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화 : 모욕 >
썩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32강 경기만 봐도 어쭙잖은 선봉으로는 정철을 이길 수 없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어차피 질 거 선봉 순서는 버리고, 다른 쪽에서 선봉을 맡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를 내는 것으로 1승을 챙기는 건 전략적 판단이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난할 수 없는, 그런 판단 말이다.
그리고 그 단 한 사람.
“그렇게 피해서 선택한 게 나라고···.”
배전공고가 선택한 ‘약점’, 손대현이 이를 갈았다.
정철을 피해서 선택되었다는 건, 그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너는 약하다.”
라고 상대에게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가 화가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를 더욱 열받게 하는 건 옆에서 히죽거리는 윤호였다.
“어쩌냐. 나보다는 네가 더 쉬워 보였나 봐.”
“···뒤진다, 진짜.”
“억울해? 억울하면 이기든가.”
십년지기 친구의 약 올리기에 대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정철을 피한 선봉의 상대라는 것.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라는 사실에 적잖게 자존심이 상했기에.
그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호면을 뒤집어썼다.
‘내가 약점으로 보였다 이거지.’
빠득.
차오른 분노가 대현의 마음을 뜨겁게 덥혔다.
그건 지극히 마땅한 울분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부족함을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상대에게 면전에서 무시당한 꼴이었으니···.
시합이 시작하자마자, 그가 노여움에 가득한 기부림을 내지른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야아압-!”
이제까지 있었던 어느 경기보다도 사나운 기부림!
그건 무시당한 대현의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포효였다.
동시에, 대현은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거의 한 박자에 이루어진 시합 시작-기부림-타돌.
그러나 그가 분노에 몸을 맡기고 무턱대고 뛰어든 건 아니었다.
‘나를 택했다는 건,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으니 골랐을 터.
즉, 상대의 실력은 대현보다 적어도 한 수 위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도 그럴 게, 선봉을 버리는 카드로 쓴 이상, 다른 쪽에서 반드시 승리를 따내야 했으니까.
분명히 신중하게 상대를 선택했으리라.
그 끝에 결정된 것이 자신이라는 것에는 분통이 터졌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상대에게 선공을 양보해서는 백 퍼센트 져. 그렇다면!’
이 때문에 대현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타돌을 시도한 것이다.
자신의 강점을 발휘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실력 차이를 극복해내고 승리를 손에 넣기 위해서!
타악-!
묵직하게 내리치는 일격!
배전공고의 선봉이었던 김주한은 허를 찔린 듯 움찔하며 물러났다.
시합 시작과 동시에 이렇듯 미친놈처럼 달려들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하나 그러고도 자세만큼은 흔들림 없었다.
한 고등학교의 돌격대장 자리를 따낸 실력이 어디 간 건 아니었으니까.
“이아압-!”
“흐압!”
쿠웅-
김주한은 그대로 이어진 대현의 몸 받음도 어렵잖게 받아냈다.
타돌의 기세를 제대로 살렸음에도,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미 32강전에서 봤던 연계였기 때문이다.
본래 이런 건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에 따라 대처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16강의 상포고는 몰랐기에 당황했고, 그로 인해 밀리다가 빈틈을 드러냈으며, 이를 노렸던 대현에게 물어뜯긴 것이었다.
반면 김주한은 이렇게 나올 걸 예상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막아낼 조건은 충분했다는 뜻이다.
‘그래, 알고 있었다 이거지.’
나름대로 회심의 타돌-몸받음 연계가 실패했지만, 대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32강전에서 한 번 보여줬던 연계가 그대로 통할 것이라 믿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택했을 때부터 이게 통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고, 준비해온 다른 무기를 꺼내 들기로 마음먹었었다.
바로, ‘코등이 싸움’을.
“이아압-!”
“흐아압!”
기부림을 내지르며 근접거리에서 거칠게 충돌하는 대현과 김주한.
코등이 싸움은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려 공격의 기회를 만들기 위한 다툼이었다.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기술적인 밀고 당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리 타돌-몸받음-코등이 싸움 세 가지를 중심으로 연마한 대현이 주도권을 잡아낸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칫!”
코등이 싸움에서 밀렸을 때.
상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그대로 밀려서 공격권을 내어주든가, 그도 아니면 먼저 공격을 시도하든가.
그중 김주한이 택한 건 후자였다.
물러서며 공격- 즉 퇴격 머리치기를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것이 대현이 노리는 바라는 사실도 모른 채.
‘그럴 줄 알았지!’
대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양손에 힘을 더했다.
상대가 물러서는 것에 맞춰 밀쳐냄으로써,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완벽한 타이밍에 이루어진 밀어내기.
생각했던 것보다 두어 걸음 더 밀려난 김주한이 겨우 자세를 추슬렀지만-
“이아아압-!”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대현이 아니다.
기부림을 내지르며 땅을 박찬 그가 흐트러진 상대의 허리를 노렸다.
왜 머리가 아니라 허리치기를 시도했는가.
이는 타돌을 시도하는 그를 보며 반사적으로 죽도를 들어 올린 김주한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실제로, 허리를 향해 휘둘러진 죽도를 보며 김주한의 두 눈은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타악-!
“청색, 허리!”
심판들이 만장일치로 푸른 깃발을 들어 올렸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광천고 주전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한 방 제대로 먹여줬네!”
“잘한다, 손대현!”
“······.”
그러나 대현은 그들의 외침에 화답하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선 채로 죽도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방금 해낸 것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놀라운 건, 그가 그것들을 단련한 원인이었다.
