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입단 제의
“좋아. 이번에는 여기까지.”
“헉, 허억, 헉!”
성현의 휴식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민이 그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차라리 쓰러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대답조차 못 하고 나자빠지는 모습이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하기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호구의 무게는 대략 3~4킬로그램 정도.
그걸 몸에 걸친 채 쉬지 않고 움직이다 보면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릴 테니까.
‘일부러 한계까지 몰아붙이기도 했고.’
‘전’의 성현은 검도 도장을 차려 수련생들을 가르치며 생활했었다.
무려 이십 년이 넘도록.
심지어 그의 눈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도 혁혁한 공을 세워, 말년에 들어서는 도장에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바글바글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경험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성현에게 수민의 한계를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거기까지 밀어붙이는 것 또한.
물론, 만약 수민의 재능이 그와 같은 종류가 아니었다면 그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으리라.
천천히, 차분하게 실력을 끌어올리려 했을 터.
그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한계까지 내몰려야 진가를 드러내는 재능이니.’
정말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는 그 순간.
오직 눈만이 상대를 쫓는 수단일 때야말로 진정으로 재능이 개화하는 것이기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수민에게는 정말 안타깝게도, 성현이 재능을 개화한 게 이런 식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 그가 가능했다는 건 가장 확률이 높은 방식이라는 뜻이니까.
“최대한 쉬어 둬. 십 분 뒤에 다시 시작할 테니.”
“헉- 허억, 나, 나- 죽어···.”
“괜찮아.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지 않아. 말할 힘이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으, 어어-”
담담한 성현의 대답에 수민이 꿈틀거릴 즈음.
서유나 감독과 함께 체육관에 들어섰던 위대한이 성현을 향해 다가왔다.
자신을 향해 오는 이를 눈치챈 성현이 그쪽을 바라보자, 위대한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이성현이 맞지? 난 위대한이라고 해. 만나서 반갑다.”
“···아, 네. 이성현입니다.”
성현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인물이 바로 당일에 그를 찾아왔으니까.
하지만 당황도 잠시.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젊은 위대한의 얼굴을 보며 그는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운 옛 인연 하나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기에.
“-반갑습니다.”
위대한의 손을 맞잡으며, 성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에 대한 정보였다.
위대한.
그는 현역 선수 중에서도 돋보이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 바로 지도자로서의 역량이었다.
차후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 검도가 등재된 이후, 국가대표팀의 감독까지 맡을 정도였으니 더 말을 해서 무얼 하랴.
말년에 차린 도장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대표도 여럿 배출해 내며 명문 도장으로 이름을 높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위대한’ 스승이었다는 뜻이다.
선수로서의 기량은 일류.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초일류.
그것이 바로 위대한이라는 남자였다.
“혹시 대학 어디 갈지는 정했니?”
가볍게 인사를 나누자마자, 위대한이 훅 들어오듯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정말이지 단도직입적인 어조였다.
그러나 성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전’에 질리도록 이어졌던 인연이었던 만큼, 위대한의 직관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뇨, 아직.”
“그럼 고등학교 졸업 후 계획은?”
“대학 진학, 아니면-”
“실업팀 입단이겠지?”
“네, 그렇죠.”
성현의 대답에 위대한이 씩 웃었다.
바로 그것이 그가 바라던 이야기였으니까.
“그럼 서울시청팀은 어때?”
“서울시청팀이요?”
“그래. 내가 서울시청팀 소속이라서 하는 말은 아닌데, 여기가 진짜 좋거든. 여러모로.”
누가 봐도 서울시청팀 소속이어서 하는 말이었지만, 위대한은 뻔뻔스러웠다.
주위에서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던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간 것이다.
“일단 딱 이름만 들어도 알겠지만, 여기가 서울 연고지 팀이란 말이야? 그래서 서울 내에서 바로 다닐 수 있어. 좋지?”
“그렇군요.”
