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강한 열망 >
먼저 입을 연 건 손대현이었다.
현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전 중 가장 약하지만, 대신 누구보다 불타는 투지를 가진 소년.
그는 언제나처럼 선명한 눈빛으로 자신의 불알친구 조윤호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우리가 다른 주전들 발목만 잡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지.”
조윤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는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친구 대현과는 달리, 윤호는 늘 냉랭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열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차가운 표정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을 뿐, 그는 대현만큼이나 뜨거운 가슴을 가진 소년이었다.
“거절한다고 해도 물어볼 만한 가치는 있어.”
“그거 거절당하고 쪽팔린 거보다, 쉬어가는 순서 소리 듣는 게 더 쪽팔려. 인정?”
“인정.”
“···갑자기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대현과 윤호, 두 사람의 대화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끼어든 건 최영준이었다.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전 2학년 트리오의 마지막 한 명이자, 성현이 두각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차기 에이스였던 소년.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의 영준이 말했다.
“앞뒤 다 자르고 얘기하면 난 어떻게 알아들으라고, 이 나쁜 새끼들아.”
“뭐야, 너 단톡방 확인 안 했어?”
“응? 아, 쌓인 거 많길래 그냥 내렸지. 미친놈들이 무슨 몇 시간 만에 삼백 개가 넘게 쌓여.”
영준의 말에 대현과 윤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러게. 대충이라도 읽지.”
“어차피 너희가 얘기해 줄 건데, 뭐. 아무튼. 무슨 얘긴데? 설명 좀.”
영준이 재차 물었다.
그의 질문에 서로를 바라보는 대현과 윤호.
잠시 머뭇거리던 두 사람 중 대답한 건 윤호였다.
“···성현이한테 가르쳐 달라 하자는 얘기야.”
“성현이한테? 뭘?”
“우리가 걔한테 배울 게 뭐가 있겠냐? 후배한테 공부를 배울 것도 아니고.”
설마, 하고 영준이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이 두 사람이 성현에게 배울 거라곤 단 하나뿐이었지만,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해 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성현은 일 년 후배였으니까.
하지만 대현은 특유의 냉정한 표정으로,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당연히 검도지.”
“···어···. 진짜로? 성현이 걔한테 검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게? 너희가?”
영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검도는 굉장히 예의를 중요시하는 무도였기에 다른 곳보다 덜하지만, 어쨌든 운동부는 운동부.
대개의 운동부가 그렇듯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굉장히 강했다.
한 학년 위의 선배라면 모를까, 그 반대인 후배에게 검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대현과 윤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미 어제 그에 관해 충분히 깊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에 따라 굳은 결심을 한 까닭이다.
“실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연습이지만.”
“자기보다 더 잘하는 사람한테 충고를 듣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
“그럼 굳이 걔가 아니어도 되잖아.”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현재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전 중 가장 약한 두 사람이 바로 대현과 윤호다.
즉, 이들이 검도를 가르쳐 달라 할 수 있는 이들은 후배인 성현 말고도 많다는 이야기였다.
정철이나 경진, 현성 같은 3학년생들 말이다.
그들을 두고 굳이 선배의 자존심까지 꺾어 가며 후배에게 가르침을 구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생각해 보기는 했는데···.”
“뭔가, 성현이 걔는 선배들보다 더 잘 가르쳐 줄 것 같아서.”
“맞아. 걔 실력 엄청나게 빨리 늘었잖아.”
대현과 윤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썩 무리는 아니었다.
불과 한 달 전, 춘계 대회 직후까지만 해도 일반부원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던 성현이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광천고 검도부 주장 순서를 맡은 데다가, 정철조차 한 수 접어 줄 정도고, 심지어 검도 유망주 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다!
그렇듯 빠른 실력 향상 속도의 비결을 얻을 수 있다면, 가르침을 구하러 고개를 숙이는 것이 무슨 대수랴.
‘게다가, 엄청나게 강하기도 하고.’
‘솔직히 우리 중에서 제일 강하지 않나?’
그건 성현이 경중고의 임시 주장, 백지호를 압도적으로 짓뭉개 버렸을 때 느꼈던 감상이었다.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재차 백지호를 완파하며 검도 유망주 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물론 이런 생각을 내뱉는 건 다른 주전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터라,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후배한테 배우는 건데, 그- 쪽팔리지 않겠냐?”
“아니, 별로. 후배한테 배우는 게 뭐가 쪽팔려.”
“원래 잘하면 형이랬어. 이제부터 성현이가 형이다. 인정?”
“인정.”
영준의 질문에 윤호는 담담하게 부정했고, 대현은 장난스레 농담을 내뱉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대답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굳은 결심이었다.
듣고 있던 영준마저 고개를 끄덕거릴 만큼.
곧, 영준의 표정에도 강한 의지가 어렸다.
“-좋아, 그럼 나도 간다.”
“영준이 너까지···?”
“너는 왜? 경중고랑 연습 경기 때도 이겼잖아.”
“아슬아슬하게 겨우 이긴 거지. 솔직히 졌어도 할 말 없었어. 게다가 다음번에 붙으면··· 분명 질 거 같고.”
경중고의 중견, 안정철과의 연습경기를 떠올린 영준이 얼굴을 찡그렸다.
비록 그날에는 1-0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다음에도 똑같이 이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부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한 그와는 달리, 상대는 전력을 냈다는 느낌이 아니었기에.
