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여유 >
광천고등학교.
점심시간.
“오늘 놀자. 아니, 논다.”
태준이 성현의 앞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내용만큼이나 굉장히 단호한 어조였다.
굉장히 뜬금없는 제안, 아니 통보에 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놀자고?”
“어, 결정 사항이야. 반박은 받지 않아.”
“갑자기 왜-”
“갑자기는 무슨. 인마, 생각해 봐. 우리가 마지막으로 논 게 언젠지.”
성현은 태준의 질문에 가만히 기억을 되짚었다.
안타깝게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일단 그가 고등학생으로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놀았던 적이 없으니, 분명 그보다는 전이리라.
그렇다면 최소 한 달은 훌쩍 넘었다는 뜻.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성현이 속으로 감탄했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는 탓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벌써 한 달이 흘렀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건 연습 경기 한 번과 검도 유망주 대회뿐이건만···.
“이제 알아차렸나 보네.”
“좀 예전이긴 하네.”
“좀? 한 달이 좀이냐? 안 그래도 재밌는 거 사서 같이 하려고 대기 타고 있었는데!”
쌓인 게 폭발하기라도 한 듯, 태준은 쉴 새 없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여태 대회라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검도 열심히 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한 달에 두 번은 놀 수 있잖느냐 등등.
계속해서 쏟아지는 불만에 성현이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알았어. 놀면 되잖아, 놀면.”
“그래, 잘 생각했어.”
항복 선언을 들은 태준이 킬킬대며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그의 표정이 다소 진지해졌다.
놀자는 말이 진심인 것처럼, 지금 하는 말 또한 진심이었기에.
“요즘 너 보면 너무 검도에 미친 거처럼 살고 있다고. 아슬아슬해 보일 정도로.”
“내가?”
“그래, 인마. 대회 때는 이해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니잖아. 너 그러다가 쓰러질 것 같아.”
꼭 검도 못 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것 같다고, 태준은 그렇게 덧붙였다.
“음···.”
성현이 말없이 볼을 긁적거렸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근 한 달 동안 그는 검도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학교 수업을 받는 시간과 잠들기 전 공부하는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사실상 계속 검도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일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주말까지도.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무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물론 성현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그에게는 이십 년이나 되는 시간을 헛되이 날려 버렸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전’과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도 죽을힘을 다해야만─따악!
“─!”
성현의 상념을 깬 건 이마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이었다.
그가 화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고 있을 때, 멍청한 친구에게 딱밤을 날렸던 태준이 일갈했다.
“표정 펴, 인마! 누가 검도 하지 말랬냐! 쉴 때도 있어야 한다고 한 거지! 누가 보면 앞으로 검도 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일 년 남은 줄 알겠다!”
“······!”
진심 어린 태준의 일침은 마치 벼락처럼 성현에게 박혔다.
뒤늦게 생각해 보면, 어느새 그는 일종의 강박 관념을 갖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전’처럼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이십 년이라는 세월을 낭비했다는 사실은 노인이었던 시절에서 차마 거둘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그랬던 게 진짜로 시간을 되돌아오며 하나의 강박 관념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더 높은 경지를 위해서···.’
계속해서 그것만을 되뇌다 보니, 아예 그것밖에 생각 못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현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기 위해 노력했다.
과거로 돌아온 후, 한 달간 있었던 기억을.
제대로 떠오르는 것은 오직 검도에 관한 것들뿐.
나머지는 모두 흐릿한 걸 보면, 그가 하고 있던 건 거의 집착에 가깝게 보일 지경이었다.
태준이 한 말이 맞았다.
그는 마치 죽을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가 무언가에 집착하듯 검도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제는 전처럼 늙은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런가.”
“그래, 인마!”
“하긴, 그렇네. 응.”
성현은 바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전’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는 건 맞다.
하지만 그 생각에 잡아먹혀 집착처럼 검도에만 얽매인다면 그 또한 멍청한 짓이리라.