“게다가 현재 서울시에서 대대적으로 지원 중이야. 지금이 딱 들어올 만한 찬스라 이거지.”
사실 이건 거의 대다수 시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더키에서 하도 공격적으로 검도에 투자하며 저변을 넓히다 보니 슬슬 대다수의 실업팀이 소속되어 있는 시청이나 구청 쪽에서도 반응이 돌아오고 있던 거다.
게다가 아예 기업들이 후원하며 만든 실업팀도 있는지라,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투자를 감행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다만, 이는 미래를 아는 성현으로서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언더키가 실업팀 창설하는 게 언제였더라.’
직접 언더키가 검도판에 뛰어들며 창설할 실업팀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실업팀이지만, 그 존재를 이미 알고 있으니 서울시청팀 소속이 되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여담이지만, ‘전’의 성현이 소속되어 있던 곳도 바로 언더키 실업팀이었다.
“무엇보다 내 백으로 들어오는 거면 팍팍 밀어줄 수 있다고. 어때, 끌리지 않아?”
“그래도 되는 건가요?”
질문을 들은 위대한이 유쾌하게 웃었다.
농담 삼아 한 말이라는 것처럼.
하지만 서울시청팀에서 위대한이 쌓은 입지라면, 밀어주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만약 그가 그럴 생각만 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서울시청팀은 차후 그가 현역에서 은퇴하면 코치로 섭외하여 키우다가, 이내 감독직까지 맡길 생각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졸업 이후에 바로 실업팀으로 갈 생각 있으면 연락하도록 해. 자, 이건 내 명함.”
성현은 위대한이 건넨 명함을 받아들었다.
‘서울시청팀 소속 검도선수 위대한’이라 당당히 쓰인 명함에는 그의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따위가 적혀 있었다.
주위에 있던 검도부원들의 선망의 시선이 명함으로 향했다.
명함 자체는 별거 아닌 종이 쪼가리일 뿐이지만, 그 안에 실업 선수로 가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니 탐이 난 까닭이었다.
‘뭐, 어쨌든 이 년 뒤의 일이지만···.’
성현은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다.
즉, 아직 졸업까지는 이 년이 넘게 남아 있다는 거고, 대학 진학이든 실업팀 입단이든 그때까지 미뤄 둬야 한다는 뜻이다.
위대한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차후에 영입 전쟁이 벌어질 게 뻔하므로, 미리부터 침을 발라 두려는 속셈이었다.
“그럼, 이만 가 봐야겠네.”
“어딜 가려고.”
그렇게 명함을 준 뒤 깔끔하게 퇴장하려던 위대한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유나 감독의 손에 붙잡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창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합숙 훈련에 온 상황을 그냥 지나쳐 버릴 그녀가 아니었으니.
결국, 위대한은 모여든 광천고 검도부원들에게 선수 생활에 대한 질의응답은 물론이요, 다양한 지도까지 해 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
훈련이 끝난 후.
대부분의 광천고 검도부원은 숙소에 들어오는 즉시 쓰러지듯 잠들고 말았다.
첫날이라 아직 기운이 넘쳐날 때라 한껏 열의를 불태운 데다가, 위대한의 등장으로 인해 더 힘을 내다 보니 모든 힘을 쏟아 버린 것이다.
특히나 수민 같은 경우에는 온종일 성현에게 지도받다 보니, 뭘 할 여력이 남지 않기도 했다.
처음에는 부러워했던 다른 1학년생들조차 나중에는 질린 표정으로 보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하루가 얼마나 고됐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끝나고 같이 게임 하자고 하더니만···.’
심지어 이는 주전들도 마찬가지였다.
성현은 주전들이─정철마저 그랬다─죄다 침대 위에 널브러진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처음 숙소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훈련 끝나고 나서 합숙답게 적당히 놀다가 자자며 이야기했던 이들의 모습이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잠깐 바람이나 쐴까.’
마침 적당한 장소도 있었다.
