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전설이 아닌 신화 >
성현이 받은 한 통의 메시지.
거기에는 언더키와 후원 계약을 맺으며 받기로 예정된 호구의 준비가 끝났음이 쓰여 있었다.
그건 검도 유망주 대회 이후, 마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그가 학수고대하던 선물이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드디어···.’
본래에도 호구를 바꾸고자 했던 성현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장비는 계속 쓰기에는 질이 나빴으므로.
여차하면 검도 유망주 대회 우승 상금까지 모조리 투자할 의향까지 있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러던 차에 언더키와 후원 계약을 맺게 되며 목이 빠지게 새 호구를 기다렸었는데, 그게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성현이 학교가 끝난 직후, 딜라이트 스퀘어의 언더키 스포츠용품점으로 달려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성현: 도착했습니다.]
[성현: 호구는 매장에서 찾아가면 되나요?]
[수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마중 나가겠습니다.]
매장 앞에 선 성현이 카톡을 보내기 무섭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되돌아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마, 실제로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성현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가 아는 천수아라면 분명 그럴 테니까.
‘전에도 그랬던 사람이니까.’
‘전’의 천수아 또한 그랬었다.
그녀는 자신이 ‘크게 될 사람’이라 생각한 이들에게는 호의를 베푸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런 전달도 직접 나서서 해 줄뿐더러,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챙겨 주곤 했다.
차라리 헌신적이라 표현해도 좋을 만큼.
실제로 성현이 삼십 대일 때 만난 그녀는 거의 그의 매니저처럼 옆에서 따라다니며 일을 도와줬으니 말이다.
‘도장 차리는 일까지 애써 줬었지.’
만약 천수아가 아니었다면 성현은 도장을 차리는 일도 버거워했으리라.
평생 검도만을 해 온 그가 수월하게 도장을 차린 것도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계약도 직접 나서서 처리해 주고, 홍보는 물론, 관리까지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었으니···.
‘오죽하면 도장 원생들이 그녀가 내 안사람인 줄 알았을 지경이었으니까.’
늘 냉정하던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화내는 모습에 금방 소문이 가라앉기는 했었지만, 참 재밌는 해프닝이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제법 충격이었는지 그 후로 잠시 쌀쌀맞아져서 꽤 곤란했었지만.
단지, 성현이 궁금했던 건 해프닝 이후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던 내용이었다.
‘그런 사람인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 무슨 뜻이었지···?’
그건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대체 천수아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성현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성현 선수. 기다리셨나요?”
“아뇨. 빨리 나오셨어요.”
방금 전까지 ‘전’의 천수아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어쩐지 성현에게 지금의 천수아 위로 그녀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특히나 닮은 것은 그를 보는 시선이었다.
살짝 열에 들뜬, 찬란히 빛나는 보석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
‘전’의 천수아도 그를 저리 바라봤더랬다.
시간이 꽤 지난 뒤에는 뭔가 다른 눈빛으로 바뀌기는 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따라오시죠.”
“네.”
매장 안으로 성현을 인도하는 천수아.
그는 차분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검도 섹션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예 안쪽 관계자 공간으로 들어섰다.
이미 이야기를 해 둔 듯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오-”
그렇게 안쪽으로 들어선 직후, 성현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언더키에서 준비한 호구를 확인했기에.
그는 살짝 시선을 돌려 천수아를 바라봤고, 그녀는 마치 쐐기를 박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저희가 이성현 선수를 위해 준비한 호구입니다.”
마네킹에 전시되듯 걸려 있는 호구.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제대로 된 명품(名品)이었다.
오랜 세월 검도를 해 오며, 수만 개의 호구를 봤던 성현이기에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건 지금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물건이라고.
훗날 혁신적인 신소재가 나오기 전까지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그런 명품이었다.
“가죽은 최고급 사슴 가죽으로만 사용했고, 최고의 장인이 손수 바느질했습니다. 면금은 저희 측에서 개발한 신소재를 썼으며, 내부 재질 또한 여타 호구들에 비해 획기적으로-”
천수아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호구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실로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호구였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깔끔한 검은색 호구는 군데군데 금빛으로 장식이 수놓아져 있어, 미려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성현이 직접 다가가서 확인해 본 결과, 가죽의 부드러움 또한 여타 호구 이상이었다.
그러면서도 가볍고 튼튼하기까지!
게다가 최고의 장인이 바느질했다는 말처럼 마감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고, 내부 재질을 비롯한 모든 곳이 최고급이라 부르기 아깝지 않았다.
설명을 마친 천수아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어떠십니까?”
“···끝내주네요.”
성현이 감탄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품질이었다.
최고급 호구라고 못을 박았으니 좋은 게 오리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이 정도 수준일 줄은.
가격대로만 치면 천만 원은 우습게 넘기리라.
심지어 천수아의 설명대로라면 언더키에서 개발한 신소재를 썼을 테니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봐도 좋을 터.
“이렇게 좋은 걸로 준비해 주실 줄은 몰라서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회장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습니다.”
“회장님이요? 언더키의?”
갑자기 여기서 언더키 회장이 왜 나온단 말인가?
