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화 : 다음 경지
중단세와 상단세를 하나로 섞는다.
다만, 그게 두 가지 겨눔세를 합쳐 새로운 겨눔세를 만들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들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겨눔세였으니.
무리해서 섞는다 한들 제대로 된 무언가가 나오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초콜릿 케이크에 탕수육을 뒤섞는다고 해서 더 맛있는 음식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중단세와 상단세를 합쳐 봐야 의미는 없다.
따라서 성현이 생각하는 ‘섞는다’는 두 겨눔세에서 장점만을 합쳐 하나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공격할 때는 상단세를 쓰듯이, 방어할 때는 중단세를 쓰듯이.’
치고 들어갈 때는 불처럼 맹렬하게.
막아 세울 때는 물처럼 고요하게.
겨눔세와는 상관없이 두 가지 면모를 완벽하게 아우를 수 있다면.
비로소 다음 경지에 올라섰다 할 수 있으리라.
“후···.”
물론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단세와 중단세는 그 기질부터가 명확하게 다른, 가볍게 섞기 힘든 겨눔세인 까닭이다.
괜히 오행(五行)에서 각각 불과 물의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첫 일격에 모든 것을 거는, 지극히 공격적인 상단세와 대처가 자유롭고 변화무쌍하여 융통성 있는 중단세는 그만큼 극과 극에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나는 특화된 부분이 다르기도 하고.’
상단세를 쓸 때는 공격 이외의 모든 걸 버렸다.
반대로, 중단세를 쓸 때는 철저히 막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공격과 방어.
완전히 대치된 부분을 특화시켰다는 거다.
그 덕에 맹화, 혹은 불패라고 불렸던 거지만.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네.’
분명 이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어려움 것은 둘째 치더라도, 일단 살면서 단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일이었으니까.
상단세를 사용할 적에는 중단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중단세로 넘어갈 무렵에는 이미 상단세가 약해진 상태였기에.
과거로 돌아와 젊고 튼튼한 육체를 얻지 못했더라면 생각도 하지 못했으리라.
‘다행히 기술적인 완성도는 거의 다 끌어올렸어.’
이는 성현의 예측보다 좀 더 빠른 결과였다.
설령 ‘전’에 한 번 갔던 길을 다시금 걷는 것이라고 해도, 최소한 일 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던 성현이다.
그러나 검도 유망주 대회, 회장기 대회라는 두 번의 대회를 거치며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그 덕에 벌써 전성기 시절과 비견될 만한 기술적 완성도를 손에 넣은 것이다.
‘전’에는 만나보지 못했던 걸출한 유망주들과의 경기가 그를 성장시켰다는 이야기다.
특히 백성호를 상대로 감각을 갈고 닦은 게 컸다.
당장 실업 검도에 내놔도 수위를 다툴 수 있는 게 백성호의 실력이었으니.
‘필요한 건 실전 경험인가.’
그것도 아주 다양한 이들과의 실전 경험.
‘마침 좋은 제안도 들어왔고-’
한국 검도 협회에서 들어온 제안을 떠올린 성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국가 교류전.
말은 친선 대결입네 어쩌네 하지만, 실상은 국가별로 자존심을 걸고 임하는 각축장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전’에 한 번 참가해본 적 있었으니까.
당시 국가 교류전은 친선 도모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서로를 못 이겨서 안달이 난 이들의 경기가 이어졌었다.
차라리 세계 선수권 대회보다 더 격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만큼.
‘지금은 다르려나?’
‘전’에 참가했던 국가 교류전은 어디까지나 십 년도 더 후의 일.
지금의 국가 교류전은 다를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맘때의 국가 교류전에는 유망주 참가 따위는 없었으니 말이다.
‘아,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 유망주라면-’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린 성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과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만났던 상대들.
지금이 그들이 딱 유망주일 시기가 아닌가.
이번 국가 교류전에 그들 또한 참가할 터.
다양한 실전 경험을 빼고서도 국가 교류전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늘어난 기분이었다.
‘적당히 밟아놓으면 쑥쑥 크겠지?’
더 높은 경지를 위한 발판은 실로 다다익선이라.
유망주 시절부터 잘 밟아놓으면 그걸 통해 무럭무럭 자라 언제고 앞을 막아 설 터.
만약 견뎌내지 못하고 중간에 꺾인다면?
어쩔 수 없다.
애초에 거기까지라는 뜻이었으니.
성현은 더는 온화했던 노인이 아니다.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적당히 조절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제물로 바쳐 불태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미안,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졌네.”
사과의 말을 건네며 나타난 건 수연이었다.
주말을 맞이하여 여느 때처럼 함께 훈련하기 위해 모인 두 사람이었는데, 수연에게 전화가 오는 바람에 성현이 혼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전화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길게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이 미안했는지, 수연은 적잖게 겸연쩍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물론 성현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들도 많았으니까.
새로운 경지로 향하는 열쇠라든지, 국가 교류전이라든지 하는 것들.
“그리고, 강찬 아저씨랑 통화한 거 아니야?”
“응, 맞아.”
“아저씨가 검도장 빌려주셨는데, 전화 한 통 정도야 뭐,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런가~”
슬쩍 성현의 안색을 살핀 수연은 곧 그가 진심으로 그리 말한다는 걸 깨닫고 작게 웃었다.
“근데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통화가 길었어?”
“이번에 검도부에서 합숙 가는 거 관련해서 이것저것 이야기 하고-”
말하다 말고 돌연 얼굴을 붉히는 수연.
통화 막바지에 강찬이 능글맞은 어조로 했던 말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언제쯤 성현이를 사위라 부를 수 있는 거냐느니, 생각해봤는데 장인어른이라는 호칭도 썩 나쁘지 않다느니 하는 농담들.