당장 그가 검도를 위해 태준과의 인연에 소홀했고, 자칫하면 먼 훗날까지 이어질 뻔한 우정을 놓쳐 버릴 뻔했던 것처럼.
작은 깨달음을 얻은 성현이 활짝 웃었다.
“짜식, 그래. 이 형님이 오래간만에 제대로 놀아 주마. 고마워해라.”
“형님 같은 소리 하네. 개소리하지 마라.”
“허, 놀아달라고 엉길 때는 언제고.”
피식 웃은 태준이 성현의 어깨를 툭 두들겼다.
“암튼, 오늘 우리 집 한번 가자. 안 그래도 보여 주고 싶은 거 있었다고.”
“보여 주고 싶은 거?”
“응. 아마 너도 흥미 있을걸.”
뭔지 궁금해진 성현이 캐물어도, 태준은 어깨만 으쓱거릴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쉽게도 곧 종이 울려 점심시간이 끝나는 바람에 성현은 끝까지 태준이 말한 ‘재밌는 거’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았다 해도 태준의 입에서 정체가 드러나지는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결국, 성현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방과 후.
“자, 가즈아-!”
“가즈아-!”
“······?”
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치 못했던 인원 한 명이 참가한 까닭이다.
‘수연이가 왜···.’
그 인물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수연이었다.
어느새 소리소문없이 끼어든 그녀가 태준과 함께 “가즈아!” 하고 외치고 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현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 슬쩍 다가온 태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래 바늘 가는 데 실도 가는 법이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네가 가는데 수연이가 안 간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음-”
성현은 반박할 수 없었다.
과연 그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소꿉친구로 지내 오면서, 수연은 대부분 그와 함께했으므로. 태준이 바늘과 실이라고 표현할 만도 했다.
그가 말없이 수긍하자, 태준이 까딱 고갯짓했다.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그래, 그러지 뭐.”
“흥흥~ 가즈아~”
그리하여, 태준의 집으로 향하게 된 세 사람.
다행히 썩 먼 곳이 아니었기에 집에 도착하는 건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와- 게임 엄청 많다···.”
태준의 방 안에 들어선 수연이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었다.
확실히 그렇다고 성현은 생각했다.
방 안에는 온갖 유명한 게임기들이 정리되어 있고, 한쪽 책장에는 그 게임기로 할 수 있는 게임 타이틀들이, 또 그 옆 책장에는 온갖 종류의 보드게임들까지 모여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는 태준의 꿈을 생각해 보면 썩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태준은 게임 개발자가 되기를 원했으니까.
‘실제로 되기도 하고.’
미래에 기어코 꿈을 이뤄 냈던 태준의 모습을 떠올린 성현이 살풋 웃었다.
“그래서, 오늘 보여 드릴 게 무엇이냐 하면-”
그사이, 한쪽에 가방을 내려 둔 태준이 방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바로 이겁니다!”
“그건···.”
“···고글?”
태준이 꺼내 든 건 고글처럼 생긴 무언가였다.
어쩐지 굉장히 오래전에 봤던 기억이 나는 물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현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떠올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신난 태준의 입에서 빠르게 쏟아져나왔으니까.
“그냥 고글이 아니야. 이게 바로 그 유명한 VR 기기라는 거다!”
“아-”
“이거 이래 봬도 엄청 비싸! 거의 오십만 원 가까이 주고 샀다니까!”
"오십만 원?!"
생각도 못한 가격에 깜짝 놀라 소리치는 수연.
그제야 성현은 저 고글이 VR, 그러니까 가상현실 관련 게임기 중 가장 초기 버전임을 깨달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증강 현실보다는 완전 몰입형이 개발되고, 그 후로는 완전히 사라져서 다시는 볼 수 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더불어, 성현이 이렇듯 세세하게 기억하는 건 모두 태준의 영향 때문이었다.
가끔 만나 술 한 잔씩 기울일 때면 태준이 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그 또한 자잘하게 알게 된 것들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 할 게임은 이 VR 기기를 이용한 뮤직 세이버다!”