물론 성현은 천수아가 언더키 회장의 손녀, 즉 재벌 3세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전’의 그녀가 그에게 이야기해 줬으니까.
다만 그때는 이미 회장이 고인이 된 후였기에 별다른 설명이 없었는데, 갑자기 학생 선수 후원에서 튀어나오니 놀란 것이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회장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무도가 바로 검도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하셨을 만큼 사랑하시죠. 지금도 대회를 시간 나실 때마다 찾아보시고요.”
흐릿하게나마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더키가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검도에 꾸준하게 투자를 해서 이만큼 규모를 키운 게 다 천병중 회장의 검도 사랑 때문이었다던가.
그런 사람인만큼, 천수아의 말대로 이번 검도 유망주 대회도 챙겨 봤을 게 분명했다.
즉, 성현의 검도를 눈으로 봤다는 뜻이다.
검도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그 압도적인 실력을.
“그분께서 이번 검도 유망주 대회에서 이성현 선수의 솜씨를 보고 특별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언더키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여력을 다해 지원하라- 라고.”
천수아가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흥분에 차 눈을 반짝이면서, 아이처럼 소리치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 까닭이다.
작년, 백성호의 등장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건만.
아마 어렸을 때부터 꾸준하게 두각을 드러낸 백성호와는 달리, 갑자기 나타난 성현의 존재가 깜짝 선물같이 느껴져서이리라.
‘심지어 실력도 뛰어난데, 중단세와 상단세를 자유롭게 오가기까지 하니.’
하나 단순히 실력만 뛰어났다면 천병중 회장도 지금처럼 미친 듯이 기뻐하지는 않았으리라.
실력이 뛰어난 이는 종종 나타나곤 하니까.
천병중 회장, 천수아의 할아버지가 성현의 검도에 푹 빠진 것은 그가 가진 개성 때문이었다.
결승전 전까지는 중단세를 취하다가, 결승전에서는 처음으로 상단세를 보여 주며 상대를 압살해 버리는 그 모습!
골수까지 검도 애호가인 천병중 회장에게 성현은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검도 만화의 캐릭터 같았을 터.
‘솔직히, 백성호 선수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천수아 개인의 의견일 뿐이었다.
“모든 것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 회장님께서 이성현 선수에 대해 하신 이야기입니다.”
“하하, 그렇게까지 말해 주시니 좀 부끄럽네요.”
“아뇨, 저도 회장님 생각과 같습니다. 이성현 선수에게는 마땅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요.”
곧 천수아가 지시를 내리니 직원 한 명이 들어와 가방에 호구를 조심스럽게 담아 성현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성현이 어깨에 걸쳐 메자, 지켜보던 그녀가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회장님께서는 이성현 선수의 향후 활약에 대해 기대하는 중이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천수아는 성현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듯이 잡았다.
굳은살이 가득 잡혀 있는 거친 손.
거기에는 그가 검도에 보인 열정과 노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고개를 든 그녀가 성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이성현 선수가 앞으로 만들어 갈 미래에 큰 기대가 있어요. 분명, 당신은 검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테니까요.”
천수아의 진심이 담긴 말.
그것을 들은 성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호선을 그려 냈다.
그녀의 말에 담긴 마음이 와닿은 까닭이다.
‘검도 역사에 한 획이라···.’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성현은 천수아가 말한 ‘검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미 그건 과거로 돌아오기 전, 그가 한 번 해냈던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단 십 년 만에 해냈으니.
그래서 그는 전설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다시 얻은 생에서는 그보다 더한 것,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저 맹목적으로 더 높은 경지에만 집중하던 성현의 생각이 달라진 건, 태준의 조언 덕이었다.
태준이 한 말을 들은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다는 사실을.
단순한 경지의 추구를 넘어서, 검도계에 다시 없을, 영원불멸한 금자탑을 세울 수도 있다는 걸.
심지어 그건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였지.
‘─신화(神話)를 써 내려가는 것도 좋겠지.’
전설이 아닌 신화.
이미 검도계의 전설로 칭해지던 이가 과거로 돌아온 이상, 그 정도는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바로 오늘 광천고 남자 검도부에 그럴 만한 잠재력이 있음을 확인한 뒤였다.
2학년 트리오의 실력을 키워 주고, 더해서 1학년 중에 발견해 낸 ‘그 녀석’까지 제 몫을 하게 된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래서 성현은 웃었다.
새하얗게.
“기대에 보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저 담담하게 속삭일 뿐인 말.
하지만 그 안에는 감히 부정할 수 없는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 된 고등학생이 내뱉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힘이.
그랬기에, 천수아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참으로 기묘한 떨림이었다.
“···믿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천수아가 물러섰다.
호구가 별일 없이 전해졌으니, 이제 그녀의 역할은 끝났다.
차후 그가 요구하는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천수아를 뒤로한 성현은 관계자실을 빠져나왔다.
목적했던 호구도 얻었겠다, 이제 곧바로 집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나온 탓에 꽤 시간이 이르기는 했지만, 그만큼 휴식을 더 취해서 몸의 피로를 풀면 되는 일이니.
딱 검도 섹션을 빠져나오기 전, 익숙한 얼굴을 보기 전에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응?”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