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 녀석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그 순간.
천수아가 특유의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강수연 선수.”
“네?”
경계심 어린 얼굴로 대답하는 수연.
그건 마치 햄스터가 손에 들어온 해바라기 씨를 빼앗아 가는 사람을 보는 표정 같았다.
하지만 천수아는 썩 개의치 않은 듯 보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현의 손을 놓은 뒤, 수연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상대의 활약을 기원할 때는 ‘원래’ 그런 식으로 손을 잡는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처럼-
“결승전은 아쉬웠습니다. 다음번에는 꼭 우승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앞으로도 좋은 활약 보여주시기를.”
“아, 네···. 그럴게요.”
수연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딘지 맥빠진 얼굴이었다.
하기야, 한껏 경계심을 높이고 있었는데 상대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러나면 그럴 만도 했다.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뭐야, 이게 끝?’
‘생각보다 시시한 결말인데.’
그건 지켜보고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촉즉발로 보였던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자, 뭔지 모를 아쉬움을 느낀 것이다.
사실 뭔가 터져도 문제겠지만 말이다.
“···이제 가 봐야겠군요.”
천수아는 마지막으로 아주 잠깐 성현을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다른 분들도 모두 힘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천수아가 떠나간 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연이 참았던 것을 토해 내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를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 된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닌가?”
“뭐가?”
“아니, 그냥. 그런 게 있어-”
수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천수아를 보는 순간, 촉이 딱 왔다.
상대가 자신에게 엄청나게 강력한 경쟁자가 될 거라는 그런 느낌이.
시선과 표정, 기색이 그 생각에 확신을 더했고.
예상과는 달리 순순히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계해야겠지?’
일단은 세가 불리하니 물러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직 자각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저 자신의 과민 반응일수도.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상대가 언제 어떻게 돌변해서 그녀만의 해바라기 씨를 빼앗으려 할지 모르니.
경계하고 있지 않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 수연이었다.
“이제 들어가서 짐 풀자. 정리 끝나는 대로 체육관으로 모이고.”
서유나 감독이 나서서 상황을 정하자, 광천고 검도부원들이 버스에서 짐을 챙겨 숙소로 향했다.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는 행동이었다.
하기야, 언더키 팀장 직급을 달고 있는 사람이 직접 와서 모든 비용이 무료라고 했는데 뭘 더 기다리겠는가?
그들은 곧장 훈련한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방을 찾아 움직였다.
“와, 나 이런 데 처음 와봐.”
“나도. 방 겁나 좋은데?”
“여기가 내 방보다 좋은 거 같다.”
2학년 트리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들의 말마따나 숙소는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깨끗했고, 방 자체도 굉장히 넓고 좋았다.
특히나 부원들이 기뻐한 건 개개인이 침대 하나씩을 쓸 수 있도록 방이 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편하게 쉬는가는 훈련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
밤이 편할수록 내일의 피로가 덜하기에.
그리고 바닥에서 자는 게 편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부드러운 침대야말로 최고의 숙면 장소였다.
‘좋은데.’
만족을 느낀 건 성현도 마찬가지였다.
합숙 훈련을 도와준다고 생색내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밀어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더키와는 ‘전’에도 꽤 좋은 파트너였듯이,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았다면 언더키 회장 천병중은 지극히 기뻐하였으리라.
얼마 되지도 않는 푼돈으로─어디까지나 회장 기준이다─현재 가장 반해 있는 검도 선수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었으니.
“자, 다들 빠르게 짐 정리하고. 체육관으로 나가자. 훈련 준비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김만석 감독의 말에 주전들이 우렁차게 수긍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경중고와의 연습 경기 때만 해도 아직 어리숙했던 김만석 감독은, 슬슬 헤매는 일이 줄어들고 있었다.
아직 완숙한 감독이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적어도 부원들을 이끄는 것만큼은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는 뜻이다.
반쯤은 주전들이 그를 잘 따르는 것을 보고 다른 부원들도 응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거야 어찌 되었든 간에.
최소한 갑작스럽게, 또 아무것도 모르고 검도부를 맡은 사람치고는 썩 훌륭하게 감독 구실을 해내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었으니까.
더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부원들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다들 모였나?”
““네!””
다만 훈련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대개 서유나 감독이 남녀 검도부를 모두 봐주는 식이었다.
검도의 ㄱ자도 모르는 김만석이 뭔가를 가르칠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가르친다고 해도 문제가 되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한들 서유나 감독도 세세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는 쪽이 아니기에 대체로 부원들은 자주적으로 훈련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
“으랴아앗-!”
“으아아압-!”
타악, 탁, 타악!
늘 하던 묵상 이후, 기초적인 훈련을 끝낸 성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도부 부원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다들 열의를 가진 채 훈련에 임하는 중이었다.
기본기를 가다듬는 이부터, 두 명이서 짝지어 연격을 연습하는 이들, 발 운용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이까지.
그들을 쭉 보고 지나간 성현의 시선이 향한 곳은 1학년들이 훈련 중인 장소였다.
보다 정확히는, 김수민에게 꽂혀 있었다.
‘슬슬 가르치기 시작하면 내년쯤에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하겠지?’
현재 성현은 전성기의 기량을 모두 되찾은 상태.
그것도 심지어 맹화로 불렸던 삼십 대와 불패로 칭송받던 칠십 대 양쪽을 모두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얼마 전에 홀로 했던 고찰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단기간의 합숙 훈련으로 끌어올려질 만큼 낮은 경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즉, 애초부터 성현이 이 합숙 훈련에 참여한 건 수련 목적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당장이야 괜찮겠지만, 나중을 대비해야 하니까.’
추계 대회 때는 아직 3학년들이 건재하다.
