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회장기 대회 >
성현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하윤이었다.
하교하던 도중에 들른 듯, 단정한 교복 차림의 그녀가 검도 섹션을 둘러보고 있던 것이다.
곧 하윤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발견한 뒤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성현 후배, 여긴 어쩐 일이야?”
“저는, 이거 받으러 왔습니다.”
성현이 슬쩍 자신이 메고 있는 가방을 드러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조금 큰 스포츠백으로 보이지만, 검도인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그것을.
그의 생각대로, 하윤은 즉각 그게 호구를 담는 호구 가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디어 왔나 보네?”
하윤은 성현과 수연이 언더키와 계약했다는 사실도, 또 그들에게 장비를 지원받기로 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천수아가 계약서를 건넬 당시에 그녀도 옆에 있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금방 저것이 언더키에서 지원해 주겠다던 최고급 호구임을 알아챘다.
국내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에서 ‘최고급’이라 불리는 호구라니.
참으로 흥미로운 물건이 아닌가?
“그거, 내일 검도부 연습할 때 가져올 거지?”
“네, 그럴 생각입니다. 미리 길들여 놔야 하니까요. 조만간 써야 할 테니 말이죠.”
“아아- 그렇지. 그럼 내일 구경해 봐도 되지?”
“물론입니다. 아마 깜짝 놀라실걸요?”
성현조차 놀랄 만큼 훌륭한 호구다.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하윤이라면, 분명 깜짝 놀라게 되리라고 성현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하윤이 씩 웃었다.
“그건 좋은 의미로?”
“당연하죠.”
“올~ 진짜 좋은 거 받았나 보네?”
“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궁금해지네. 얼마나 끝내주길래 그런 말까지 하는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행이 된 성현과 하윤은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며 검도 섹션을 돌아다녔다.
제법 오랫동안, 힘든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모두 검도에 관해서라면 이야깃거리가 마르지 않는 까닭이다.
죽도 한 자루, 면금 하나, 면수건 한 장 앞에서도 온갖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그들이 언더키 매장을 나선 건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아- 죽도 사고 싶다···.”
“하윤 선배, 죽도 지금 네 개인가 되지 않아요?”
“시합용 하나, 연습용 둘, 예비용 하나 해서 네 개이긴 한데···. 그런 말도 있잖아.”
“어떤 말요?”
“죽도는 늘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성현이 킥킥대며 맞장구쳤다.
“하긴, 그렇네요. 많으면 좋긴 하죠.”
“마음 같아서는 시합용만 세 자루 정도 준비해 놓고 싶은데 말이지.”
하윤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물론 그게 욕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당장 지금 네 자루를 준비해 두는 것도 유별나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까.
보통은 두 자루, 많아 봐야 세 자루다.
거기에 한 자루를 더 들고 다니는 건 나름대로 별난 행동이었다.
‘그래도 많으면 여러모로 좋은데···.’
“···어라?”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멈칫했다.
뒤늦게서야 지금 두 사람의 구도가 어쩐지 굉장히 공교롭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검도용품을 신나게 구경하며 웃고 떠들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니, 저도 모르게 떠올린 것이다.
현재 그들이 하는 행동을 뭐라고 부르는지 말이다.
‘이거···, 설마 데이트?’
남녀가 웃고 떠들며 함께 쇼핑을 즐기는 행위.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데이트’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하윤과 성현이 지금 하는 것도 충분히 데이트라 할 만하지 않은가?
그걸 깨닫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아니아니- 아니잖아. 지금 무슨 생각을-’
만약 얼마 전까지의 하윤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으리라.
애초에 데이트라는 단어도 떠올리지 못했겠지.
연애라는 것에 별반 관심이 없던 그녀였으니.
그녀의 이상형이 ‘자신보다 검도 잘하는 남자’인 것만 봐도 그건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검도 유망주 대회 당시 그녀의 아버지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했던 말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는 큰 변화가 생기고 말았으니까.
-왜긴. 네 이상형이 너보다 검도 잘하는 남자애라며. 딱 저놈이잖냐.
임정호가 하윤과 성현의 관계를 반대한다며 했던 그 말.
