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까짓거 >
“···이야, 지금 내가 들은 게 맞냐? 백성호 보고서도 우승은 우리 거라 한 거 맞지?”
“역시 우리 주장님이시다. 완전 무대를 뒤집어 놓을 준비가 되셨네.”
대현과 영준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후배를 놀려 먹으려는 듯이.
그러나 성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우승하려면 한 번은 꺾어야 하는 상대잖아요. 그리고, 저만 붙는 게 아닐 텐데···.”
“윽. 그렇지.”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성현의 말에 2학년 두 명이 쭈그러들었다.
‘우승하러 가자!’라며 당당히 말한 그들이었지만, 경중고의 강함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죽을힘을 다해 훈련했다 해도, 상대가 가만히 놀고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리고 그건 성현도 같은 생각이었다.
‘되도록 경중고와 늦게 만나야 할 텐데.’
지금의 광천고로는 경중고와 바로 맞붙어서 도저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두 학교 간 체급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당장 경중고와 비슷한 급이라 평가받는 나머지 빅4─ 호군고, 금제고, 용암고 세 곳 중 하나만 만나도 아슬아슬했으니까.
그게 현실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좀 더 시간이 많았으면 모를까.
성현에게 2학년 트리오가 가르침 받기 시작한 것도 이제 한 달 정도 지났을 뿐이니.
‘하지만, 실전을 통해 성장한다면 달라질 터.’
그런데도 성현이 우승을 포기하지 않은 건,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2학년 트리오의 잠재력을 직접 확인했으니까.
비록 아직은 영준을 제외하면 주전 중에서 제일 약한 이들이었지만, 둘 중 한 명만이라도 제대로 터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정철-성현의 확고한 2승, 영준의 1승, 거기에 추가로 1승이 얹어진다면, 승리는 확정이기에.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건 대진표였다.
32강부터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는 회장기 검도 대회 규정상,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지가 대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과연···.’
“얘들아! 여기 대진표 나왔다!”
그러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주최 측에 불려갔던 김만석 선생이 손에 든 종이를 팔락대며 돌아왔다.
광천고 주전들이 몰려들어 그것을 확인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상대가 될 고등학교였다.
“32강 상대가··· 상포고네.”
“진짜? 나름 꿀 매치 아니냐?”
“매치가 어떻게 이렇게 되지.”
영준이 눈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옆에서 과연 꿀 매치인가에 대해 윤호와 떠들던 대현이 반응했다.
“뭐가?”
“전에 연습 경기 상대 예측할 때 기억나냐?”
“아- 그 경중고 연습 경기 전에? 기억 못 할 리가 있냐. 그때 너 성현이한테 대차게 깨졌었잖아.”
“쓸데없는 거까지 기억하지 말자, 우리.”
“푸핫! 쓸데없다니. 그게 얼마나 꿀잼이었는데.”
그러게 하는 말 좀 믿지 그랬냐면서, 대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주전들도 마찬가지였다.
성현은 다만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박살 냈던 당사자인 그가 뭐라 말해 봤자 도발밖에 더 되겠는가.
“···아무튼, 내가 말했었잖아. 상대 혹시 상포고 아니냐고. 춘계 대회 32강전 복수 겸해서.”
영준이 재빨리 대화 주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맞아, 맞아. 그랬었지.”
“그때 말했던 게 이렇게 이루어졌잖아. 이거 복수하라는 계시 아니냐?”
“올-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러게. 쟤네도 32강에서 우리 만나서 떨어져 봐야지. 그래야 서로 한 방씩 주고받는 거니까.”
듣고 있던 윤호가 끼어들어 말했다.
영준은 동감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공평하게 해야지. 공평하게.”
물론 이쪽이 때리는 건 더 아플 예정이었다.
약하다고 무시하던 팀한테 32강에서 패배하여 탈락하면 엄청나게 충격일 테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억울하면 이기면 그만 아닌가.
‘대진표가 괜찮다.’
성현이 주목한 건 다른 매치들이었다.
