수 있고, 그로써 멈춰 세울 수 있을 테니.
수민이 떨리는 눈으로 성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성현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하, 하하-”
엉덩방아를 찧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수민이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쥐어 짜내고 있던 도중인데, 목표를 달성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다리에 힘이 풀렸기에.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가슴 벅찬 기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으, 아아아-!”
기쁨에 차 토해 내는 외침조차 나약할지언정.
그 속에 가득 담겨 있는 감정만큼은 폭발할 것 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기뻐하는 수민.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재능을 개화한 이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
‘첫걸음을 내딛는 데 나흘이라···.’
성현은 가만히 기뻐하는 수민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기대 이상이었다.
그는 이번 합숙 훈련 동안 수민이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손에 쥐기를 바랐을 뿐이었으니.
하지만 수민은 자신 이상으로 성현을 믿었고, 그 끝에 기어코 첫걸음을 내디뎠다.
훌륭한 성과였다.
‘이 정도라면-’
“수민아.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합숙 훈련으로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러, 9월.
국가 교류전이 그 막을 올렸다.
< 모시러 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