현재 남자 검도부가 머무는 숙소는 2층이었는데, 여기에 위치한 카페에 외부 테라스가 있던 거다.
카페에서 적당한 음료를 사 든 성현은 외부 테라스로 나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8월이었으므로, 한밤중이 되었지만 바람은 어디까지나 선선하기만 했다.
“서울시청팀이라···.”
역시나 가장 먼저 성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훈련 중에 있었던 위대한의 방문이었다.
서울시청팀으로 오라는 제안.
아직 언더키가 실업팀을 창설하지 않은 이상, 가장 좋은 제안이라는 건 틀리지 않았다.
위대한의 말마따나 연고지가 서울이라는 점도 좋고,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는 시기라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위대한 본인이 있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전’의 위대한이 자신이 감독으로 있던 서울시청팀이 아니라 언더키 실업팀으로 갔던 것에 실망했던 걸 생각해 보면, 한 번쯤 서울시청팀으로 활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뭐, 언더키가 실업팀 만들면 바로 옮길 거지만.’
시청에서 대대적으로 투자를 한다고 해 봐야, 언더키에 비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팀이 없을 때조차 막대한 돈을 검도에 쏟아붓던 언더키가 아니었던가.
금액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지원적인 면에서도 시청 소속 팀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만큼, 옮기는 건 실로 지당한 일이었다.
타박.
“-응?”
문득, 뒤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성현이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하윤이 서 있었다.
막 씻고 나온 듯 발그레한 볼과 촉촉하게 젖어 있는 머리카락, 편하게 입은 하얀색 티셔츠 차림의 임하윤이었다.
하윤도 설마 성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듯, 살짝 놀란 듯 크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윤 선배.”
“아- 그래. 안녕.”
어딘지 어색하게 대답한 하윤이 슬그머니 성현의 앞자리에 와서 앉았다.
“안 주무시네요.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으응, 피곤하긴 한데 잠이 잘 안 와서···.”
잠자리가 달라지면 가끔 그럴 때가 있다고 말한 하윤이었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녀가 잠이 잘 안 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단지 그것을 성현에게 말할 수 없을 뿐.
‘집에서 늘 안고 자던 인형이 없어서 잠이 안 온다고 어떻게 말해!’
나름대로 자신이 카리스마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하윤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최대한 덤덤해 보이도록 말했다.
“좀 쉬다가 가서 자야지. 너는?”
“저는, 음. 이것저것 생각할 게 있어서요.”
“오늘 위대한 선수 제안 같은 거?”
“네. 맞아요.”
성현은 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실제로 방금까지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참, 오늘 가르쳐 주던 애 봤어.”
“수민이요?”
“응. 3학년 선배님들 빠진 뒤를 생각하는 거야?”
“네. 아무래도 세 분이나 되시니까요.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야 지킬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지켜? 아- 모든 대회 우승 선언?”
하윤의 말에 성현이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였으니까.
만약 모든 대회 우승 선언을 지킬 것이 아니라면 벌써 3학년들이 졸업한 이후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내년부터 천천히 2학년이 된 이들이나, 혹은 새로 들어온 1학년들을 뽑아 대회 경험을 시켜 가며 성과를 내면 됐을 테니···.
하지만 성현은 검도 매거진에서 했던 인터뷰처럼 차후 모든 대회의 우승을 노리고 있었고, 그를 위해선 미리 준비해 둬야만 했다.
“그럼 그 애는 주전 확정?”
“아뇨. 아직은. 그래도 잘 따라오기만 한다면 아마 뽑지 않을까요?”
“흐음- 그 정도란 말이지.”
흥미가 생긴 듯 하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 상대와 대련을 하는 것을 즐기는 그녀다.
따라서 성현이 저렇듯 후한 평가를 준 상대를 직접 상대해 보고 싶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
잠시 대화가 끊어지며 흐르는 침묵.
카페에서 사 온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신 하윤은 슬쩍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살며시 얼굴에 홍조를 띤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개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