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화 : 포고문
검도라이프 매거진.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검도 관련 최대 규모 커뮤니티인 검도라이프에서 발간하는 잡지다.
창간일은 검도라이프가 오픈한 날짜에서 딱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이는 애초에 언더키가 잡지까지 출판할 생각으로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검도에 대한 언더키의 광적인 사랑을 또 한 번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디지털 잡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달 실물 잡지까지 꼬박꼬박 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검도 관련 커뮤니티는 물론이요, 발간하는 잡지까지 싹 다 전멸해버렸던 시기에 처음으로 발행한 잡지가 현재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사실 또한.
하지만 처음 의도야 어찌 되었든 간에, 십수 년간 꾸준히 발행해왔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온 역사는 힘이 된다.
검도라이프 매거진이란 잡지는 검도계에 발을 담근 인사라면 대부분 읽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다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인터뷰라 해도 별거 없으니까. 친구들끼리 잡담하듯이 이야기하면 돼요. 아셨죠?”
““네, 알겠습니다!””
긴장하지 말라는 게 무리였다는 거다.
특히나 이런 인터뷰 자리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던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전들에게는.
그나마 강호인 여자 검도부는 인터뷰가 익숙한 까닭에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남자 검도부의 주전들은 그야말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2학년 트리오는 허리를 쭉 펴고 두 주먹을 무릎 위에 올린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을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다.
정철을 제외한 3학년들도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고···.
‘여자 쪽은 괜찮고. 남자 쪽은- 그나마 긴장 안 한 게 정철 선수랑··· 이성현 선수인가.’
검도라이프 매거진의 기자, 권도연은 싱글싱글 웃는 표정으로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기자 생활만 벌써 십년 째하고 있는 그녀다.
온갖 인간군상들과 인터뷰를 해왔고, 학생선수도 많이 만나본 그녀는 본능적으로 누가 더 잘 대답할지를 간파할 능력이 있었다.
여자 쪽에서는 대체로 다 괜찮았고, 굳이 한 사람을 고르자면 임하윤 정도.
반면, 남자 쪽에서는 정철과 이성현을 제외하면 썩 좋은 대답을 돌려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좀 떠들다 보면 풀리겠지.’
머릿속에서 빠르게 이루어진 계산과는 달리,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권도연이 입을 열었다.
“자, 우선 가장 당연한 것부터 물어볼까요. 각팀 주장 분들. 단체전 우승 소감 한 말씀씩 부탁 드리겠습니다. 우선, 여자 검도부부터.”
“네. 회장기 검도 대회라는 규모가 크고 인지도가 높은 대회에서 우승을─”
청산유수로 대답을 늘어놓는 임하윤.
중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활약하며 여러 번 인터뷰를 해왔던 이다운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녀는 제대로 된 광고까지 찍었었으니, 인제 와서 겨우 인터뷰에 긴장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네, 임하윤 선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남자 검도부 주장인 정철 선수?”
“아,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장은 제가 아닙니다.”
정철의 말에 권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광천고 남자 검도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주장인 정철이다.
우승 한 번 못 해본 정철에게 무관의 제왕이니, 소년가장이니 하는 별명이 붙은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 알 수 있을 터.
그런 그가 이제 광천고의 주장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누가 주장이란 말인가?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최영준 선수인데.’
광천고 2학년이자 중견을 맡아 활약했던 최영준.
이전부터 정철이 주장을 맡길 것이라 추측되던 인물이니만큼, 권도연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작 그녀의 시선을 받은 영준은 자신은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따름이었지만.
“여기 있는 1학년 후배, 이성현이 앞으로 광천고의 주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턱, 하고.
성현의 어깨에 손을 올린 정철이 말했다.
전혀 예상 외의 인물이었기에, 권도연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그녀가 당황하면 자주 나오는 버릇이었다.
“어- 1학년인 이성현 선수가 광천고의 주장이다···. 이 말씀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부원들도 모두 동의했죠.”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아주 사소한 잡음 하나가 있기는 했지만, 그거야 뭐, 누가 말하지 않는 한에는 알려지지 않을 일이니.
슬쩍 부원들의 얼굴을 살핀 영준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긴장한 얼굴을 보니 그가 홀로 반대하며 나섰다가 된통 깨졌던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흑역사라고.’
안도한 영준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곁눈질이 지나간 뒤, 조용히 끌어올려진 대현과 윤호의 입꼬리를···.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장을 맡게 된 이성현입니다. 권도연 기자님.”
차분한 성현의 말에 권도연이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이번 대회에서 신화를 쓴 성현에게 묻고 싶던 게 많았던 그녀다.
대회 전승, 심지어 개인전에서는 전 경기 2회 격자 승리라는 무시무시한 업적까지 세운 그였기에.
단체 인터뷰가 끝나면 개인 인터뷰까지 실으려 했었는데, 이처럼 1학년의 몸으로 광천고 주장까지 맡았다니.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사 소재 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 우승은 광천고 남자 검도부원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훈련한 끝에 일궈낸 성과이며, 그동안의 훈련이 전혀 헛되지 않았다는-”
하윤 이상으로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성현.
정신적으로 굉장히 성숙한 데다가, 이러한 인터뷰 경험이 잦은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에는 몇십 번도 넘게 인터뷰했었으니까.
검도라이프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한 것도 기억하는 것만 다섯 번은 넘었다.
주목받기 시작한 게 서른이 넘어서였음에도.
그만큼 상상도 못 할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리라.