‘타돌, 몸 받음, 코등이 싸움까지-’
전부 성현이 해줬던 조언이 아닌가.
그때도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성현은 정말로 그에게 딱 맞는 옷을 주듯 완벽한 도움을 준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천재들에게는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성현이가 있으면 진짜로-’
“···우승이 가능할지도.”
처음에는 농담처럼 말했던 우승.
하지만 32강에 이어, 16강까지 온 지금.
대현의 눈에는 선명한 ‘길’ 하나가 보였다.
우승으로 향하는 길이-
‘그러기 위해서는.’
대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한때는 참 높은 산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그저 넘어설 수 있는 언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우승을 향해 가는 길에 거쳐 가는 언덕.
그만큼 그가 성장했다는 뜻이리라.
‘내가 이번 시합을 이겨야겠지.’
“두 판째!”
16강 단체전 2위 경기 결과.
최종 점수 2 대 1로 광천고 승리.
그것은 대현이 회장기에서 거둔 첫 승이었다.
더해서 지켜 보던 모두가 놀란 경기이기도 했다.
약소부인 광천고 남자 검도부에서도 최약체로 취급받던 대현이 배전공고 선봉을 정면으로 꺾은 경기였으니까.
심지어 배전공고가 선봉을 버리면서까지 시도한 작전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단순히 1승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색, 허리! 시합 끝!”
다만 안타까운 건, 3위인 윤호가 0 대 1로 패배하며 승리의 흐름을 끊고 말았다는 점.
터덜터덜 걸어오는 그에게 대현이 따스한 눈으로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넸다.
“억울해?”
“······.”
“억울하면 이기시든가~”
“···다음에는 꼭 이길 거다.”
“그럼그럼. 믿고 있다구, 제엔장-”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16강 경기는 막힘없이 쭉쭉 진행되었다.
중견인 영준이 나가 승리를 따냈고, 5위였던 현성은 안타깝게도 패배.
이어진 부장전에서는 경진이 무승부를 거뒀다.
그 결과, 3승 1무 2패로 주장전이 돌아왔다.
여기서 성현이 승리하면 경기는 그대로 끝나고, 아니라면 대표전까지 치르게 된다.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지만 말이다.
‘배전공고의 권오형이라.’
성현은 맞은 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큰 키와 그에 걸맞는 덩치가 인상적인 상대가 보였다.
배전공고의 주장, 권오형.
이름을 되짚어봐도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그렇다는 건, 이후에도 그가 딱히 유명한 선수는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가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
“시작!”
“으야아앗!”
그런데도 성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를 얕보는 마음은 검을 무디게 만든다.
그 사실을 그는 나이 서른다섯에 깨달았고, 이후로는 어떤 이가 상대든 최선을 다했다.
사자가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하듯이.
그가 시합 개시 직후 이루어진 권오형의 타돌을 막아낼 수 있는 건 그 덕분이었다.
타악!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진 죽도가 성현의 죽도에 막혀 멈춰 섰다.
딱 그뿐인 이야기였으리라.
그다음으로 권오형이 한 행동만 아니었다면.
쿠웅-!
“─!”
몸을 울리는 충격에 성현이 헛숨을 토해냈다.
죽도를 막아내는 사이,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권오형이 그를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그건 몸 받음이 아니었다.
몸 받음은 상대의 중심을 허물기 위함이지 충격을 주려는 행동이 아니었으니.
이건, 그냥 ‘들이받은’ 것이다.
어깨로 차징하듯이 말이다.
‘이 녀석.’
물론 타돌 이후의 부딪침은 예삿일이다.
달려들어 치는 게 타돌이고, 그러다 보면 서로 충돌하는 경우는 잦다.
하나 이건 달랐다.
성현은 단숨에 간파할 수 있었다.
권오형이 일부러 노리고 들이받았다는 사실을.
“으야앗!”
타악-!
이어지는 공격도 마찬가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타돌이었지만, 미리 의심하고 있던 성현은 알아차렸다.
방금 그가 피하지 않았다면 내밀고 있던 발을 제대로 밟혔으리라.
그래놓고 분명 우연인 것처럼 굴었을 터.
‘이따위 짓거리를-’
검도의 본질은 자기 수양의 무예다.
상대와 싸워 승부를 가리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괜히 예시예종(禮始禮終)─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나는’ 운동이라 하는 게 아닐 만큼.
하지만 때때로 그런 이들이 있다.
승리에 집착하여 검도의 본질을 흐리는 자들.
그것을 위해서라면 교묘하게 반칙을 저지르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
바로 저 권오형 같은 놈들 말이다.
“······.”
성현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반면, 그의 눈은 가라앉은 표정과는 별개로, 마치 불꽃이 된 것처럼 타올랐다.
승리를 갈구하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고 얽매인 끝에, 검도의 본질을 흐리며 반칙하는 건 분명 그른 행동이었다.
그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를 상대로 이러는 걸 경험하는 건- 꽤 오랜만이로군.’
‘전’의 현역 시절.
성현을 상대로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이처럼 개수작을 부려오는 이들은 꽤 있었다.
그가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주는지 제대로 드러내기 전까지는.
실업팀 선수로 활동하고, 겨우 일 년이었다.
교묘한 반칙 같은 가당찮은 수작을 부리는 이가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 말이다.
그는 검도를 사랑하는 만큼.
검도를 모욕하는 행위는 절대 참지 않았다.
‘짓밟아주지.’
< 기량 차이 -유료 시작 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