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후원 계약 >
천수아의 인도에 따라 성현 일행이 향한 곳은 잠실 학생 체육관 근처에 있는 카페였다.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카페.
자연스럽게 일행을 자리에 앉힌 그녀는 앞자리에 앉으며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마실 거부터 시킬까요? 어떤 거로 드시겠어요? 부담 없이 말씀해 주세요. 성현 선수, 수연 선수. 그리고 하윤 선수랑 음···.”
천수아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하윤이야 후원 계약을 진행하며 이래저래 면식이 있었지만, 성하와는 완전히 초면이었기 때문이다.
만나자마자 카페로 이동하여 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성하가 대수롭잖은 듯 말했다.
“이성하예요. 성현이 얘 누나고요.”
“네, 성하 씨. 저는 천수아라고 해요. 언더키에서 선수후원기획팀 팀장직을 맡고 있어요.”
“아까 듣긴 했어요- 그나저나 팀장이시라니. 대단하시네요.”
“별말씀을요. 그냥 운이 좋았어요.”
짧게나마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다만 그들은 표정은 웃으면서도 서로를 은근히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천수아는 성하가 성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늠해 본 거고, 성하도 그녀 나름대로 천수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헤아린 것이다.
설령 어떤 언행을 하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드러나는 요소들이 있으니까.
“나는 캐러멜 마키아토! 성현이랑 하윤 선배는 뭐 마실 거예요?”
“음- 카페모카로 할게.”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누나는 뭐로 할래?”
그러는 사이, 메뉴판을 보고 있던 나머지 일행은 곧 원하는 음료 하나씩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성현이 성하에게 묻자, 천수아로부터 시선을 거둔 그녀가 언제 상대를 탐색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 나도 너랑 같은 거로.”
“···들었죠, 정원 씨? 저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해서, 주문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정원이라 불린 남자가 재빨리 고개를 숙여 대답하곤 주문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를 흘깃 바라본 천수아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일단, 두 분 모두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 거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강수연 선수의 실력은 흠잡을 곳이 없더군요. 탄탄한 기본기부터, 능숙한 경기 운영까지. 괜히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님을 다시 알게 됐어요. 특히 주의 깊게 봤던 건 결승에서-”
쏟아지는 격찬에 수연이 헤실헤실 웃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라.
후원 계약을 위해 일부러 꺼낸 칭찬임을 알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성현 선수는···.”
한참 수연을 칭찬하던 천수아가 성현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진한 열기가 어렸다.
성현의 머리치기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했던 그녀는, 결승전에서 보여 준 상단세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에 상단세를 취한 성현은 사람이 아니라 불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너무나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꽃!
넋 놓고 결승전을 보던 중, 문득 머릿속에 ‘태양’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었더랬다···.
“중단세일 때는 그야말로 완벽했어요. 제가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치 수십 년간 단련해 온 것처럼 보였을 정도니까요. 결승전 때의 상단세는. 그건, 정말이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 우왕좌왕하는 천수아.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던 그녀가 보여 주는 이러한 모습은 얼마나 그의 검도를 감명 깊게 봤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전’의 그녀가 보여 준 성미를 알고 있던 성현이기에 그게 더욱 와닿았고.
“···대단했어요. 제 빈약한 어휘로는 그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과찬이십니다.”
성현이 차분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한 차례 칭찬 세례가 진행되고 나니, 분위기는 한층 가벼워졌다.
바로 이러한 순간을 기다렸던 천수아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후원 계약 관련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천수아의 말을 들은 수연을 비롯한 여성진들의 표정이 한껏 진지해졌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본래 계약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맺었다간 크게 낭패를 볼 수도 있었으니.
그건 아무리 후원 계약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독소 조항을 못 보고 넘겼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계약서는 무조건 꼼꼼하게 살펴야 해!’
‘나는 잘 계약했지만, 만에 하나가 있으니까···.’
‘동생 녀석은 머저리고, 수연이는 순진하니 내가 도와줘야지.’
물론 그런 여성진들의 걱정과는 별개로, 천수아는 독소 조항이 든 계약서를 내밀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재능을 볼 수 있는 자신의 눈을 신뢰했고, 또 그 재능에 따라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였기 때문이다.
성현이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무덤덤한 표정인 것도 그래서였다.
‘수아 씨 성격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지.’
‘전’에 언더키와 후원 계약을 맺고, 꽤 오랫동안 활동하며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은 계약서의 내용을 요약한 것들이에요. 그러니 나중에 꼭 계약서를 확인하시는 게 좋아요. 아셨죠?”
“네, 네!”
“저희 ‘언더키’에서 이성현 선수와 강수연 선수에게 제공해 드릴 수 있는 후원은─”
담담한 목소리로 천수아가 늘어놓은 후원 내용은 꽤 파격적이었다.
일단, 언더키 측에서 성현과 수연 두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죽도와 호구를 포함한 장비 일체, 더해서 다양한 소모성 용품 전부였다.
사실상 후원 계약 기간 동안은 검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무상 제공하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리 놀라울 게 없었다.
애초에 언더키는 스포츠용품 브랜드고, 후원 계약을 맺은 선수가 자사 제품을 사용하면 홍보 효과도 누릴 수 있으니 제공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장비들은 무조건 최고급품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최고급품이요? 그럼 혹시 딜라이트 매장에 있는 것도 가능한가요?”
“얼마든지요. 거기 있는 거면 최고급품 라인이 아니라 고급품 라인일 텐데, 당연히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수연의 질문에 천수아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전, 성현과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 때 봤던 호구를 떠올린 수연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와···. 좋다. 그치, 성현아?”
“응. 그러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겨우 장비 제공에 그친다면 ‘파격적’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을 테니까.