그녀가 장난치지 말라고 빽 소리를 지르니 후다닥 전화를 끊긴 했지만···.
“···왜?”
“아냐, 아무것도.”
의아한 듯 묻는 성현에게 수연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합숙 훈련 관련으로는 그렇다쳐도, 어떻게 본인에게 사위니, 장인어른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는가.
그런 쪽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을 게 분명하건만.
“그나저나, 합숙이라.”
“사실상 수학여행 대신이지만.”
“그렇지.”
성현이 볼을 긁적였다.
3박 4일로 진행되는 합숙 훈련.
‘전’의 그는 참가하지 않았던 검도부 행사였다.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검도부 합숙 훈련 기간이 수학여행 일정과 겹친 이유에서였다.
검도부 중에서는 주전을 제외하면 대부분 합숙 훈련을 포기하고 수학여행을 갔고, 그도 그중 한 명이었던 거다.
힘든 훈련이 기다리는 합숙 훈련과 반쯤 놀이 삼아 가는 수학여행.
당시만 해도 일반적인 학생이었던 성현이 후자를 택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
‘뭐, 이번에는 이야기가 좀 다르지만.’
“올해 남자 쪽은 참여자가 많다던데.”
“그래?”
“응! 작년이나 재작년은 주전 아니면 아무도 안 갔대. 많아 봐야 한두 명 정도만 가고. 근데 올해는 반이나 간다고 감독님이 놀라셨어.”
“다들 열심히 하려는 거지.”
“우승 선언 때문에?”
“그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고.”
검도라이프 매거진 2020년 8월 호에 실린 인터뷰의 파장은 굉장히 컸다.
단순히 외부에서만 떠들어댄 수준이 아니라, 광천고 남자 검도부 내부에서도 이래저래 말이 많이 나왔으니까.
그리하여 생긴 변화는 생각보다 좋은 쪽이었다.
주전들을 제외한 부원들에게도 의욕이란 게 싹을 튼 것이다.
약소부라고 어중간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제대로 해보고자 하는, 그런 이들의 숫자가 팍 늘어났다는 뜻이다.
‘특히 1학년들의 의욕이 대단하지.’
1학년의 몸으로 주전 자리를 차지한 데다가, 이내 주장의 위치까지 올라선 성현이 있는 상황.
다른 1학년 부원들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 열린 가능성이 보이고 있으니.
설령 거기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주전 한 자리는 자신이 차지하겠다며 1학년 부원들은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합숙 훈련에 1학년들만 80퍼센트 가까이 참가 의사를 보였을 정도니 말 다 했다.
“다른 이유가 뭐야?”
“이제 곧 3학년 선배님들이 졸업하셔서 떠나시잖아. 그 자리를 노리는 거지.”
“아하-”
게다가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다.
조만간 3학년 세 명은 대학 입시 준비로 인해 검도부 활동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그 말인즉, 주전 세 자리가 난다는 것!
실력만 있다면 기회는 확실하다는 뜻이니 자연스레 1학년들이 불타오를 수밖에.
“혹시, 누구 미리 생각한 애들 있어?”
광천고 남자 검도부는 주장이 사실상 감독의 역할까지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 주전을 뽑는 것 또한 주장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약소부가 그러하듯이.
물론 성현이 누구를 택했을 때, 다른 주전들이 전부 반대하면 뽑히지 않겠지만··· 대체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아무리 이해가 안 되더라도 성현이라면 분명 뭔가 자신들은 모르는 무언가를 봤을 거라며 찬성할 게 분명한데.
현재 광천고 남자 검도부에서 성현이 세운 입지는 그토록 견고했다.
“몇 명 정도? 그중 한 명은 잘 따라오기만 하면 무조건이고.”
“무조건이라니.”
수연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달라진 성현의 기준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입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상대를 보는 눈을 보면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준을 넘지 않는 이를 볼 때, 성현의 시선은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싸늘하게 식어 있었으니 말이다.
한데 ‘무조건’ 데려간다고 할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그의 기준을 만족시켰기에.
“1학년 중에 그런 애가 있었단 말이야?”
“응. 있어.”
성현이 ‘그 녀석’을 발견한 건 2학년 트리오와 첫 지도대련을 했을 때였다.
그때 적당히 가르쳐준 그는 이어서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1학년들까지 끼워서 함께 훈련을 했었고, 그 와중에 ‘그 녀석’을 보았다.
아직 자기 재능을 깨닫지 못하고 제자리걸음 중이었으나, 알려주기만 한다면 쑥쑥 자랄 수 있을 게 분명한 1학년생을.
‘여러모로 나랑 비슷한 녀석이니까.’
성현의 예측대로라면, 아마 1학년의 그 녀석은 정철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메꿔주리라.
그럴 만한 ‘재능’이니까.
“슬슬 훈련 시작할까?”
“아, 응! 그래!”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연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섰다.
두 사람이 이곳에 모인 것은 훈련을 하기 위함이니 이제 슬슬 본분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후우-”
수연의 얼굴에 금방 진지한 표정이 들어섰다.
지난 회장기 대회 이후, 그녀는 정말 죽을힘을 다해 실력을 늘리고 있었다.
우승 사진을 성현과 함께 찍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기 때문이다.
검도 유망주 대회, 그리고 회장기 대회에서까지 함께 우승 투샷을 찍는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승 커플’의 탄생이었을 텐데!
‘하윤 선배를 이길 수 있어야 해.’
한때는 너무나 동경했던 선배지만.
이제는 넘어서야 하는 적일 뿐.
수연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올랐다.
햄스터가 탐나는 해바라기 씨를 발견했을 때처럼.
“······.”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수연이 왜 이토록 의욕을 불태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열심히 해서 나쁠 건 없다.
성현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 합숙 훈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