“뮤직 세이버···.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아, 나 그거 알아! 막 뭐 날아오면 칼 휘둘러서 베는 거 아니야?”
“정답!”
수연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거린 태준은 어처구니없는 이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가 하도 검도에 빠져 있어서 내가 특별히 준비한 게임이라고. 봐봐, 검도도 죽도를 휘두르지? 그것처럼 이것도 칼을 휘둘러서 날아오는 것들을 베어 내면 돼.”
“아니 그건 뭔-”
성현도 뮤직 세이버가 뭔지는 알았다.
정확히는 기억해 냈다고 보는 게 옳았지만, 그거야 어찌 되었든 간에.
뮤직 세이버는 리듬 게임의 일종으로, 음악에 맞춰 날아오는 음표의 방향을 따라 컨트롤러를 휘둘러 베어 내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리듬 게임인 그것에 검도가 개입할 만한 여지가 있을 리가─
‘있나? ···왜 설득력이 느껴지지.’
성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미친 것 같은 생각이기는 했지만, 어쩐지 영 틀린 논리 같지는 않아 보인 까닭이다.
검도든, 뮤직 세이버든 반사 신경이 좋으면 이득을 보는 것들이었으니까.
“혹시 아냐. 나중에 막 네가 검도를 익힌 덕에 막 가상현실게임의 재능충 되고 그럴 수도 있잖아.”
“뭐야, 그게~”
“내가?”
수연이 깔깔 웃고, 성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직 검도만 바라보고 살고 있는 그가 그럴 리가!
차라리 그의 아들, 아니 한 증손자쯤 되는 인물이 가상현실게임의 천재라고 불리는 게 더 그럴듯한 이야기이리라.
그때쯤이면 완전 몰입형 가상현실이 제대로 상용화됐을 테고, 그의 재능을 물려받은 이라면 의외로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오늘따라 바보 같은 생각이 많이 드네.’
실없이 웃는 성현에게 태준이 척, 고글 형태의 VR 기기를 내밀었다.
“자, 어디 한번 해 봐!”
“오케이. 내가 먼저 해 본다.”
“성현아, 힘내~”
그렇게, 세 사람은 신나게 놀았다.
여담이지만, 태준의 바보 같은 논리는 의외로 잘 들어맞았다.
찰나의 시간을 다투는 검도에서 동체 시력과 반사신경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고, 뮤직 세이버에서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처음 하는 것임에도 수월하게 해내는 성현의 모습에 “너 뭔데, 왜 진짜 잘하냐고!”라며 태준이 낄낄대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그도 별생각 없이 지껄여 댄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던 거다.
“······.”
그리고 집에 가는 길.
아주 오랜만에 친구와 원 없이 놀았던 성현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밤하늘을.
오늘, 태준은 그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얽매이는 것도 바보 같은 짓임을 알려 줬으니까.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걸 위해 모든 걸 버릴 필요는 없지.’
다른 것에 한눈을 팔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다소의 여유를 깨달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자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변··· 이라.’
역시나 검도에 모든 것을 바친 이답게, 그 단어에서 떠오른 건 남자 검도부 주전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검도부 단체전에서 우승하고 싶다는 바람이 살며시 생긴 것이다.
경중고의 연습 경기를 통해 본 가능성.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한번 열어 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봐도 좋았다.
‘뭐, 가능성 없는 이야기지만.’
하지만 곧 성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단체전 우승은 그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직접 나서서 가르치고, 다른 주전들이 그것에 따라 훈련을 한다면 꽤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겠지.’
후배에게 가르침을 받는 선배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아마 성현이 가르쳐 주겠다고 나서는 행동을 썩 달갑잖아 하리라.
그런 마음으로 훈련을 한들, 잘 될 리가 없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그냥 뭐. 이것저것.”
*
“나는 일단 시도라도 해 보는 게 좋다고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