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화 : 천부의 재능 >
성현은 한 걸음 물러서며 죽도를 들어 올렸다.
당황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는 무덤덤한 태도로.
그의 죽도가 내리쳐오는 상대 죽도를 가볍게 ‘스쳤고’, 한없이 완벽하게만 보였던 머리치기는 작은 충격으로 무너져 내렸다.
통했다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찰나에 자신의 격자가 파훼 되었음을 깨달은 김은휘의 얼굴이 절망으로 흐려졌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실력을 발휘해?
이상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다고?
실로 우스운 이야기다.
천부(天賦)의 재능 앞에서 범재들이 말하는 완벽함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들에게는 평생 한 번 느낄까 말까 한 특별한 순간이, 천재는 매일, 매번, 매 순간 일어나는 예사로운 일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기에 하늘이 내린 재능이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인 것이다···.
“하아아앗-!”
흔들림이 만들어낸 틈을 놓칠 성현이 아니다.
기부림과 함께 이어진 일섬!
스쳐 올린 자세에서 벼락같이 이어진 머리치기는 정확하게 김은휘의 머리를 노렸다.
이미 자신의 격자가 파훼 되어 마음이 흐려진 김은휘가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성현이 휘두른 죽도는 정확하게 머리를 강타했고,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던 심판 세 명이 일제히 푸른 깃발을 들어 올렸다.
“청색, 머리!”
위압적인 공세에서부터.
완벽함 그 자체였던 스쳐 올려 머리치기까지.
성현이 중단세를 취하는 것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던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경기였다.
지금 저것을 보고도 상대를 무시한다느니 하며 지껄여댈 검도인은 없었으니.
몇몇 검도인들은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까지 느꼈다.
상단세가 보여주는 화려함, 그 뒤에 고요하게 가려져 있던 성현의 중단세가 비로소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중단세가 저 정도라니.”
“생각해보면 결승까지 올라간 건 중단세잖아. 상단세가 임팩트가 커서 주목받지 않았을 뿐.”
“오히려 상단보다 중단이 더 센 거 아닌가?”
사실은 중단세가 상단세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런 추측마저 나오고 있었으니 말 다 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제 누구도 성현의 겨눔세에 대해 섣부르게 왈가왈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어느 한쪽도 쉽게 입을 놀려 평가할 수 없는 고절함이 있었으니까.
“참나, 제멋대로들 말한다니까.”
그렇게 코웃음 친 건, 다름 아닌 하윤이었다.
그녀는 관객석에서 떠들어대는 이들을 보며 입가를 비죽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는 게 우스웠기에.
성현과 자주 대련하고, 주말까지 함께 훈련하며 그의 실력을 잘 아는 그녀인 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 사람들은 성현이를 잘 모르니까요···.”
옆에 있던 수연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하윤과 수연을 비롯한 광천고 여자 검도부는 개회식에 참가한 이후, 관객석에서 남자 검도부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이들을 보며 하윤이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그래도 딱 보면 응? 느낌이란 게 있는데.”
“누구나 그걸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래요.”
“누가?”
“성현이가요.”
조곤조곤하게 대답한 수연이 경기장을 보았다.
담담하게 두 번째 판을 준비하고 있는 성현과 어딘지 움직임에 혼이 없는 상대를.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그걸 느낄 수 있는 걸 ‘재능’이라고 말한대요.”
“···재능, 이라.”
하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겉만 보면 이래저래 지껄이는 이들을 감싸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안에는 냉소가 깔려있음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진짜 재능 있는 이들은 쉽게 떠들어대지 않고, 섣부르게 입을 놀리는 이들은 재능이 부족해서다.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이잖은가.
그러니 그녀가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최소한 사람들이 떠드는 거에 영향받을 일은 없겠네.’
대중에게 휘둘려 몰락한 천재들이 얼마나 많았나.
성현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으니 안심이었다.
피식 웃은 하윤이 말했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응원이나 하자.”
“그럴까요?”
하윤과 수연이 마주 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앞에 손을 모은 그녀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이성현 파이팅-!””
그녀들의 응원은 경기장 안에 있던 남자 검도부 주전들의 귀에도 선명히 들려왔다.
다양한 응원 외침과 웅성거리는 소란을 뚫고서도 들릴 만큼 힘차고 예쁜 목소리였던 까닭이다.
광천고 주전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내 불쑥 말을 꺼낸 건 대현이었다.
“야, 윤호야.”
“응? 왜?”
“성현이 말이야. 검도를 잘해서 인기 많은 걸까?”
“그래서 인기 많은 거면 어쩌게.”
“어쩌긴. 죽어라고 검도 해야지. 잘해질 때까지. 그럼 나도 인기 좀 얻지 않을까?”
윤호는 피식 웃었다.
참으로 가당찮은 이야기였기에.
그는 이 어리석은 죽마고우에게 현실을 깨우쳐 주기로 했다.
“손대현, 정신 차려.”
“뭐가.”
“쟤는 검도를 잘하는데, 거기에 잘 생기기까지 해서 저렇게 인기 많은 거야.”
“윽.”
“사실, 잘생긴 덕분이 더 크지.”
시무룩한 표정의 대현에게 윤호가 쐐기를 박았다.
“성현이가 검도가 아니라 다른 걸 했어도 저만큼 인기 있었을걸.”
그 말에 움찔한 건, 대현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은근슬쩍 듣고 있던 다른 주전들도 어깨를 축 늘어뜨렸던 거다.
“팩트 폭행 자제 좀···.”
“기대는, 기대는 할 수 있는 거잖아.”
“현성이 형. 포기해요. 포기하면 편해요.”