‘인터뷰 체질인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권도연이나, 다른 주전들에게는 체질적으로 긴장을 안 한다 생각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성현은 첫 인터뷰 때도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무덤덤했었다.
정확히는, 무덤덤한 걸 넘어서 아예 완전히 메말라 있었지만-
각설하고.
인터뷰는 권도연의 능력을 증명하듯 시종일관 유쾌하고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져 있던 2학년 트리오들도 나중 가서는 특유의 성격을 드러내며 인터뷰에 임할 정도였다.
“······그래서 제가 말했죠. 원래 잘하면 형이라고. 이제부터 형은 성현이다. 그러니 우리가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건 안 부끄럽다.”
“지, 진짜요?”
“네, 맞지? 너희도 기억나지?”
“당연하지. 그때 성현이 찾아가서 형이라 부르려 했었잖아.”
대현과 윤호의 너스레에 권도연은 물론, 여자 검도부까지도 키득거리며 웃었다.
2학년 트리오가 근래 성현에게 배우고 있다는 건 직접 봐서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뒷이야기가 있다는 건 몰랐던 까닭이다.
그걸 또 재현한답시고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도 재밌었고.
“그럼 이성현 선수가 그렇게 도와준 덕에 지금 같은 성장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죠. 아주 눈높이 교육이었습니다.”
“2학년 선배분들은 이러시다는데···.”
“아뇨. 다 선배님들의 재능이었습니다. 전 그걸 살짝 일깨운 것뿐이죠.”
성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들 아셨을 겁니다. 내가 이런 걸 잘하는구나, 하고.”
“1학년 때도 못한 걸 언제쯤 할 수 있겠냐.”
“솔직히 안 알려줬으면 몰랐지. 인정?”
“음- 인정.”
물론 2학년 트리오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현 또한 말은 저리했지만, 실제로는 2학년 트리오가 말한 대로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에도 그랬으니까.
‘전’의 그들은 자신들이 뭘 잘하는지 구체적으로 깨닫지 못했고, 결국 그 상태로 반등 없이 광천고를 졸업했었다.
회장기 우승 같은 성과가 안 나온 광천고 남자 검도부는 좀 더 버티다가 결국 폐부해버렸고.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자,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회장기 대회에서 우승하셨는데,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요? 여자 검도부부터 말씀해주시죠.”
“앞으로 있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거죠. 특히, 넉 달도 안 남은 추계 대회에서.”
추계 대회가 열리는 건 대개 11월 초.
지금이 7월 중순이니, 이제 남은 시간은 겨우 석 달 남짓하다.
그전까지 있는 학생선수 대회는 대개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가 참가해야 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따라서, 사실상 앞으로 가장 중요한 건 추계 전국 중·고등학교 검도 대회라고 할 수 있었다.
임하윤이 콕 집어 추계 대회를 언급한 건 그래서였다.
“남자 검도부는 어떤가요.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 한 말씀 하자면?”
“우승입니다.”
단호한 어조.
그리고 그보다 더 단호한 내용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권도연이 물었다.
“우승···이요?”
권도연과 검도부원들은 알지 못했다.
‘전’의 성현이 인터뷰어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그가 왜 그리도 사랑을 받았는지 또한.
“네. 우승할 겁니다. 다음 대회에서도.”
성현은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의 포부를 세상에 드러내보였다.
자신의 본질이자 상징인 불꽃과도 같이.
불꽃은 절대 숨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자신을 드러내며 타오를 뿐.
성현이 하는 인터뷰도 이와 같았다.
“추계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대회에서든, 광천고가 우승할 겁니다.”
지독하리만치 담담한 대답.
성현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리 믿고 있었다.
되려 듣고 있던 권도연이 당황할 지경이었다.
이대로 내용을 실으면 어찌 될지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관심이야 받겠지만···.
‘그 이상으로 적대를 받을 텐데.’
백성호 이후 오랜만에 나온 스타성 있는 신예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장담하건대, 백성호 이상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인물이 사람들의 적대심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권도연은 검도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검도라이프 매거진의 기자가 된 인물이었으니까.
걱정이 된 그녀가 재차 물었다.
“그, 어- 이성현 선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대로 내용에 실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부드럽게 호선을 그려내는 성현의 입.
하나 정작 거기서 튀어나오는 말은 그 어떤 검보다 예리하였으니.
“저희는 계속해서 우승할 거고, 이제 사람들은 알게 될 테니까요. 이제 고교 검도계의 정점은 경중고가 아니라 광천고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웃는 성현의 뒤로,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전들의 사나운 미소가 겹쳤다.
주장의 우승 선언에 대한 부담감 따위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 대화가 그대로 잡지에 실려, 수많은 사람이 읽고, 모든 고등학교에 공공의 적 취급을 받더라도 상관없다는 듯한 눈빛.
광천고가 강해진,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
그제야, 권도연은 깨달았다.
이건 새롭게 왕이 된 이의 포고문이었다.
경중고라는 옛 왕을, 전설과 신화로 화려하게 치장된 반란을 통해 끌어내린 왕의 선언.
광천고가 모든 고등학교에 하는 선전 포고!
“그러니 상관없습니다.”
어디 한 번 와봐라.
“우리는 늘 마지막, 결승전에 서서 오는 이들을 맞이하겠습니다.”
광천고는 항상 같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리고 그들을 꺾어 광천고가 우승자임을 몇 번이고 다시금 증명하겠습니다.”
거기서 이기면 새로운 왕이 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감히 장담하건대.
“그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왕은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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