장거리 이동 시합마다 버스 대절은 물론, 지속적인 검진을 통한 건강 상태 확인, 부상 시 치료비 지원, 휴식할 때 원하는 장소 제공에 이르기까지.
천수아가 담담히 덧붙인 것들은 그야말로 “넌 검도만 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줄게!”라고 말하는 듯한 후원들이었다.
“그, 그럼 저희는 뭘 지켜야 하죠?”
“네?”
“이렇게 많이 주시는 거면 뭔가 조건이 많지 않을까 해서요···.”
“아- 두 분께서 지켜야 할 건 딱 두 가지입니다.”
심지어 성현과 수연이 언더키 측과 지켜야 할 약속은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후원 계약 도중에 별다른 사유 없이 운동을 그만두지 않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언더키 외 회사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
두 조건 모두 정말 기본적인 제한이었으므로, 긴장하며 물었던 수연조차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그게··· 전부예요?”
“네, 그렇습니다.”
수연의 당황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학생 선수에게 기업이 제안하는 후원 계약이 훗날을 보는 ‘찜’ 계약에 가까워, 다소 베푸는 경향이 크다 해도, 이건 정말 상식 밖이었으니까.
대개 학생 선수와 계약하는 기업은 장비 제공 정도로만 그칠 뿐이다.
그마저도 지금 언더키처럼 최고급품, 가격대로 따지면 천만 원이 넘을 장비마저 제공하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장비 제공 정도였고.
이를 고려해 보면 얼마나 언더키가 파격적인 제안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때도 여전했구나.’
검도를 하는 세 사람 중에서 이 파격적인 제안에 당황하지 않은 건 성현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 ‘전’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천수아처럼 ‘전’의 천수아도 반드시 얻어야 할 선수라고 판단한 순간, 파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후원을 함으로써 손에 넣었었으니까.
막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별 볼 일 없는 삼십 대 중반의 선수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 주며 언더키와 후원 계약을 맺었듯이 말이다.
-뭘 믿고 이런 계약을 제안하냐고요? 전 수십 년 동안 틀리지 않은 제 안목을 믿어요.
그게, 언더키라는 거대한 회사의 임원이었던 천수아가 직접 후원을 제의하러 와서 한 말이었다.
그녀의 열의에 감탄한 성현은 언더키와 계약을 맺고, 오십 대의 나이에 반 은퇴를 하기 전까지 언더키의 이미지를 한껏 높여 줬었다.
그 대가로 그는 언더키의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최고의 호구를 후원받을 수 있었고.
서로에게 WIN-WIN이었던 후원 계약이었다고나 할까.
“으음···.”
수연이 컵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지금 들은 것만 보면 계약을 하지 않는 게 바보짓일 정도였지만, 어쩐지 뭔가 뒤에 숨기고 있는 게 있지 않나 싶은 까닭이었다.
어느 정도 좋은 수준이었다면 ‘이만큼이나 대우해 주는구나!’ 했을 텐데, 그런 수준이 아니었으니.
“후원 계약 내용이 저대로라면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혹시 고민하는 이유가 있어?”
“아뇨, 오히려 너무 좋아서 고민이에요···.”
성하의 질문에 수연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무 좋아서 고민이라고?”
“네, 뭔가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해도 되나 싶을 정도라서-”
“그럼 계약서만 일단 받아 두자.”
성하가 재빨리 속삭였다.
“계약서만···.”
“고민될 정도로 조건이 좋다며. 계약서도 똑같이 적혀 있고, 확인해 봐서 나쁜 거 없으면 그대로 계약하면 되잖아?”
“나도 성하 언니 생각이랑 같아. 지금 이건 놓치기 아까운 기회니까.”
확실히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계약서에 따로 독소 조항이 없는 한, 계약한다 해서 나쁠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
성하와 하윤의 귓속말을 들은 수연이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다, 이내 성현을 보았다.
그에게 바싹 붙은 그녀가 귀엣말을 건넸다.
“성현이 너는 어쩔 거야?”
“나? 나는 계약서 받고 문제없으면 할 거야.”
“그래-? 그럼 나도 그래야겠다!”
성현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의견이었던지라, 수연은 결국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현과 수연은 천수아에게서 계약서를 건네받았고, 차후 계약서 내용에 별다른 문제점을 찾지 못한다면 계약을 하겠다 이야기했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천수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체로 후원 계약은 계약서 검토도 해야 하는 만큼, 그 자리에서 즉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래도 계약서에 문제가 없으면 하겠다는 말이 나왔으면···. 사실상 계약 성립이지.’
이후로 좋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짐작한 천수아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여러분.”
“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성현이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마주 잡았다.
‘전’의 천수아가 내민 손을 맞잡았던 것처럼.
*
[스포츠 뉴스입니다!]
[전국 고등학교 검도 유망주 대회에서 광천고등학교의 이성현이 경중고등학교의 백지호를 2 대 0으로 완파하며 남자부 정상에 올랐습니다.]
[여자부에서는 광천 고등학교의 강수연이 서울여자고등학교의 김민지를 2 대 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천정훈 기자입니다.]
TV 화면 속 남성 리포터가 말했다.
곧 화면이 뒤바뀌며 잠실 학생 체육관 내부의 모습이 비쳤다.
한창 검도 대회가 치러지고 있던 때였다.
정확히는, 성현이 백지호를 상단세로 압박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성현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어찌나 강렬한지, TV 화면 너머로 선명하게 전해질 만큼.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년은 이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재밌네···.”
하늘이 내린 재능, 한국 검도계의 희망이라 불리는 소년, 백성호.
그가 성현에게 제대로 흥미를 갖는 순간이었다.