그걸 들은 순간, 하윤은 성현이 실제로 그녀가 말했던 이상형과 꼭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보다 검도를 잘하고, 잘생겼고, 멋지고, 또 잘생기기까지 했다!
남자친구로 사귀기에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 정도─
‘그러게 아빠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서!’
하윤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예 깨닫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흔들린 뒤에 난 뒤에 추스르려 한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그녀가 홧홧해진 얼굴에 손으로 바람을 부쳤다.
“······?”
갑작스러운 하윤의 행동에 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것조차 그녀는 신경 쓸 수 없었다.
자꾸만 피어오르는 이상한 생각들을 떨쳐 내느라 여념이 없던 까닭이다.
-하윤 언니, 믿었는데!
‘아냐, 아니라니까.’
-어떻게 언니가 나를 이렇게 배신할 수 있어요!
‘진짜 아니라고!’
때마침 어제 엄마와 함께 막장 드라마를 봤던 영향일까.
수연이 드라마 속의 대사를 그녀에게 하는 상황이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떠올랐다.
···어쩐지,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입술을 깨문 하윤이 자신의 뺨을 탁탁 두드렸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를 가득 담아서.
“하윤 선배?”
“-으응? 왜?”
“아뇨, 갑자기 그러셔서···.”
“신경 쓰지 마. 좀 이상한 생각을 해서 그래.”
후- 하고 깊게 숨을 내쉰 하윤.
그녀가 슬쩍 성현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수연과 성현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었다.
워낙에 같이 붙어 다니는지라 ‘사귀는 거 아닐까?’ 하는 이야기만 어렴풋하게 돌아다닐 뿐,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는 없다는 뜻이다.
수연의 태도로 보면 그녀가 거절할 일은 없으니, 이 애매한 관계는 성현 때문일 터.
그렇다면,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
수연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다는 건 아직 나한테도 기회가- 아니, 진짜! 왜 자꾸 이렇게 생각이 가는 건데!’
결국, 하윤은 마음을 정했다.
이대로라면 폭주하는 생각을 잡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정면 돌파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어중간하게 끄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
몸을 돌린 그녀가 성현을 마주 보았다.
“성현 후배.”
“···? 네. 말씀하세요, 하윤 선배.”
“혹시, 후배는··· 연애 같은 거 생각한 적 있어?”
“네?”
뜬금없는 이야기에 성현이 되물었다.
지나치게 맥락 없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연애란 말인가?
“연애··· 요?”
“응. 연애. 뭐, 그런 거 있잖아. 누구랑 사귄다든가- 하는 것들.”
성현이 말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만큼 그에게는 ‘할 말이 없는’ 주제였기에.
‘전’에 살았던 생을 몽땅 합친다 해도 그랬다.
‘연애··· 라.’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을 끝으로, 성현은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 그저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의 인생은 오직 검도만을 위한 것이었으니.
게다가, 딱히 사랑만 버린 건 아니었다.
‘검도에 필요하지 않다’라고 깎아 버린 것은 그것을 포함해서도 많고 많았다.
오히려, 버리지 않은 것이 한 줌에 불과할 만큼.
‘그러지 않고는 닿을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단 하나.
부족한 시간 내에서 더 높이 이르기 위해서.
재능을 깨달았던 시기가 늦었던 만큼,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허무하게 버린 이십 년을 채워 넣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할 말이 없을 수밖에.
“······?”
성현의 얼굴을 본 하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보는 것만 같은-
‘잘 만들어진 석고상 같아···.’
분명 사람의 얼굴을 닮았지만, 사람과는 달리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석고상’.
그것이 지금의 성현을 보고 하윤이 머릿속에 떠올린 단어였다.
“······.”
“······.”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성현은 성현대로, 하윤은 하윤대로 기묘한 분위기에 눌려 입을 열지 못했기에.
그러한 정적을 깨뜨린 건, 옆에서 불쑥 끼어든 여성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오픈한 팝업 스토어 ‘뿌 아틀리에’입니다! 한번 놀러 오세요!”