한판을 빼앗긴 뒤에는 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는지 악착같이 하긴 했지만, 결국 시간 부족으로 패배하고 말았고.
여러모로 운이 좋았기에 이길 수 있었던 경기라고 영준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더 강해져야 해. 중견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도록.’
존경하는 선배, 정철이 믿고 맡긴 자리다.
영준은 그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든 고개 숙여 배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네가 그렇다면야···. 그럼 셋이서 가자.”
“오케이! 빨리 가자고!”
“···음, 근데 생각해 보니까. 그럼 나도 형이냐? 잘하면 형이라며. 그러면 여기서 내가 큰형인가?”
“개소리하지 말자, 영준아.”
“아, 왜-! 맞잖아!”
그렇게 성현을 향해 걸음을 옮긴 세 사람.
가볍게 후리기를 하고 있던 성현이 은근슬쩍 다가온 2학년 트리오를 보고 죽도를 멈췄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성현은 굉장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기야,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던 이들이 갑자기 그에게 걸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단 오긴 왔지만, 아무래도 미묘한 기분에 우물쭈물하던 2학년 트리오 중 앞으로 나선 건, 역시나 가장 투지 넘치는 성격인 대현이었다.
“성현아!”
“아, 네. 대현 선배님.”
“선배님은 됐고, 형이라 불러! 같이 연습 경기도 치른 사이잖아.”
“···알겠습니다, 대현 형.”
“그래, 형이야! 형이 너한테 부탁 하나가 있는데, 혹시 들어줄 수 있겠냐?”
성현이 볼을 긁적였다.
무슨 부탁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듯 친근하게 다가오는 선배를 듣지도 않고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탁에 대한 거절이야, 내용을 듣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고맙다! ···그게 말이지, 실은 우리가 요새 고민이 많거든.”
“고민이요?”
“툭 까놓고 말할게. 나랑 윤호가 주전 중에서 제일 약하잖아. 그래서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단 말이지.”
대현의 말은 일체의 과장 없는 사실이었다.
이건 성현도 알고 있었다.
직접 그의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저들은 매일 아침 훈련도 꼬박꼬박 참가하고, 방과 후 때도 거의 그와 비슷할 정도의 시간을 훈련하고 귀가하고는 했으니까.
비록 실력 늘어나는 속도는 더뎠지만, 그 열정만큼은 높이 사고 있었는데···.
“근데 단순히 우리끼리 연습해 보는 거로는 한계를 느꼈어. 그래서 말인데. 음···, 성현이 네가, 우리한테 검도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냐?”
“···네?”
“그, 뜬금없는 소리인 건 아는데. 네가 실력 진짜 빠르게 늘었잖아. 비결이라도 알고 싶어서···. 물론 네가 싫다면 괜찮아! 부담 없이 말해! 이거 갖고 쪼잔하게 뭐라 할 사람 아니니까!”
대현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성현이 놀란 표정이 된 건 그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이유에서였다.
갑자기 선배가 검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는 점에서 놀란 건 맞으나, 그로 인한 부담감이 겉으로 표출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성현의 놀람은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어젯밤에 집에 가며 생각했던 것들.
‘이게, 이렇게 된다고?’
태준과 신나게 놀고 집에 가던 길에 성현은 생각했더랬다.
자신이 직접 가르쳐 줌으로써, 남자 검도부 주전들과 함께 단체전에서 우승을 해 보고 싶노라고.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였기에 고개를 내저었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오늘, 2학년 두 사람이 먼저 가르쳐 달라며 다가온 것이다!
‘기묘하네.’
단순한 우연의 일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왠지 신기하게 느껴졌다.
개인전 우승에 단체전 우승의 경력까지 완벽하게 가져가라고 뒤에서 떠미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성현은 대현과 윤호를 바라보았다.
‘검도 실력을 키우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구나.’
선배로서, 후배에게 가르침을 구하며 고개를 숙이기는 퍽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하물며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강한 운동부에서는 더더욱.
그랬기에 성현은 그들의 각오를 느낄 수 있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일단 실력부터 기르고 싶다는 강한 열망 또한.
‘마침 잘됐다.’
성현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들의 실력을 성장시키면, 차후 단체전 우승을 거머쥐는 데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 두 분은 알겠는데 영준 선배는···.”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영준을 본 성현이 슬쩍 물었다.
“나도 그냥 형이라 불러. 그리고, 내가 찾아온 것도 같은 이유야. 너한테 배우고 싶어서.”
“선배, 아니 영준 형까지 말입니까?”
“응. 맞아. 우리 셋 다.”
2학년 트리오 전원이 검도를 배우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였다.
2위인 대현, 3위인 윤호, 중견인 영준까지.
선봉은 실력으로 부족함이 없는 정철이니, 사실상 전반전 인원들이 모두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안 되겠냐?”
절실한 눈빛으로 묻는 대현.
아마 그들도 실력이 잘 늘어나지 않는 걸 느끼고, 마지막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성현을 찾았으리라.
그의 시선을 받은 성현이 빙긋 웃었다.
“안 될 거 없죠.”
“그럼-”
“네, 최대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성현.
2학년 트리오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굉장히 운이 좋은 이들이었다.
오십 대부터 검도장을 운영하고, 이십 년이 넘도록 사람들을 가르쳐 온 성현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의 ‘눈’까지 동원하면,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그게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럼 어떤 식으로-”
“일단, 이렇게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