즉,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회장기 때와 같은 성적을 낼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다.
물론 완벽히 장담할 수는 없었다.
다른 검도부도 놀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
하지만 이전의 경험이 있다면 충분히 우승을 노릴 수 있다는 게 성현의 견해였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건 어디까지나 그 이후.
3학년들이 졸업한 후다.
‘주전이 세 명이나 바뀌는 건 영향이 커.’
일곱 명인 주전에서 절반 가까이가 바뀐다는 뜻이니 영향이 적으려야 적을 수가 없다.
이 변화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해 둘 필요가 있었고, 지금 보고 있는 김수민은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눈여겨봤던 상대였다.
전에 있었던 대련에서 김수민이 가진 재능을 간파해 냈기 때문이다.
놀라우리만치 자신과 같은 그 재능을.
“안녕.”
“-어? 아, 안녕!”
성현이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수민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현재 광천고 남자 검도부에서 성현의 위치를 바로 보여 주는 반응이었다.
일반 부원들에게는 상당히 멀게 느껴지는 게 주전 선수인데, 성현은 거기서 한술 더 떠 고교검도계의 신화가 되어 버렸으니까.
수민은 동경의 눈빛으로 성현을 바라보았다.
성현에게는 지극히 익숙한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검도계의 모든 권좌를 차지했던 ‘전’에 지겹도록 받았던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대련 한 번 할래?”
“대, 대련? 나랑?”
“응.”
“나야 좋지!”
수민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현과의 대련이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건 이미 광천고 검도부 내에서도 유명했다.
대련 자체는 물론이고, 끝나고 나서 툭툭 던져 주는 조언들은 그야말로 금과옥조 같다고 정평이 자자했으니.
차기 주전 자리를 노리는 수민에게 성현과의 대련은 절대 버릴 수 없는 기회였다.
그리하여 시작된 두 사람의 대련.
“하아아앗-!”
“···으윽!”
결과는 두말할 것도 없는 수민의 패배였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한낱 약소부의 일반 부원이었던 이와 고교 검도계에 깨지지 않을 신화를 쓴 이.
누가 승리를 거머쥘지는 뻔한 노릇 아닌가?
‘그건 알고 있지만··· 역시 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는 점이 더욱.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움츠린 채 막기만 하다가 끝나 버렸다.
그 사실이 수민은 못내 분했다.
차라리 특기라도 하나 보여 줄 수 있었다면···.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성현은 지극히 만족한 상태였다.
‘역시.’
이번 대련을 통해 확신했기 때문이다.
수민이 가지고 있는, 아직 본인은 깨닫지 못한 재능을.
‘나와 같은 눈이다.’
성현은 서른 넘어서야 그 존재를 깨달았던 ‘눈’.
상대를 살펴 행동하기 전, 이미 그 의도를 알아낼 수 있는 눈의 재능이 수민에게 있었던 거다.
단순히 눈이라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
‘전’의 성현이 처음 자신의 재능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것만으로도 한국 검도를 제패했었다.
나아가 세계 검도를 제패한 건 거기에서 더욱 실력을 쌓아 ‘맹화’라는 별명을 얻고 난 이후였지만, 여하튼.
그 말인즉, 김수민이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충분히 한국 검도계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재밌네.’
성현은 빙긋 웃었다.
아마 ‘전’에는 수민 또한 그처럼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 못했고, 이내 검도를 그만두었으리라.
그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을 터.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눈의 재능이란 건, 본인이 깨닫고 갈고닦기 전에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으니.
“전에 대련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으, 응.”
“수민이 너, 재능 있구나.”
“─어?”
순간, 수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닌 척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1학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게, 저 ‘천재’ 백성호조차 인정한 괴물이 재능이 있다고 입에 담은 것이었으니까.
“내, 내가 재능이 있어?”
“응. 아직 너는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히 재능이 있어.”
성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나랑 같은 재능이.”
“······!”
그 말에 수민이 눈을 찢어지게 부릅뜬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다른 누구도 아닌 성현과 같은 재능이라니!
성현이 연달아 대회에서 활약하는 걸 보고 동경의 마음을 품었던 그다.
그런 그에게 동경의 대상과 같은 재능이 있다고 그 대상의 입으로 말해진 것이다.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저, 정말로? 내가 너랑 같은 재능이 있어?”
“그럼. 내가 거짓말해서 뭐 해.”
물론 재능만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건 아니다.
당장 성현만 해도 그랬다.
자신의 눈이 가진 가능성을 알게 된 후, 모든 걸 불태울 각오로 검도에 임한 후에야 비로소 ‘맹화’라 불리지 않았던가.
재능은 어디까지나 시작점에 불과하다.
그게 좀 더 도착점에 가깝다 해도, 끝까지 완주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자신의 재능만을 믿고 안일하게 달리다가는 더 뒤에서 시작한 이들에 의해 추월당하는 경우도 많고.
“······!”
그렇다 한들.
김수민의 기쁨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수민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넌 노력하면 충분히 강해질 수 있어.”
“···너처럼도, 가능- 할까?”
“물론이지. 나만큼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보다 좀 더 노력해야 할 테지만-”
‘한 오십 년 정도?’
성현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조용히 내리눌렀다.
해 봐야 좋을 거 없는 말이었으니까.
“너만 좋다면, 이번 합숙 훈련 동안 내가 가르쳐 줄게. 어때?”
“다, 당연히 좋지! 잘 부탁해!”
“나도. 잘 부탁해.”
열기로 들뜬 얼굴로 대답하는 수민.
그가 이 합숙 훈련 동안 성현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침받는다는 의미를 깨닫는 건, 다소 시간이 흐른 후였다···.
< 위대한 선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