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화 : 신화의 완성
“두 판째!”
다시금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주심의 목소리.
경기가 시작했음을 알리는 그 외침에도 백성호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막막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높디높은 벽을 마주한 듯한 아득한 기분.
평소의 그였다면 벽을 마주했을 때, 재빨리 그것을 넘어설 방법을 찾았겠지만···.
‘···전부 안 통했잖아.’
심지어 전부 똑같은 방식으로 막혔다.
자신의 수가 먹혔다고 생각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하여 좌절시킨 것이다.
무려 세 번을 그렇게 막혀버린 상황.
백성호가 뭘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건 무리도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중단세였을 때도, 상단세였을 때도 마찬가지.
상대는 마치 그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듯했다.
‘진짜 천재라는 건, 이런 건가.’
백성호는 평소 재능만큼은 누구에게 비교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괜히 ‘천재’라는 별명을 가진 게 아니니까.
세월로 쌓아 올리는 과정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그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일본에서 초청해온 검도 7단 선생을 만나고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오직 시간일 뿐.
세월이 흐른다면, 배움을 청했던 선생조차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이 그에게는 존재했다는 뜻이다.
반드시 정점에 설 수 있으리라는 확신 또한.
하지만.
그것도 전부 성현을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
가슴 속에 가득했던 자신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한없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이제 더는 당연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도저히 오를 수 없어 보이는 벽.
그 앞에서 지독히도 초라해진 자신을 발견했기에.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건만···.
백성호는 몰랐다.
알지 못했다.
지금 그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은, 수많은 사람이 그를 보며 느낀 그것과 같다는 사실을.
본래 천재라는 족속들은 자기 발밑을 제대로 내려다 볼 줄 모르는 법이기에.
‘─아니. 여기서부터 시작이야.’
“후우우-···.”
길게 숨을 토해내는 백성호.
한순간 총기를 잃고 흐려진 듯 보이던 그의 눈에 찬란한 빛이 되돌아왔다.
분명히 말해서, 재능은 마음의 강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숱한 영재나 수재들이 풍파 앞에 깎여나가 굴하게 될 리가 없으니까.
하나, 천재라고 불리는 이라면.
고난 앞에서 꺾이는 일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렇기에 ‘하늘이 내렸다’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못 이겨. 그러니-’
최선을 다해 패배하리라.
상대에게서 훔쳐낼 만한 것은 전부 훔치고,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반격을 위한 기나긴 여정.
그것을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마침 상대도 여기까지 올라와 보란 듯이 ‘길’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가준다.
끝까지, 악착같이 버티고 올라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이기는 건, 나다.’
백성호의 표정에 굳은 결의가 서렸다.
꺼질 듯 흔들리던 기백은 재차 그 세를 키웠다.
그에 어렴풋하게 실망으로 물들었던 성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꺾였다 생각했는데···. 이른 판단이었나.’
살며시 성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동생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어찌 이리 그를 만족스럽게 한단 말인가?
사그라들 줄 모르는 저 투지야말로 저 형제의 진정한 재능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나, 개인적인 호감과 승부는 별개인 법.
“······.”
성현은 서서히 백성호를 압박해 들어갔다.
칼끝으로 하는 공세가 주류인 중단세와는 달리, 상단세의 공세는 굉장히 독특하다.
애초에 상대와 검을 맞대고 있지 않으니 자연스레 다른 방식으로 상대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흔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온 방법이 바로 이것.
손잡이 끝, ‘병두’로 하는 공세다.
“-읏.”
무예를 배운 이들이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건, 그 전에 있는 전조들을 보고 이후의 행동을 간파하는 식이다.
이를테면, 어깨가 열리는 것을 보고 주먹이 날아올 것을 간파한다는 거다.
병두로 하는 공세는 바로 그러한 예측을 역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상단세가 공격하는 것을 간파하기 가장 쉬운 징조는 병두의 움직임인 만큼, 상단세를 상대하는 이는 대개 그 부분에 집중하기 마련.
그런즉, 이렇듯 가볍게 속임수를 섞어주면-
‘지금, 아니. 아니야. 흔들리면 안 돼···!’
아주 미미한 움직임으로도 상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상단세는 장점만큼이나 단점이 큰 겨눔세다.
애초에 방어를 도외시한다는 것에서부터 얼마나 큰 것을 포기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니까.
하지만 진정한 상단세는 단점조차 이용하는 법.
십수 년간 상단세를 사용하며 검도계를 제패했던 성현은 약점을 노려오는 상대를 잡아낼 방법을 수십 개는 넘게 갖고 있었다.
상대하는 쪽, 백성호가 입술이 바짝 마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혼란스럽겠지.’
게다가, 상단세라고 해서 단점과 약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상단세는 특유의 공격력 말고도 장점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굉장히 낯설다는 거다.
학생 검도를 포함한 현 검도계에서 상단세를 사용하는 이는 지극히 드물다.
제대로 된 상단세는 더더욱.
그건 다시 말해, 상단세와 겨뤄볼 기회가 적다는 뜻이다.
아예 한 번도 상단세와 겨뤄본 적 없는 이들마저 수두룩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중단세와 상단세는 많은 것이 다르다.
거리 재는 법부터, 막아 세우는 법까지 전부.
이러한 낯섦은 상대를 교란해, 때로는 자멸에까지 이르게 만들기까지 한다.
‘이게 진정한 상단세-’
백성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천재라 해도 모르는 것을 완벽히 대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물론 어느 정도 가늠은 할 수 있다.
상단세가 공격한다 해서 죽도가 막 늘어나고 그러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성현이 겨우 ‘어느 정도’로 대처할 만한 상대는 아니지 않은가?
