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기량 차이
*
“하윤 선배, 저거-”
“맞아. 일부러야.”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하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기 때문이다.
배전공고의 주장, 권오형이 어깨를 앞세워 성현의 가슴을 들이받는 모습이.
심지어, 그는 발까지 밟으려 들었다.
몸받음 과정에서 우연히 벌어진 일인 듯 굴었지만, 그녀는 속지 않았다.
저건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더러운 자식. 저딴 식으로 경기를 하다니.”
더욱 열받는 건, 저 행동이 반칙이라 단정 짓기도 어렵다는 점이었다.
어깨로 가슴을 들이받았다?
몸받음 중에 실수로 그랬다고 하면 그만이다.
발을 밟으려 했던 것 또한 마찬가지.
격한 충돌 중에 발을 내디디다가 그랬다고 하면 뭐라고 추궁할 것인가?
심판들이 반칙이라 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변명할 만한 거리가 많았으니까.
수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을까요?”
“모르겠어. 너무 동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성현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수연과 하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비열한 행동에 대처하는 건 실력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과연 그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평소의 성격이라면 가능할 테지만-’
‘성현아, 힘내!’
두 사람은 다소 흔들리는 눈으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
‘눈치 깠나?’
권오형은 슬쩍 성현의 안색을 살폈다.
호면 너머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굳게 다문 입술만이 어렴풋하게 보일 뿐.
하지만 그는 상대가 자신의 수작을 눈치챘으리라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상대에게서 저토록 흉포하고 사나운 기세가 줄기줄기 뻗어 나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지간히도 빡쳤나 본데.’
“흐-”
원하는 대로 경기가 풀린다는 생각에 권오형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검도 좀 잘한다는 놈들은 대개 그랬다.
지금처럼 교묘하게 반칙 몇 번 써 주면, 아주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막무가내로 덤벼들곤 했다.
그렇게 흥분한 만큼 빈틈이 드러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실제로 그는 이 방식을 통해 자신보다 강하다고 평가받는 이들을 이긴 적이 꽤 많았다.
‘결국 이 새끼도 똑같아.’
아무리 천재니 뭐니 떠받들어 봤자 이 모양이다.
적당히 들이받고, 발 좀 밟으려 했다고 씩씩대는 꼬락서니라니.
참 우습지 않은가.
“이야아앗!”
씩 웃은 권오형은 기부림을 내지르며 바닥을 박찼다.
그가 타돌을 선호하는 것은 가장 쉽고 간단하게 반칙을 저지를 수 있는 순간이 바로 타돌 직후인 까닭이었다.
몸받음을 하는 척 어깨부터 들이받는 것이나, 부딪치는 순간에 발 좀 밟는 건 얼마든지 우연이라 변명하는 게 가능하니까.
물론 그게 과하면 경고를 받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 한 번은 괜찮을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경험상, 심판들도 한 번 정도는 그냥 넘어가는 편이었으니.
‘이번에는 아예 넘어뜨려 주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현에게 부딪쳤을 때.
그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쿠웅-!
“···흐억!”
어깨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묵직한 충격!
마치 사람이 아니라 단단한 바윗덩어리를 들이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권오형이 헛숨을 토해 냈다.
‘뭐야, 이거?’
권오형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분명 먼저 달려든 데다가, 어깨로 부딪치기까지 했는데 어째서 이러한 충격을 느껴진단 말인가?
그가 느끼는 혼란은 대개 제대로 된 몸받음을 처음으로 겪어 본 이들이 느끼는 것과 같았다.
‘진짜’ 몸받음이란 이런 것이었다.
허리를 중심으로 온몸으로 부딪쳐 받는.
그리하여 한 점에 집중된 힘으로 상대의 자세를 허무는 것, 본래 몸받음은 그러한 기술이었다.
여태 반칙을 위한 핑계로만 사용해 온 그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익!”
이를 악문 권오형이 발을 들어 올렸다.
상대를 부딪쳐 쓰러뜨리는 것에 실패했으니, 발이라도 밟아 버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욱하는 마음에 시도한 그 행동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되었다.
상대의 발을 밟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발부터 바닥에서 떼어야 했다.
그 말인즉, 상대의 발을 밟기 전까지 그가 한 발로 서는 시간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앗-!”
“으헉?!”
한 발을 들고 선 권오형에게 밀어내는 힘을 견딜 재간이 있을 리가 없다.
맞붙어 있던 코등이를 통해 전해진 힘을 이겨 내지 못한 그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곧 눈을 부릅뜬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어질 미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아아압-!”
강한 기부림 소리와 함께 찔러 드는 죽도!
이미 중심을 잃고 비척대던 상황.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자신을 찔러 오는 죽도를 보며 권오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이를 악무는 것뿐이었다.
“─컥!”
우당탕!
제대로 찌름을 당한 권오형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안 그래도 중심을 잃어 엉거주춤한 자세였는데, 죽도가 목을 강하게 찌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를 호소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잘못은 그가 코등이 싸움을 하며 가까이 붙은 상태에서 발을 떼어 밀어낼 기회를 줬다는 것이었으니.
“헉, 허억- 헉!”
쓰러진 권오형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호면에 보호받고 있었음에도 워낙 충격이 강했던 탓에 숨쉬기가 버거웠던 까닭이다.
숨통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에, 가만히 선 상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납고 흉포한 기세를 두른 성현의 모습이.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그 모습은 마치 그에게 선언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네놈의 같잖은 수작 따위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노라고.
