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길
회장기 검도 대회의 고등부 경기 일정은 삼 일에 걸쳐 진행된다.
첫째 날인 금요일에는 남고부 단체전, 둘째 날 토요일에는 여고부 단체전, 그리고 셋째 날인 일요일에는 고등부 개인전을 치르는 식으로.
그러고도 고등부가 끝났을 뿐, 아직 중등부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참작해 본다면, 대회 자체가 얼마나 큰지 쉬이 알 수 있으리라.
하기야, 32강- 그러니까 32개 팀으로 시작하는 단체전 대회가 어디 흔하겠는가?
검도부가 있는 고등학교의 숫자는 전국을 모두 합쳐도 겨우 오십여 곳이며, 그중 대회에 나서 활약할 만한 곳은 사십 개 남짓에 불과했다.
32강부터 시작이라는 건, 그러한 팀 중 불가피하게 참가를 못 하는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괜히 회장기 대회가 학생 대회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춘계, 추계 대회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하다 꼽히는 게 아니다.
각설하고.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회장기 검도 대회가 하루 만에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삼 일에 걸쳐 대회가 진행되는 만큼, 대회 참가팀은 머무를 숙소를 잡아야만 했다.
금요일에 서울에서 청송으로 내려와 단체전에 참가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쉬다가, 일요일이 되어 다시 청송까지 내려와 개인전에 참가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서라도 숙소는 필수적인 상황.
당연하게도, 언더키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성현을 비롯한 광천고 주전들이 ‘바른 소나무 호텔’에 머무르게 된 건 바로 그래서였다.
“아직도 안 믿어져.”
푹신한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 멍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건 대현이었다.
“우리가 우승이라니. 이거 실화냐?”
“또 그 얘기냐. 그거 딱 한 번만 더 말하면 서른 번째인 건 알아?”
“아니, 근데 진짜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해.”
타박을 들은 대현이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진심 어린 표정이었기에, 영준도 더는 할 말이 없어 입맛만 쩝, 하고 다실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약소부로 무시당했던 그들이 고교 검도계의 패자 경중고를 꺾고 회장기 검도 대회의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은 쉽게 믿기 힘든 일임은 분명했으니까.
아마 과거의 그들에게 말해 줘도 믿지 못하리라.
“미래에 너희는 경중고를 이기고 우승해!”
라고 말하면 단숨에 헛소리로 일축해 버릴 터였다.
경중고의 이름에는 그만한 무게감이 있었다.
또, 광천고의 이름이 그만큼 가볍기도 했고.
“걱정 마. 솔직히 그건 우리도 그러니까.”
“막 지금 자고 일어나면 집에서 깨는 거 아닌가 싶다니까.”
대현과 영준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 건 현성과 경진이었다.
언더키는 광천고 주전들을 위해 두 개의 4인실을 마련해 줬는데, 대회 단체전 우승 축하를 위해 한 방에 모여 있던 그들이 대화에 참여한 것이다.
3학년이 거들어 주자, 대현이 “그것 봐.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라는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영준을 바라보았다.
“안 믿어지는 건 나도 그래, 인마.”
“근데 왜-”
“그냥 네가 같은 말만 계속하니까 그렇지.”
“인정. 아까부터 계속 그 말만 하더라.”
“진짜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하냐.”
언제나처럼 옥신각신하는 2학년 트리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그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시질 않고 있었다.
지켜보는 3학년들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
다들 헤실헤실 웃으며 떠들어 댔다.
늘 어른스럽게 굴던 정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건, 뒤에서 지켜보는 성현뿐이었다.
‘뭐, 첫 우승이니 기쁠 만도 하지.’
게다가 어디 그게 쉽게 얻어 낸 우승이었던가.
2학년들에게는 2년, 3학년들에게는 3년이 걸린, 그들이 흘렸던 피와 땀의 보상이었다.
대체 누가 이걸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들, 오늘 수고 많았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정철이 씩 웃었다.