그는 32강부터 시작해서 이기고 올라갈 경우를 계산해 봤고, 그 결과 현재 대진표가 ‘꿀대진’이라고 할 만하다 평가했다.
일단 당장 상대해야 하는 게 상포고등학교인 것부터 그랬다.
춘계 대회에서 만나서 패배했던 상대.
복수라는 동기 부여도 되고, 실전 경험을 쌓기도 적당한 실력이었으니.
‘심지어 빅4랑 만나는 건 8강부터.’
광천고가 깔끔하게 승리하고.
빅4가 전부 이겨서 올라온다고 쳤을 때.
처음으로 조우하는 건 8강에서의 용암고다.
16강에서 만나는 게 빅4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이기게 되면 4강에서 호군고를 만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기면.
‘결승전에서 경중고라···.’
결승전에서 운명처럼 경중고와 맞붙게 된다.
실전 경험을 통해 성장할 기회는 충분했다.
각오 삼아 말했던 단체전 우승의 가능성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경중고랑은 완전히 반대편이네.”
“와, 바로 붙을까 봐 진짜 걱정했는데···.”
다른 주전들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대진표를 보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걱정하던 일에서 해방되었으니까.
첫 경기에서 고교 최강인 경중고를 만나는 건 끔찍한 악몽이었으니 말이다.
“자자, 이제 경기 준비 시작하자. 우리가 첫 번째 경기니까 미리 해 둬야지.”
정철의 말에 광천고 주전들이 수긍했다.
회장기 검도 대회는 8강 전까지는 대개 그러하듯 A, B, C, D 네 개의 조로 나누어 한꺼번에 네 경기씩 치렀다.
아무리 단체전 한 경기가 길어 봐야 30분 내외로 끝난다고 하지만, 그걸 한 경기씩 하려면 날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광천고는 대진표에서 세 번째에 이름을 올렸으므로, B-1조였다.
바로 첫 번째 순서로 경기를 하게 된다는 거다.
그러니 넉넉하게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그들이 다시 한번 복장을 점검하고, 죽도까지 꺼내 들어 별문제 없이 살피는 사이, 빠르게 움직인 심판과 주최 측 인원들이 자리 잡았다.
[남고부 32강 A조 경기가 이제 곧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작된 회장기 검도 대회!
주심 역할의 심판이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며, 정철이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뿐이다.”
“잠깐만, 내가 맞춰 볼게. 최선을 다해라. 맞지?”
“맨날 똑같은데 뭘 맞춰, 인마.”
현성과 경진의 말에 정철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맞아! 끝까지 최선을 다해라. 알겠냐!”
““네, 주장!””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선봉 순서이니만큼 바로 경기에 임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곧 대회 스태프가 분주히 움직이더니, 한쪽 벽에 세워진 TV가 켜지고, 그곳에 광천고와 상포고의 출전 선수 명단이 나타났다.그것을 가만히 살펴본 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전이랑 달라진 건 없네.”
“그러게. 춘계 대회 멤버 그대로다.”
‘눈에 띄는 이름은 없군.’
명단을 살핀 성현이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라면 훗날까지 유명했다는 뜻이다.
실력이 대단하거나,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로.
하지만 상포고에는 그런 이가 없었다.
죄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으니, 아마 고만고만한 학생 선수 수준이리라.
‘쉽게 가겠네.’
“자리로!”
주심이 강한 힘이 실린 목소리로 외쳤다.
비로소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정철 형, 힘내요!”
“꼭 이기고 와요!”
주전들이 하는 응원을 뒤로한 채.
주심의 말에 따라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나선 정철이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호면에 가려 잘 안 보였지만, 그는 그 안에 있는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상포고등학교의 선봉, 이현호.
한 고등학교에서 선봉으로 나선다는 건, 초반 기세 싸움을 맡았다는 의미다.
간단히 말해, 돌격대장이라는 이야기다.
돌격대장이 나약해서 곧장 죽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세에서 밀리고, 또 주도권을 빼앗긴다.
그래서 이현호의 실력 또한 꽤 괜찮은 편이었다.
“청색, 백색. 인사!”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이다.