‘빌어먹을.’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겨우 호흡을 가다듬은 권오형이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그의 표정은 검게 죽어 있었다.
여태 그가 상대해 온 이들과 성현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현은 적당히 들이받아 주고, 발 좀 밟으면 흥분해서 빈틈을 드러내는 이가 아니었다.
“두 판째!”
심판이 두 번째 판의 시작을 알렸음에도, 권오형은 전처럼 바로 타돌을 시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타돌을 시도할 수 없었다.
몸받음을 가장하여 어깨로 들이받는 것도, 부딪치는 틈을 타 발을 밟는 것도 통하지 않음을 이미 깨달았기에.
다른 수작들도 마찬가지.
어떤 수를 쓴다 해도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권오형은 죽도를 쥔 채 얼어 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 듯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마음의 평정을 잃은 상대를 박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건만.
지금은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
그러한 흔들림을 알아차린 것일까?
중단세를 취하고 있던 성현이 그를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읏!”
갑작스러운 성현의 접근에 놀란 권오형이 죽도를 들어 올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멈추기 위한 중심 막기.
하지만 성현의 앞에서 그러한 행동은 쓰러뜨려 달라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후욱-!
순식간에 뻗어진 성현의 죽도가 마치 뱀처럼 권오형의 죽도를 타고 휘감았다.
그것을 본 권오형의 뇌리에 검도 유망주 대회에서 성현이 보였던 감는 기술이 스쳐 지나갔다.
아차 싶었던 그가 죽도를 쥔 손에 다급히 힘을 더했지만, 그 정도로 막을 수 있었다면 강찬울 또한 죽도를 놓치는 일은 없었으리라.
부웅!
죽도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허무할 만치 간단하게.
권오형은 죽은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고, 성현의 죽도가 그런 그의 머리를 두들겼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패배였다.
“청색, 머리! 시합 끝!”
“아···.”
주심이 푸른 깃발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며, 권오형은 비로소 깨달았다.
깨닫고야 말았다.
그가 아무리 수작을 부리고, 교묘히 반칙을 한들.
압도적인 기량 차이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
“8강 진출이라.”
배전공고와의 16강 경기가 끝난 후.
정철이 감개무량한 눈으로 한쪽 벽면에 그려진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광천고가 8강에 진출했음을 알리는 선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우승도 아니고 8강 진출임에도 그가 이토록 감격하는 이유는, 광천고 남자 검도부가 달성한 단체전 최고 진출 기록이 8강이었던 까닭이다.
“단체전 16강을 뚫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이번 연도 춘계 대회는 32강에서 떨어졌고, 작년에는 16강이 최대였으니까···.”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의 이 년 만인가?”
“그쯤 됐지.”
정철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8강에 진출했던 게 재작년에 있었던 일이라니.
새삼 광천고가 얼마나 약했는지 느껴졌다.
하기야, 그랬으니 어지간한 검도부라면 다 갖고 있는 우승 기록 하나 없는 것일 테지.
“사실, 올해도 춘계 대회까지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나도 그래.”
“그게 겨우 몇 달 전 일이란 게 놀랍네.”
생각해 보면.
32강에서 탈락했던 춘계 대회로부터 이제 겨우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광천고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는데···.
지금은 회장기 검도 대회라는 커다란 대회에서 8강 진출까지 이뤄 낸 건 물론이요, 그 이상까지도 넘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겨우 단 한 사람이 만들어 낸 변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음 경기, 이길 수 있으려나?”
“···용암고인가.”
호군고, 금제고, 용암고, 그리고 경중고.
이들을 굳이 빅4라고 따로 묶어서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일반적인 강호 검도부보다도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고교 검도계의 패자인 경중고는 굳이 말할 것도 없고, 패권에 도전하는 호군고, 금제고, 용암고 또한 실력이 남달랐다.
약소부인 광천고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뭐, 다른 애들은 잘하니까, 나만 잘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현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32강 상포고를 상대로는 겨우 무승부를 이루고, 16강 배전공고에는 완패한 그였다.
그건 압도적인 활약을 보이는 1학년과 이번 대회에서 쏠쏠하게 승리를 거두고 있는 2학년들에 비하면 실로 초라한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미안했다.
겨우 광천고가 날아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그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싶었기에.
“걱정 마. 우리 우승까지 할 거니까.”
정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승까지?”
“그래. 성현이도 말했잖아. 우승하러 가자고.”
“난 그거 농담인 줄 알았는데.”
“글쎄. 성현이는 진심일걸. 나도 그렇고.”
타오르는 정철의 눈빛을 본 현성은 깨달았다.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16강에 진출하느냐, 마느냐 하던 광천고가 우승을 할 수 있노라고.
한때 소년 가장이라 불렸던 광천고의 주장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둘이서 몰래 뭔 얘기를 하고 있냐.”
툭 내뱉는 말과 함께 끼어든 건 경진이었다.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뭐. 이것저것?”
“이제 곧 8강 시작한다니까 후딱 와. 다른 애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래, 가자.”
경진과 정철이 앞서 떠나가고.
혼자 남은 현성이 가만히 벽에 걸린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8강에 진출했으니 우승까지 남은 건, 세 걸음이었다.
그래, 겨우 세 번만 이기면-
“생각해 보니까, 그리 멀지도 않네.”
< 용암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