그는 방 안에 있는 주전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대회 전까지만 해도 우승은 꿈도 못 꿨었는데. 이렇게 우승하고 나니, 대현이 말마따나 잘 믿어지지 않네.”
“정철 형도 그렇죠?”
“그럼, 당연하지. 무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한 건데. 쉽게 실감이 나겠어? 아무튼, 우승도 했으니 이제 소년 가장이란 별명과도 작별이네.”
부모님이 싫어하는 별명이었다며 정철이 농담을 던지자, 주전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광천고 주전들에게 있어 정철에게 붙은 소년 가장이라는 별명은 썩 좋은 의미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써도 될 만큼.
왜냐하면.
‘앞으로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할 테니까.’
단순히 우승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있기야 하겠다만, 중요한 건 우승까지 가는 과정이었다.
32강부터 결승에 이르기까지, 정철도, 대현도, 윤호도, 영준도, 현성도, 경진도, 그리고 성현까지도 모두 제 역할을 해냈다.
누구 하나 모자랐다면 닿을 수 없던 우승에 기어코 도달한 건 그들 모두의 노력이었다.
그러니 감히 누가 소년 가장을 운운하랴?
“솔직히 말하면, 운이 좋긴 했어. 여러모로.”
빅4와 꽤 늦게부터 만났던 대진표.
약소부라 무시당했던 광천고라는 의외성.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던 기세까지.
광천고가 우승까지 직행할 수 있던 것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었다.
물론, 그들의 실력이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였지만, 다른 것들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제 우리도 이번 우승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됐을 거고, 그만큼 연구가 될 거야. 아마 다음 우승은 이번 우승보다도 더 힘들겠지.”
어떤 기술이 특기인지.
어느 공격에 약하고, 어느 공격에 강한지.
그 모든 게 이번 대회의 기록을 통해 낱낱이 파헤쳐지리라.
“하지만.”
정철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다른 광천고 주전들도 마찬가지였다.
승리라는 이름 앞에 하나 된 그들의 눈은 같은 의지를 품고 빛났다.
“그래도 우리는 우승할 거야. 그렇지?”
“물론이죠.”
“당연한 소리를.”
그들의 대답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남들이 막아 세우려 노력한다고 해서 멈춰 버릴 만큼 나약한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랬었다면 이번 우승도 없었으리라.
“다음번에 우승하고 나면, 그때는 강호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 ‘광천고는 강호팀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정철이 피식 웃었다.
그의 농담에 현성도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경중고가 삼 년 동안 해 먹었잖아. 그럼 걔네 꺾은 우리도 최소 삼 년은 해 먹을 수 있겠지.”
“씁, 그걸 못 보는 게 아쉽네.”
“3학년인 걸 어쩌겠냐. 그래도 뭐, 졸업한 뒤가 걱정은 안 되네.”
그렇게 말하며 현성이 바라본 건 성현이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덩달아 성현에게 쏠렸을 때, 현성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졸업하면 성현이가 광천고 주장을 맡아서 계속 이끌 테니까. 그치?”
기대감 어린 질문에 성현이 빙긋 웃었다.
이미 광천고가 전설의 첫 페이지를 기록한바.
그는 자신의 손닿는 데까지 계속해서 써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럴 능력 또한, 충분하다 못해 넘쳤고.
“네, 물론이죠.”
*
“진짜, 말도 안 되더라.”
나른한 듯하면서도, 뚝뚝 끊기는 특유의 말투.
침대에 드러누운 백성호는 언제나처럼 말했다.
“겨눔세를 보고, 놀란 건 처음이었어. 공세를 걸 엄두도 안 나더라. 가까이 가면 아마, 질식해서 죽었을지도 몰라.”
담담한 어조로 성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백성호.
결승전에서 패배한 후유증 같은 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동생인 백지호는 알고 있었다.
지금 백성호는 누구보다 분해하고 있다는 것을.