귀여운 곰 인형을 든 아르바이트생은 그렇게 말하며 ‘뿌 아틀리에’라 쓰인 명함 두 장을 쥐여 주고 사라졌다.
성현과 하윤 사이에서 흐르는 기이한 침묵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 덕에,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을 수 있었다.
“뿌 아틀리에? 뭐 하는 곳이지?”
“여기 팝업 스토어라 쓰여 있는데···. 혹시 선배는 그게 뭔지 아세요?”
“곰돌이 테마 팝업 스토어··· 라고?!”
하윤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팝업 스토어는 ‘떴다 사라진다’라는 의미를 가진 팝업창에서 유래된 가게로, 짧은 기간 운영되는 임시 오프라인 매장을 뜻했다.
즉, 곰돌이 테마 팝업 스토어는 곰 인형을 파는, 아주 잠깐 운영되는 가게를 말했다!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온갖 인형들을 모아 침대에 장식해 두는 하윤에게는 반드시 들러야만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미안, 지금 당장 가야 할 곳이 생겼어!”
“어딘지 알 거 같네요.”
피식 웃은 성현이 하윤을 보며 말했다.
“마침 저도 팝업 스토어가 뭔지 궁금해졌거든요. 같이 가실래요?”
“그럴까? ···일단 빨리 가자!”
그리하여 두 사람이 향한 곰돌이 테마 팝업 스토어 ‘뿌 아틀리에’.
그곳에는 과연 ‘곰돌이 테마’라 자칭할 만큼 온갖 종류의 곰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손가락보다 작은 크기에서부터, 어지간한 성인도 들기 힘들 만큼 큰 크기, 갈색, 하얀색, 분홍색 등 다양한 색깔까지.
마치 온 세상의 곰 인형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 모양에, 하윤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이거 귀엽다아.”
“아, 이것도!”
“여기 있는 것도 귀엽네! 그치?”
하윤이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그러면서 곰 인형을 몇 개나 품에 안기까지.
평소 검도를 할 때 그녀가 보여 주던 수라 같던 면모에서는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다.
“흐아아- 이것도 너무 귀여워어어-”
심지어 제일 마음에 든 인형을 들었을 때, 하윤은 아예 녹아내린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귀여운 걸 좋아한다고 수연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지라, 성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참으로 귀여운 모습이었으니까.
“···하아- 아쉽다···.”
하지만 하윤은 들고 있던 곰 인형을 아쉬움이 뚝뚝 흘러넘치는 얼굴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성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갖고 싶으시면 하나 사시는 게?”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이번 달은 용돈이 애매해서···.”
이런저런 지출이 많아서, 아무래도 곰 인형까지 사는 건 무리라며 하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곰 인형에 정신이 빠졌어도 그 정도를 계산할 정신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들고 있던 곰 인형을 보며 팝업 스토어 ‘뿌 아틀리에’를 빠져나왔다.
“흐아- 차라리 가지 말 걸 그랬나-”
“하하.”
한탄하듯 말하던 하윤이 시선을 돌려 성현을 바라보았다.
잘 만든 석고상 같은 느낌은 이제 없었다.
그곳에 비치는 건, 그저 고등학생 이성현의 얼굴이었을 뿐이다···.
‘내가 잘못 본 건지, 그도 아니면-’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던 하윤은, 곧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슬슬 가 봐야겠네.”
“가시게요?”
“응. 언더키 매장도 확인했고, 곰 인형도 실컷 봤으니, 이제 돌아가야지.”
하윤이 가볍게 쭉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이제 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간대.
더 늦게 돌아다녀서 좋을 건 없으니, 집에 들어가서 쉬어야 했다.
이보다 더 늦으면 부모님께서도 걱정하실 테니까.
그녀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잘 들어가.”
“네, 하윤 선배. 선배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걱정 마~ 어차피 세 정거장만 가면 집이니까. 그것보다, 후배는 지금부터 준비 잘 해 두는 거 잊지 마.”
“준비요?”
“응, 준비.”
갸우뚱거리는 성현에게 하윤은 옅게 웃어 보였다.
“이제 얼마 뒤면 회장기 대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