번뜩.
돌연 성현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어렸다.
실낱같은 틈을 발견한 까닭이다.
중단세였다면 찌를 수 없었던, 오직 상단세이기에 치는 게 가능한 빈틈!
상단세라는 낯선 겨눔세, 본인이 깨닫지 못한 압박감, 병두를 통한 공세에 갉아 먹힌 정신 등등.
다양한 요소가 ‘천재’ 백성호에게 금을 낸 거다.
이를 그가 놓칠 리가 없었다.
왼발이 바닥에 스치듯이 나아가고.
동시에, 왼손 또한 번개같이 뻗어지니.
“하아아앗-!”
성현이 내지른 격자.
그건 움직인다 생각했을 때, 이미 죽도가 코앞에 도달했다고 느껴질 만큼 빨랐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육 한 올조차 일말의 낭비 없이 기술을 위해 움직이니.
감히 신속(神速)이라 칭할 만한 속도가 나오는 것이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벼락처럼, 죽도가 내리쳐졌다.
‘이건.’
그리하여.
백성호는 깨달았다.
‘너무 빨라.’
기회를 넘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성현의 격자는 그만큼 빠르고 강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예측해서 대비하거나, 혹은 공격을 먼저 내지르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바로 전판, 찌름을 시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기회를 내주면 절대 이길 수 없다.
절대.
타아악-!
성현의 죽도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백성호의 머리를 두들겼다.
백성호가 방어를 위해 들던 손이 무색하게도.
속도란, 때로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무기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청색, 머리! 시합-! 끝─!”
주심이 이제까지 했던 그 어떤 선언보다도 크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며 결승 심판을 보았던 그조차도 이번 성현의 승리가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알고 있던 까닭이다.
전설, 아니 신화의 완성.
회장기라는 메이저 대회에서 전 경기 2회 격자로 승리하여 우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이, 비로소 역사에 남게 되었으니까.
““와아아아아-!””
짝짝짝짝!
끓어오르는 듯한 환호성.
그리고 그보다 큰 박수 세례.
관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한마음 한뜻으로 신화의 탄생을 축하했다.
만약, 단순한 우승이었다면 이처럼 격한 반응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어디 지금 이게 그냥 우승이던가?
64강에서부터 쭉 이어진 대기록의 방점!
한없이 허황하게만 보였던 신화가 현실에서 이룩되었음을 알리는 상징 같은 우승이지 않은가.
자연히, 사람들의 반응이 거셀 수밖에.
“와, 미친! 이게 말이 되냐.”
“전 경기 2회 격자 승리로 우승이라니.”
“설마설마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저마다의 감상을 열띤 얼굴로 토해내는 관객들.
검도에 대해 잘 아는 이일수록 흥분은 더했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기록이 완성되었는지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검도 역사상 처음.
어쩌면, 세계 검도 역사상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신화적인 기록이라는 뜻이다!
“······.”
“······.”
마지막으로, 성현은 차분하게 백성호를 마주했다.
단체전에 이어 개인전에서까지.
우승을 한 발 앞둔 채로 결승에서 꺾인 백성호의 얼굴은, 놀라우리만치 담담한 상태였다.
그러나 성현에게는 똑독히 느껴졌다.
정확히 그를 노리고 흘러넘치는 투지가.
이번 패배가 분하고 또 분해서, 못내 흘러넘치는 그 격한 감정이.
‘기대되는구나.’
과연 저 천재가 다음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분명, 오늘 이상으로 강해져서 돌아오리라.
······성현은, 다만 바랐다.
부디 지금처럼만 무럭무럭 자라주기를.
오늘 그가 보여준 모든 것을 모조리 흡수하여, 더욱 강해졌으면 하고.
그래야만.
‘내 성장을 위한 양분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성현이 소망하는 것은 오직 하나.
더 높은 경지의 추구일지니─
“인사!”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성현과 백성호.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인사했다.
각자가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얼굴에는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로.
성장시켜 잡아먹으려는 자.
그것을 알면서도 이용하려는 자.
둘 사이의 이해 못 할 신경전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기에.
“······.”
그렇게 모든 경기가 마무리되고.
몸을 돌린 성현은 기대감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광천고 주전들을 보았다.
분명 계기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쪽을 향해 뛰쳐나올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하하.”
성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토해냈다.
저들이 바라는 것이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호면 아래에서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그는, 곧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내가 우승했노라고 선언하듯이.
“이야아아-!”
“개인전까지 우승! 이게 광천고라고!”
“성현이 너, 개쩔잖아!”
그것만 기다렸다는 듯이 광천고 주전들이 몰려와서 성현을 둘러싼 채 환호했다.
단체전 우승 이상으로 기뻐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약소부로 취급받던 광천고의 유쾌한 반란의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 성현의 개인전 우승이었으니까.
회장기라는 대회의 단체전과 개인전을 동시에 제패한 그들에게 이제 감히 누가 약소부라 말할 수 있겠는가!
‘남고부 단체전, 여고부 단체전, 그리고 남자 개인전까지.’
벌써 광천고는 회장기의 세 부문을 정복했다.
심지어, 그중 개인전에서는 신화라고 부를 만한 기록을 쓰기까지 했다.
그랬기에 오직 눈치 빠른 몇몇만 깨닫고 있었다.
아직 광천고가 남기고 있는 기록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여기에 여자 개인전마저 정복해낸다면···.’
광천고가 이번 회장기 검도 대회의 유일무이한 승자로 남을 수 있으리라.
감히 두 번째를 허용하지 않는 폭군으로서.
< 그녀들의 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