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55화 (55/150)

55 화 : 마지막 한 걸음

“젠장···.”

굳어진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건, 다름 아닌 정철이었다.

어찌나 꽉 움켜쥐었는지 새하얗게 질린 주먹이 그가 얼마나 마음이 거칠어져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자기 자신.

평소 잘 하지도 않던 욕지거리를 토해낼 만큼, 정철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

“······.”

현성과 경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정철의 등을 두드려줄 뿐이었다.

모두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정철이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았고, 그건 당연히 이럴 만했으니까.

회장기 검도 대회 개인전 4강.

정철은 백성호와 맞붙어 또 패배하고 말았다.

심지어 한 점도 따내지 못하고 2대0으로 완패!

목표로 삼았던 백성호에게 이렇듯 아무것도 못 하고 처참히 깨졌으니, 거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해도 한 점은 따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바보 같은 착각이었지만.

백성호는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어느새인가 더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필사적으로 쫓아온 걸 비웃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는 백성호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그것이 못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테니까.

최소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패배한 지금보다는.

[남자부 개인전 결승이 곧 시작됩니다!]

“이제 곧 결승이야. 응원해주러 가야지. 안 그래?”

“─후우. 그래. 당연하지.”

현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패배에 낙담하고 있는 건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후배가 결승전을 치르는 걸 지켜보고 응원해줄 시간이었다.

그것이 단체전을 견인하며 우승까지 이끌었으며, 개인전에서조차 광천고의 이름을 드높이려 하는 후배를 위한 선배의 예의였기에.

세 사람은 경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단체전이랑 개인전은 다르다는-”

“결승전에서 두 번 연속으로 만난-”

“과연 이성현이 세우고 있는 기록이 백성호를 상대로도-”

결승전을 앞두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관객들.

그 너머로 경기장에서 차분하게 결승을 준비하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하늘이 내린 천재, 백성호.

그조차 잡아 먹어버린 괴물, 이성현.

두 사람의 경기가 고교 검도계에 갖는 무게를 알리기라도 하듯, 청송 국민체육센터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단체전 결승에서 한 번 승부가 갈렸다지만, 그건 의미가 없었다..

관객들의 눈에는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대결은 대등하게 보였으니까.

실제로 어떤지는 둘째치고,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으니, 이번 대결도 누가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해 치열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했다.

“성현이가 이기겠지?”

“당연하지. 단체전에서 이미 이겼었잖아.”

“······.”

친구들의 염려 섞인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정철은 가만히 결승을 치를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양한 감정이 섞인 시선이었다.

하나 곧 그는 탁한 한숨을 내쉬곤, 온 힘을 다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성현 파이팅-!”

*

“시작!”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주심의 목소리.

동시에, 눈앞의 상대가 뿜어내던 기백이 변했다.

마치 땔감이 들어간 불꽃이 세를 크게 기우듯이 성현의 기세 또한 활활 타오른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맹화(猛火), 그 자체.

이미 영상을 통해, 또 실제로 몇 번이나 보았던 모습임에도, 무심코 압도당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박력이 느껴졌다.

천재라 불리는 백성호조차 쓴웃음 지을 만큼 사납고 흉포한 위엄!

차라리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마음을 먹으면 저토록 불처럼 타오를 수 있단 말인가?

‘······미쳤네.’

이미 성현의 상단세를 알고 있던 백성호다.

그가 처음으로 성현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동생인 백지호가 검도 유망주 대회에서 성현의 상단세에 패배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번 개인전에서 성현이 결승전까지 올라오며 보여준 것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기까지 했고.

그러나, 단순히 보고 듣는 것과 직접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에 있는 법.

비로소 상대하게 된 성현의 상단세는 그의 얼굴에 있던 일말의 기대감조차 싹 거둬갈 만큼 지독히도 무시무시했다.

‘중단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백성호가 성현의 중단세를 상대하며 떠올린 이미지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수십 년을 들여 두들긴 끝에 완성된 명검(名劍).

그렇기에 어지간한 사람들은 감히 손댈 수 없을 만큼 날카롭고 아름다운···.

하지만 지금 상대의 저 모습 어디에도 그가 느꼈던 검의 잔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저것은 그저 불꽃이었다.

자신조차 장작 삼아 타오르는 화염.

본인을 넘어, 주위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워 재로 만들어버리는, 미치광이의 불길이다···.

‘함부로 들어가면 진다.’

이미 중단세의 일합 싸움에서 보여주지 않았나.

이상적으로까지 느껴지던 수준 높은 격자를.

상단세에서 내지를 격자는 그보다 아득하게 높은 위력을 지녔으리라는 건 뻔할 노릇이었다.

그런즉, 어설프게 시도하는 격자는 의미가 없다.

오직 모든 것을 내거는 일격만이 그나마 실낱같은 가능성이나마 쥘 길이었다.

‘저쪽에서 들어오기 전에, 내가 쳐야돼.’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승리를 위해 이토록 많은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던 게 대체 얼마만인가?

언제나 위에 선 채 상대를 맞이했던 백성호다.

지금처럼 도전자의 위치에서 경기를 하는 게 까마득할 정도로 옛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일까.

‘즐거워.’

더욱 이 경기가 즐거운 까닭은.

백성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넘어설 상대가 있다는 건, 크나 큰 축복이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기에.

“후우우-”

일반적으로 상단세에 가장 효과적인 격자는 찌름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상단세는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는 만큼, 손목과 머리를 치는 것은 힘들다.