그렇게 바깥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경기를 하는 성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거니와─다만 수연과 하윤의 응원 소리는 들렸다─, 경기 도중 정신을 팔 리가 없었기에.
그는 한결같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첫 득점에서 머리치기가 파훼 당한 후, 어딘지 맥빠져 보이는 상대를.
‘···자주 봤던 모습이네.’
그것은 성현에게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전’에 수도 없이 봤었기 때문이다.
그와 경기한 이들 중 열에 하나 정도는 저런 식으로 넋 놓은 듯 굴었으니까.
좌절해버린 것이다.
자신은 감히 넘을 수 없는 경지에.
올려다보기도 힘든 까마득한 높이의 산이 앞을 막았을 때, 그곳에 오르고자 하는 이는 적다.
대부분 사람은 그저 피해가기 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그 높이에 절망할 뿐.
성현은 검도를 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러한 산이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것조차 버거운, 그래서 꼭대기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하늘과 그대로 이어져 있는 고산(高山).
그의 검도 앞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검을 꺾을 만큼 좌절했던가?
‘끝내줘야겠군.’
성현은 김은휘의 태도에 실망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악착같이 달려드는 백지호 같은 이가 극히 드물다는 건 이미 알고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가 백지호를 기꺼워했던 것 아니던가.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서서히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더니, 그대로 치고 들어갔다.
“하아아앗-!”
기부림과 함께 짓쳐 드는 성현.
김은휘는 반사적으로 죽도를 들어 올리며 막으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어딘가 어설펐고,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첫판에서 보여줬던 머리치기와는 정반대로.
차마 같은 이의 것이라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마음이 꺾였다는 건 이런 뜻이다.
칼은 날카로움을 잃고.
움직임은 활력을 잃는다.
이렇게 되어버린 이는, 이제 그를 상대로 다시는 투지를 불태울 수 없다···.
투욱!
엉성한 방어 따위가 먹힐 성현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막아 세우려는 상대의 죽도를 치워낸 뒤, 그대로 팔을 뻗었다.
깔끔한 호선을 그리는 죽도.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은휘가 몸을 뒤로 빼냈지만, 그조차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
타악!
“청색, 머리! 시합 끝!”
그나마 긴장감 있게 싸웠던 첫판과는 달리.
두 번째 판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압도적인 패배였다.
이미 마음이 꺾여버린 검으로는 성현에게 대적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건 김은휘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 앞에서 무릎 꿇은 게 어찌 사람의 잘못이던가?
“으아! 16강 진출!”
“이대로 쭉쭉 올라가자!”
상대와의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성현을 보며 광천고 주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주장전까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춘계 대회 32강전의 복수를 했고, 본인들이 16강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심지어, 그건 주장 순서가 오기 전에 결정된 승리이기도 했다.
성현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실력이 상포고를 이길 만큼 늘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랬다면 지금처럼 성현에게 가르침을 받을 일이 없었을 테고, 실력 향상도 안 됐을 테니 의미 없는 가정이기는 했지만.
“축하한다, 얘들아!”
감독인 김만석도 활짝 웃으며 말했다.
멀리서 이경훈 감독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되고 있는지도 몰랐기에.
그에게는 차라리 그게 더 나으리라.
“······.”
기뻐하는 광천고 주전들 사이에서 성현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관객석을 훑었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분명히 들렸으니까.
그를 응원하는 수연과 하윤의 목소리가.
청송국민체육센터의 관객석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그녀들을 찾는 건 금방이었다.
“······!”
휙휙!
자신들을 봤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힘차게 손을 휘젓는 수연과 하윤.
두 사람을 본 성현은 그만 웃고 말았다.
다른 경기에 민폐일까 차마 소리를 지르지는 못하고 손만 붕붕 휘두르는 게 귀여웠던 까닭이다.
그는 킥킥대며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좋겠다. 나도 여자애들한테 응원받으면 더 힘이 날 거 같은데···.”
그 모습을 대현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윤호와 영준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 녀석을 대체 어쩐단 말인가?
그저 안타깝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
광천고의 16강전 경기는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이루어졌다.
그들은 첫 번째로 경기하는 조였고, 그들 이후로 세 번의 경기가 더 남아있었기에.
상대는 32강전 상대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받는 배전공고였다.
그래봤자 어디까지나 도토리 키재기이고, 상대 전적 상으로 우세하기에 그렇게 평가받을 뿐이지만, 여하튼 그랬다.
“청색, 손목! 시합 끝!”
선봉으로 나간 정철은 당연하다는 듯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속박을 풀어버리고, 날개를 펼친 그에게 이미 어지간한 상대는 대적할 수조차 없었으니까.
지금의 그를 막아서기 위해서는 상포고의 이경훈 감독이 생각했던 것처럼 적어도 빅4의 주장급은 나서야 했다.
그 말인즉, 정철이 현 고교 검도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이라는 이야기다.
아마 이번 대회를 통해 완전히 개화한 그의 실력을 본 대학과 실업팀들은 꽤 바빠지리라.
“저거, 지금 정철이 형 피한 거지?”
“안 되겠다 싶었나 보지.”
손쉬운 승리의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정철의 상대로 나온 배전공고의 선수가 원래 선봉을 맡은 이가 아니었던 거다.
선봉끼리 싸웠을 때, 정철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부러 2위를 맡은 선수를 ‘버리는 카드’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그건 광천고에 선봉의 승리를 내주는 대신, 다른 약한 순서에서 승리를 가져가겠다는 의미였다.
성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생각했다.
‘지금의 정철 선배라면 그럴 만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