대회가 끝나고 나면, 늘 정좌한 채 경기 내용을 되짚어 보던 그다.
그런 그가 침대에 드러누워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의 정리가 잘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긴, 꽤 오랜만에 진 거니까.’
백지호가 기억하기로, 백성호의 패배는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같은 학년이 아니라 고등학생과 붙어서.
그 이후로는 누구와 붙든 상관없이 공식 경기라면 모조리 이기며 불패의 전설을 쓰고 있었는데, 그게 마침내 꺾여 버린 거다.
쌓아 올리던 기록에 마침표가 찍힌 상황.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뭐 하나, 내가 이길 수 있는 게 안 보였어. 공세부터 시작해서, 정말 아무것도.”
“나름 대등해 보였던 거 같은데.”
경중고의 선봉, 김호준의 말을 백성호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대등해? 전혀 아냐. 이만큼도, 대등하지 않았어. 걔는 철저히 나한테 맞춰 줬다고. 봐줬다는 거야.”
“너한테 맞춰 줘? 그게 가능해?”
“가능하더라. 걔한테는.”
하늘이 내린 재능.
백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천재.
차세대 최강자.
훗날 한국 검도계의 염원을 이루어 줄 인재.
그토록 다양한 별명과, 그에 걸맞은 실력을 지닌 백성호를 철저히 맞춰서 상대해 줬다니.
그럼 상대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특히나 백성호와 함께 훈련하며, 그의 강함을 몇 번이고 직접 느껴 본 경중고 주전들에게는 더더욱.
“걔라면 그럴 만하지.”
백성호의 말에 단번에 수긍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동생 백지호였다.
연습 경기에서 한 번, 유망주 대회에서 한 번.
이미 두 번을 직접 상대해 본 그는 성현이라는 괴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인 백성호 또한.
그가 두 사람을 비교했을 때, 더한 괴물은 성현 쪽이었다.
“역시, 내 동생. 너라면 알아줄 줄, 알았어.”
백지호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는 백성호.
무덤덤한 얼굴로 그러고 있으니 어쩐지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백지호는 생각했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물었다.
“됐고. 그보다 이길 수 있겠어?”
잠시 침묵하던 백성호가 내놓은 대답은 다소 뜬금없는 것이었다.
“···이성현은, 일종의 ‘길’이야.”
“-?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따라가는 뒷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지침이지. 그 뒤를 쫓는다면, 아마 그쪽이 들인 시간의 반도 안 걸려서, 잡을 수 있을걸.”
결국, 언제고 따라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게 얼마나 걸릴지 백성호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것.
결승전에서 성현을 상대할 때, 그가 성현의 중단세에서 얼마나 깊은 ‘세월’의 흔적을 느꼈던가.
십 년, 이십 년이 아니라, 최소 오십 년 이상.
한 사람의 일생(一生)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이 그 안에 녹아 있었다.
그런즉, 절반도 안 걸려도 이십 년이다.
무려 이십 년!
‘물론, 그보다 짧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보다 길 수도 있다.
게다가.
“그건 이성현이 발전 없이 멈춰 있을 때의 이야기 아니야?”
“······.”
백성호가 뒤를 따라잡기 위해 아등바등할 때, 성현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또한 계속해서 실력을 늘려 갈 터.
다만 그 속도는 쫓는 백성호에 비하면 느리겠지만, 어쨌든 멈춰 있는 건 아니었으니.
“이길 수 있어.”
“······.”
“이길 거야. 반드시.”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백성호가, 한 가지 백지호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성현의 의도였다.
오늘 상대했던 성현은, 마치 그가 자신이 도달한 경지까지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올라온 그를 밟고 올라서는 것으로 더 높은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 그의 검에서 뚜렷하게 느껴졌던 거다.
그게 백성호에게는 못내 분했다.
지금의 자신은 아직 상대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에.
‘좋아, 올라가 주지.’
다만, 거기에서 누가 누구를 밟고 올라갈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으리라.
< 광천고 전성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