괜찮은 실력만으로는 안 된다.
정철은 약소부인 광천고 검도부를 1학년 때부터 사실상 혼자 지탱하고 있는 괴물.
그런 그를 이기려면, 강호라 불리는 검도부의 주장급은 되어야 했다.
겨우 이현호로는 부족했다.
게다가.
‘몸이 가볍다.’
하필이면 오늘 정철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아니, 최상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했다.
주장 순서를 내려놓은 뒤 나선 첫 번째 대회이기 때문일까.
그는 마치 몸을 얽어매던 족쇄를 모두 풀어낸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게 잘 보이고, 잘 들리고, 심지어 잘 움직이기까지 했으니···.
“시작!”
정철과 이현호 두 사람이 중단세를 취하자.
한 차례 번갈아 본 주심이 강하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크아아압-!”
“우아아앗-!”
마주 선 둘이 맞춘 것처럼 기부림을 내질렀다.
경기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포효였다.
마치 두 마리 맹수가 서로를 향해 울부짖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우아앗-!”
타악!
먼저 공격을 시도한 건 이현호였다.
타돌과 동시에 행해지는 작은 머리치기!
일반적인 머리치기와는 달리, 작은 머리치기는 찌르기로 시작함으로써 상대를 위축시킨다.
하나 자신을 향한 찌르기 따위에 기가 죽을 정철이 아니다.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영준이의 기술에 비하면 기세가 한참 부족해!’
정철은 강한 기부림을 토해 내며 발을 굴렀다.
그는 오히려 찔러 드는 죽도를 향해 뛰어들었다.
자신이 찔릴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상대, 이현호의 찌르기는 작은 머리치기가 특기인 후배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기에.
그것을 몇백 번이나 상대해 본 정철에게 있어 이현호의 작은 머리치기는 그야말로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다!
“크아아압!”
후웅-!
찔러오는 죽도를 쳐낸 정철이 곧장 반격했다.
강렬한 기부림과 함께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그가 휘두르는 죽도가 어찌나 강렬한지, 바람이 훅 갈라지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타아악-!
“윽!”
이현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죽도를 받아 냈다.
그래도 기본적인 실력이 있으니만큼 받는 자세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하지만, 한 번 막았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정철은 재차 기부림을 내지르며 두 주먹에 힘을 가득 주었다.
“크아아압!”
“-으앗!”
뛰어드는 기세를 고스란히 살린 몸받음에 이현호가 속절없이 밀려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말해, 빈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뜻이다.
정철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강하게 발을 구르며, 머리치기!
타악!
“청색, 머리!”
“-와아아!”
심판 세 명이 일제히 청색 기를 들었고, 광천고 주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깔끔한 몸받음 이후 머리치기!
그가 어떻게 광천고 검도부를 지탱해 왔는지 알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연계였다.
“후우우···.”
가볍게 숨을 내쉰 정철이 시작 선 앞에서 다시 중단세를 취했다.
면금 너머로 필사적인 이현호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든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나는 표정.
하지만.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아.’
주장이라는 마음의 짐을 덜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뒤가 든든하기 때문인가.
어느 쪽이 됐든,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고 정철은 생각했다.
‘우승이라.’
우승.
문득, 정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단어였다.
여태까지 ‘무관의 제왕’이라 불려온 그다.
워낙에 약체팀을 이끌고 있다 보니, 그는 변변찮은 우승기 하나 들어 본 적 없었다.
3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졸업 때까지 계속해서 그럴 거로 생각했었는데···.
“우아앗-!”
이성현이라는 걸출한 후배가 함께라면.
어쩐지 정말로 우승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크아아압-!”
타악!
“청색, 손목!”
깔끔하게 2점을 따낸 정철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손뼉 치며 환호하는 광천고 검도부 주전들 사이로, 성현의 얼굴이 보였다.
담담하게 웃고 있는 성현.
이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낸 이였다.
‘그래, 뭐. 까짓거.’
우승 한번 해 보자.
정철의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직은 여리고 약하지만, 분명하게 타오르는 불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