그렇다고 허리를 치는 것은 먼저 들어가서 쳐야 하므로 상단세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으니.

소거법으로 자연스레 남는 것이 찌름!

게다가 제대로 찌를 경우, 상대는 그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팔을 내리게 된다.

자세가 흐트러진다는 이야기고, 설령 격자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 하나만으로도 찌름은 상단세에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목을 찌른다.’

백성호의 눈동자가 옅게 빛났다.

필요한 것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마음가짐.

온 정신이 하나로 모이고, 주위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심판도, 동생도, 친구도, 관객도, 전부 지웠다.

남기는 것은 오직 하나.

상대, 이성현뿐.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집중력이 발휘되며, 그의 정신은 더 높은 경지로 향했다.

“──”

“──”

소름이 끼칠 것 같은 침묵.

경기장에서 두 사람이 만들어낸 적막은 곧 관객석으로까지 번져나갔다.

단체전 결승 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감히 입을 열어 말할 수 없는 무거운 위압감이 이곳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숨막히는 긴장감에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단지 대치하고 있을 뿐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것이 검도.

이것이야말로, 검도···!

‘보였다!’

““하-””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시작되는 기부림.

백성호와 성현이 움직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발을 떼고, 상대를 향해 나아가는 그 순간이 완벽하게 같았다는 뜻이다!

““-아아앗!””

찰나에 승패가 갈리는 승부.

먼저 공격권을 가져간 것은, 바로 백성호였다.

내지른 죽도가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깨끗한 한 줄기 궤적을 그려낸다.

그 안에는 긴장도, 두려움도, 열망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려내는 것은, 승리로 향하는 길이니.

단체전 결승을 겪기 전의 그였다면 이러한 찌름은 불가능했으리라.

그곳에서 패배함으로써, 그는 한 걸음 나아갔다.

더 높은 경지로, 더 오롯한 검도로-

‘이번에야말로, 내가 이긴다-!’

백성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직, 상대의 팔은 펼쳐지지 않았다.

내지른 찌름이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기 때문이리라.

반면 그의 죽도는 이미 상대의 목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는 도중이다.

백성호는 이번에야말로 승리를 직감했다.

‘아니, 잠깐. 이거. 분명 결승에서···.’

문득, 백성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이 ‘느낌’이 바로 이틀 전에 있었던 단체전 결승에서 느껴봤던 것이라는 사실.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길’을 찾아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제대로 먹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그 순간에─

‘─반격을 당했지.’

타악-!

거침없이 나아가던 죽도의 끝이, 상대가 내린 죽도의 손잡이에 막혔다.

그것도 정확하게 병두─손잡이의 끝부분─에.

노리고 있지 않고서는 이토록 완벽하게 막아낼 수 없다.

처음부터, 상대는 찌름을 예측한 것이다!

백성호가 눈을 부릅 떴다.

‘상단세는 찌름에 약하다.’

반면, 성현의 눈동자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상단세는 찌름에 약하다.

그건 상단을 사용하는 그조차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뻔하디 뻔한 약점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잖아.’

약점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

목을 노릴 수조차 없이 빠르게 치거나, 혹은 그조차 함정으로 써서 상대를 끌어들이거나.

이번에 성현이 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백성호라면 분명히 제대로 된 찌름으로 목을 노려올 것을 알았기에.

그가 했던 예상대로.

백성호는 목을 노리고 찔러 들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끝이다.

상대의 노림수를 아는 이가 패배할 이유가 없으니.

물론, 백성호의 찌름은 다소 예상 이상으로 훌륭하기는 했지만, 그뿐이다.

아직 그를 넘어서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하아앗-!”

손잡이 끝, 병두로 백성호의 죽도를 거둬낸 성현은 가차 없이 죽도를 휘둘렀다.

찌름에 건곤일척으로 모든 것을 걸었다는 건, 다시 말하면 그게 실패하면 뒤가 아예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성호는 벼락처럼 내리쳐오는 성현의 죽도를 막아내지 못했다···.

타아악-!

“청색, 머리!”

우렁찬 깃발과 함께 들어올려진 청색 깃발.

결승전 첫 득점의 주인공은 이성현.

휘두른 격자 횟수는, 단 한 번!

관객들은 환호성을 내지르지 못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얼토당토않은, 허황된, 허무맹랑한-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이해되지 않는 기록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규모가 작은 대회도 아니고, 학생 선수 대회 중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회장기 검도 대회에서 벌어진 일이니.

“······설마, 진짜로?”

“그런 터무니 없는 기록이 가능할 리가···!”

“단체전에서 전설을 쓰더니, 이제 개인전에서는 신화를 쓰다니. 허어-”

앞으로 단 한 번.

딱 한 번만 더 성공시킨다면.

개인전 모든 경기에서 2회의 격자로 승리하는 진기록이 세워지게 된다.

심지어 그것도 결승전에서 천재 백성호를 상대로 하였음에도!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던가.

실로 신화라 부르기에 부족함 없는 결과였다.

“······.”

넋을 놓은 것처럼 조용해진 관객석.

하지만 아니었다.

관객들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으니까.

그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만 봐도 분명했다.

그들이 입을 다문 것은, 단지 이 기록의 완성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교 검도계에 전무후무했던.

압도적인 금자탑의 완성을 막고 싶지 않았으니.

이윽고,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 신화의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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